20180208 그리스 - 테살로니키: 아라차 이마렛 사원, 비잔틴 목욕탕, 예디쿨레
1484년에 완성된 이슬람 사원으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터키인 여행자들이 도시를 관광할 때 이 곳을 많이 들른다고 한다.
이 곳을 돌아서 정문으로 들어가려하는데 개가 달려들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주인이 제지를 시켰다.
사원 안에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곳은 내가 방문했을땐 입장료가 없이 무료였는데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들어갔다.
들어가니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전시회와 건축물을 감상했다.
나중에 직원분을 볼 수 있었는데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원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직원분이 한국어로 작성된 이 포스팅을 볼리 없겠지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
원랜 이슬람사원에 칠해져 있었을 아랍어 서예와 문양이 많이 훼손되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훼손이 심각해 보이지만 얼마남지 않는 부분도 아름다웠다.
참고로 그리스의 무슬림들과 터키인들, 터키의 민족주의 정당 MHP는 이 곳을 다시 이슬람사원으로 복원할 것을 그리스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터키 정부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기아 소피아마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는데 말이다...
메카가 위치한 방향을 알려주는 미흐랍도 남아있었다.
이스탄불에 있던 카렌데르하네 모스크(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성당)에 갔을때 딱 이 정도 남아있는 성당시절 프레스코 화를 보기위해 일부러 방문했던게 떠올랐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거 하나 보려고 한참을 걸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뭔가 특별하게 좋아하는게 있는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래된 오스만 양식 주택이다.
그리스에서 이런 집들이 많이 없어졌다지만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다.
많은 비잔티움식 목욕탕이 도시에 지어졌지만 남아있는건 이 곳 뿐이다.
1940년까지 목욕탕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가끔 역사 유적은 퍼즐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1000년 전엔 로마제국 어느 도시에나 목욕탕이 있고 원형 극장이 있고 했겠지만 지금은 목욕탕은 이 곳 테살로니키에 그리고 원형 극장은 또 다른 도시에 있는걸 참고해야 하나의 온전한 도시의 모습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는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오스만식 분수대가 있었다. 아랍어 부조가 선명한데 보존 상태가 좋아보인다.
도시를 굽어보는 비잔티움 요새에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탑이다.
문위의 팀파눔엔 아랍어로 된 동판이 붙어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일몰이 지난뒤라 이 곳으로 야경을 찍으러 오면서 나름 경계를 하면서 왔는데 다행히 아주 안전했다.
테살로니키 비잔티움 성벽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다.
로톤다 영묘를 중심으로 해안까지 길이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다.
도시의 형태가 똑같은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터키의 이즈미르(원래 이름은 스미르나)를 갔을때 도시의 분위기가
테살로니키가 많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같은 민족이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
테살로니키에도 콘스탄티노플처럼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롬이 있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나보나 광장이 되었다면 이 곳은 차도가 되었다.
이 도로가 옛 히포드롬의 형태를 따라 만들어진 곳이다.
로마, 이스탄불, 테살로니키 모두 히포드롬 경기장은 사라졌지만 유구의 일부를 보존하고 그 곳에 원래 히포드롬이 있었다는 사실이 잊혀지지 않도록 기념한다.
갑자기 서울에 있던 동대문 야구장이 생각난다. 만들어진지 100년 가까이 된 경기장이었는데 하다못해 야구장 구획만이라도 남겨놨어야 하는데 아쉽다...
테살로니키 성벽으로 그 역사가 3세기까지 올라가며 5,6 세기 야만인들의 습격과 10세기 사라센인들의 점령, 13세기의 재건등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거듭한 요새이다.
원랜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처럼 2중 성벽으로 되있었고 성벽 간 거리가 10미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한겹만 남아있다. 그리스도 터키처럼 도시계획을 위해 성벽의 일부를 제거했다고 한다.
한때는 성문이 여러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이 곳 북문만이 현존한다.
이 곳을 걷다가 5유로를 주었다. 어두운 밤길에 누가 떨어뜨렸나보다.
엡타피르지오 요새로 중앙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터키어로 예디 쿨레라고 불렸다.
뒤에 있는 성벽은 이곳에 자리했던 아크로폴리스의 일부였고 왼쪽의 성벽은 동로마제국 시대에 추가된 성벽이다.
위에서 찍은 야경이 이 성채 위에 올라가서 촬영한 것이다.
요새 북문 근처에 비잔티오라는 카페가 있었다.
잠시 들러서 프라도 에스프레소라도 있으면 마시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으면 호스텔의 다른 투숙객들에게 폐가 될것 같아서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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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그리스 - 파나기아 찰케온 성당, 로만 아고라,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
4세기에 지어진 분수대의 유구로 고대 로마제국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지어진 것이다.
오스만 제국때도 그대로 사용되었고 그리스 독립 후에도 196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그리스 독립후엔 'Phoenix bath'라는 이름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지나가는데 하맘 정문 앞에서 롬인(집시) 소년이 오줌을 싸고 있었다.
한때는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들이 이 곳을 만들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스프레이를 뿌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곳이 되버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관리소홀일수도 있고 그냥 방치해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문화재를 조리돌림하면서 욕을 보이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이러한 방치상태가 그리스라는 나라의 문화적인 격에 맞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그 정돈 아니겠지만 우리 한국사람들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철거할때 일본에게 한방 먹였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사실 그리스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이, 그리스의 오스만 제국 건축물들이, 그리고 터키의 비잔틴 시대 건축물들이 각 나라의 정부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억의 장소로서 활용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파나기아 찰케온' 성당으로 1028년에 지어진 성당이다.
서쪽 입구의 비문에 새겨져 있는대로 이 곳은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 본래 이교도(로마 다신교)들의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었다.
성당이 동로마 시대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진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스만 제국 시대엔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어 카잔질라 자미(Kazancilar Camii)로 불렸는데 구리 대장장이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현재 이름인 파나기아 찰케온(구리 대장장이의 성모교회)도 이슬람사원일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3개의 돔이 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지어진 성당들과 동일한 구조를 보여준다.
나르텍스 팀파눔에 동로마 제국 시대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지금은 비어있었는데 과거의 공구용품점 같았다.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아크릴 간판의 모습이 향수를 불러왔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아고라 유적이다.
원래 있었던 아고라 구역보다 축소된 부분만이 남아있다.
동쪽엔 조폐국과 도서관, 극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로마제국이 자랑했던 선진문명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겠고 말이다.
솔직히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그리스가 역사의 전면에서 활약했던 황금기와 비교해서 몰락했다는 느낌보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모습에서 왜 그리스의 문화가 서양과 중근동까지 퍼져 나갔는지 잘 느낄 수 있었다.
남쪽엔 상점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으로 고대 로마시대 목욕탕이 자리했던 곳으로 디미트리오스 성인이 순교한 곳이다.
이후 5세기에 성당이 지어졌고 전소되었지만 원형을 살려 7세기에 재건된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뒤로 1493년에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는데 이때 바뀐 이름이 '카시미예 자미(Kasimiye Camii)'다. 카시미예는 디미트리오스 성인의 이슬람식 이름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존경받았던 성인이라고 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나서도 기독교도들이 디미트리오스의 무덤에서 참배하는 것이 허용됐다고 한다.
1912년 도시가 그리스령이 된후 카시미예 자미는 다시 성당으로 복원된다.
1917년 대화재로 인해 성당의 상층부가 대부분 전소되게 된다.
대화재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원래 불이 기독교인 마을인 동쪽으로 옮겨붙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으로 불이 옮겨붙어 몇시간동안 타게 된다.
그런데 성당이 전소되면서 불은 기독교인 마을 방향이 아닌 바다 쪽인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사람들은 디미트리오스 성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희생해 기독교인들을 구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 후 복원작업에서 1층과 2층의 일부, 그리고 남아있는 건축부재들을 최대한 보존해서 복원해서 현재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재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회반죽으로 덮여있었던 모자이크가 드러나게 됐다고 한다.
현재 모습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7세기에 지어진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구 동로마 제국령, 그리고 현대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들은 몇몇 경우를 빼면 그 원형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교회 자체가 성당을 개조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신중하고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성당들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할 때에도 미나렛을 새로 추가하는 것을 제외하면 건물의 구조 자체를 없애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개조될때 내부에 있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예외적인 몇몇 곳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해지지 않는 편이다.)
성당 지하에는 고대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과 카타콤베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땐 운영시간이 끝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대화재로 전소된 성당의 모습이다.
로마의 산파올로 푸오리 데 무라 대성전도 화마를 입었을때 이렇게 열주와 앱스만 남고 전소됐었다...
성당 앞 광장의 바닥은 본래 유대인 묘지의 석재로 지은 것이다.
한때는 유대인 인구가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동안 95%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때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묘지를 파괴하고 그 곳에 있던 비석들을 반출해서 망자들의 이름을 지우고 사용한 것이다.
현재의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가 위치한 자리에 유대인 묘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인 묘지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때문에 유대인들도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조상들의 묘비 위를 걸으면서 말이다.
성당의 서쪽 측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성당의 후면부로 여기도 다른 고대 성당들처럼 플라잉 버트레스 역할을 하는 버팀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정말 교과서적인 정통 바실리카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17년 대화재의 흔적을 알 수 있는데 1층의 아치가 군데 군데 빠져있고 2층 기둥은 새로 교체된 것이다.
일부러 새로 지은 부분은 누구나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증축을 치적삼아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고 하기보다 초기 성당의 원형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사제들에 의해 오늘날 사람들은 1500년전에 지어진 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당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테살로니키의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있던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에 있던 아치와 열주이다.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겠지만 꼭 방문해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앱스에서 테오토코스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었다.
천사들이 성모님과 아기 예수를 축복하고 있다.
하얀색으로 회칠한 부분이 전소되고 새로 지은 부분이다.
그 아랫부분에 정교하게 원형의 아치가 결합돼있는데 복원작업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복원작업이 1917년에서 1949년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는데 얼마나 신중하게 복원이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성 디미트리오스의 유해라고 한다.
많진 않지만 성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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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그리스 - 테살로니키: 로톤다, 성 판텔레이몬 성당, 아야 소피아 성당
얼마 전 유럽 입국시에 2주격리가 해제됐다고 한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 72시간내 PCR 테스트 영문 증명서를 준비하려면 하루가 걸리는 점,
그리고 귀국시에도 해외에서 PCR 테스트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국으로 격리없는 입국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틀의 시간이 깨진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갈지말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 하다.
갈레리우스 황제의 영묘로 조성됐다가 다신교 신전으로 쓰였던 로톤다를 볼 수 있었다.
고대 테살로니키의 도시계획은 이 곳 로톤다를 심장부로 계획됐다.
로톤다 왼편엔 이슬람 사원 당시의 뿔모양의 지붕이 제거된 미나렛이 남아있다.
아쉽지만 입장시간이 지나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테살로니키에서 하루가 아니라 이틀로 스케줄을 잡을걸 후회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아쉬움이 남는게 다시 방문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여행 추진력 하난 확실하니까 꼭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 거다.
반원형의 앱스엔 예수 승천이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제거되어 있는데 성당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됐을때 자주 일어나던 조치로 이슬람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교리에 근거한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있지만 그래도 꽤 많은 모자이크가 남아있다.
성 판텔레이몬 성당으로 정교회의 건축양식이 자리잡힌 이후에 지어진 성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같다.
돔이 올려져 있지만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친근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스만 제국 시대엔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어 '이샤키예 자미(Ishakiye Camii)'로 불렸는데 이사악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이 성당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성당들과 차이가 없다.
왼쪽에 사진이 짤렸지만 굴뚝같이 생긴 부분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을때 첨탑인 미나렛이 있던 기단이다.
내부는 보시는 바와 같이 성화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성당에서 몇 안되는 비잔티움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훼손이 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구 오스만제국령에서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성화 자체가 남아있지 않고 멸실된 사례가 많아 이 정도는 오히려 보존이 잘 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최소한 성화 인물들의 형태는 남아있으니 말이다.
아요스 아타나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이다.
성당 외부 모습에서 비잔티움적인 특징이 없어서 오스만 제국 때 지어진 성당인 것으로 추측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딱 봐서 정교회 성당인데 돔이 없고 규모가 작으며 교회 종탑이 빈약하게 서있다면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곳일 확률이 높다.
아야 소피아 성당 정문인데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었다가 다시 성당으로 원복됐을때 새로 지어진 문이다.
783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테살로니키를 대표하는 곳이다.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고대 로마시대 건물과 초기 기독교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492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카시미예 자미(Kasimiye Camii)라고 불리게 된다.
정교회 아이덴티티의 뿌리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에 각별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이전의 포스팅에도 언급했지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성당이라면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라테라노 대성당이 있겠지만
그리스를 대표하는 성당은 없다.
과거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었지만 오래 전에 그 곳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기 때문이다.
2019년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을때 항의시위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같은 날 그리스 전역에 있는 성당들이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을 애도하는 종소리를 울렸다.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의 사진이다.
위에 사진과 반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이다.
앱스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와 같이 테오토코스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11세기에 만들어졌는데 19세기 오스만 제국 시대에 아랍어 비문과 물감으로 덮여졌는데 이때 모자이크가 큰 손상을 입었고 1907년에 빗물로 재차 훼손되게 된다.
위쪽의 십자가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모자이크도 훼손된 부분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다만 보수한 부분이 비잔티움 시대에 만든 원본보다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성모님 얼굴 곳곳에 위화감과 부자연스러움이 보인다.
성당 종탑의 모습인데 하층부에 이슬람사원일때 새겨진 연꽃모양의 오지 아치가 남아있다.
기실 이 부분을 빼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을때의 흔적은 특별히 신경쓰고 관찰하지 않는 한 알아차리기 힘들다.
성당의 우측엔 미나렛도 있었는데 성당으로 원복되면서 철거되었다.
터키인들은 미나렛을 제거한 것에 대해 상당한 유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을때 종탑은 지붕모양이 현재와 달랐는데 이때 사용된 지붕은 성당 안뜰에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종탑에 있던 지붕이다.
이 안뜰때문에 테살로니키 대화재때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곳도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됐었기 때문에 훼손이 심하다.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가 비기독교 문명에 의해 훼손되지 않아 완벽한 보존상태를 자랑하고
이스탄불의 모자이크가 현재 남아있는 부분만 살린 느낌이라면 테살로니키의 성화들은 그 중간정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꼭 복원해야할 부분들은 모자이크를 채워넣지만 사라진 부분에 상상으로 모자이크를 복원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돔위에서 12사도들과 성모님, 천사들이 지상의 교회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을때 모습인데 훼손이 심각한 모습이다.
또한 이슬람 사원일 때 장식이 현재엔 전부 제거되고 지워졌음을 알 수 있다.
테살로니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은 구형은 아니고 이전의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아래엔 성모님과 천사들이 있고 양쪽에 12사도가 모자이크로 표현돼 있다.
천장의 그리스 비문은 사도행전 1장 11절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중략)"가 인용돼 있다.
돔의 모자이크를 보는 이들이 잠시 갈릴리 사람이 되는 셈이니 재미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이다.
판토크라토르가 아닌 예수 승천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 부분이 손상됐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복원을 거쳐 완벽한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테살로니키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전시돼있는 14세기에 만들어진 예수 그리스도 이콘으로 본래 이 곳 아야 소피아 대성당에 있던 것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8세기에 지어졌지만 이 곳에 있는 고대 그리스식 기둥들은 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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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그리스 - 테살로니키: 갈레리우스 궁전 유적, 갈레리우스 개선문
비잔티움 성벽의 기단을 피해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성벽의 원형복원과 개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갈레리우스 궁전의 일부였던 앱스형의 홀 유적이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유적들이 쇠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기서 더 무너지지 않게 치밀한 보존처리가 돼있다.
부분적으로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이는데 고대 유적에 대한 복원 사항을 다룬 베니스 헌장에 가장 충실한 복원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주요 사항으로는 가설에 근거한 재건은 피하고 개입은 최소화 할것, 유적의 틈새는 복원되야 함, 이전에 있었던 개입에 대해 비판적일 것 등이다.
지금 보시는 사진도 그냥 남아있는 부분을 대충 정비해놓은게 아니고 남아있는 부분이 더 풍화, 훼손되지 않게 같은 재료로 위쪽을 마감해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보존을 위해 같은 재료로 마감해놓은 부분은 추후 있을지도 모르는 복원을 위해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곳은 갈레리우스 궁전의 목욕탕이 있던 곳이다.
여긴 목욕탕의 응접실이 자리하던 지점이다.
원래 모습은 이러했다고 한다.
따뜻한 물 공급을 위해 아궁이에서 불을 떼서 파이프를 통해 벽과 바닥, 욕조를 데웠다고 한다.
나는 이런 복원도를 보면 주로 하는 상상이 4세기에 이 곳에서 목욕을 하던 사람이 현대로 와서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실망할지 아니면 이렇게나마 남아있는 것에 기뻐할지 궁금하다.
내 생각엔 그 당시에도 지진이나 화재가 빈번했으니 후자일 것 같다.
'구세주 성당'이란 이름을 가진 작은 성당이다.
도시에 있던 거의 모든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지만 이 성당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개조당하지 않았는데 이스탄불에 소재한 몽골의 성모마리아 성당처럼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 정도 예외로 봐준 것이다.
그리스 독립 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성당들은 모두 정교회 성당으로 원복되었다.
성당이 건축된 1350년은 부활한 동로마 제국이 빠르게 몰락하던 시기이다.
돔엔 예수 승천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세월로 인해 천사들의 형상이 희미해져 윤곽만 보일 뿐이다.
3세기 페르시아 사산제국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갈레리우스 개선문이다.
한때는 기둥만 8개로 지금보다 더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현재는 동문만이 남아있다.
원래 모습의 추정도이다.
좌우로 늘어서 있던 수 많은 열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고대에 지어진 성당을 구성하는 열주에 해답이 있다.
성당건축에 있어서 언제나 석재가 풍부한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의 이교도 신전이나 공공건물에 사용되던 기둥을 성당 건축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구 그리스 로마 세계의 성당에 있는 고대 그리스식 열주를 볼때면 그것이 특정 종교의 건축물이라기보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엔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처럼 그려졌지만 로마제국이 망할때까지 두 문화가 동시에 사랑받았다.
고대 그리스 신앙이 주류 종교는 더이상 아니었지만 천년 동안의 믿음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민간에선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마치 개신교나 천주교 신앙을 가진 한국인들도 오래된 불교 사찰을 방문하면 경건함을 느끼는 것같이 말이다.
3세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조가 풍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위에서 2번째 패널이 사산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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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 모양을 한 배가 바로 운영되고 있는데 칵테일을 마시면서 바다를 한바퀴 운항한다고 한다.
이런 배들이 테살로니키에 3척이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장기여행이라 금전적으로 이런데서 돈이 조금씩 소진되는게 부담도 되고 시간도 부족해서 과감히 패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상이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내 블로그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건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존재했던 그리스계 도시국가나 섬에 존재했던 문명의 역사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가장 사랑받는건 이 동상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활약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역사다. 여기저기 모래알처럼 분열돼있던 그리스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리스 지역과 동방 지역의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비록 돈과 시간이 한정돼있어서 가지 못했지만 다음 번 여행 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 도시인 그리스의 페라 지역을 꼭 가보고 싶다. 그리스가 많은 섬들, 영토가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영토 크기보다 실제 여행을 하는건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스 사람들은 죽기 전에 그리스 지역을 모두 여행하는게 꿈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관광객들에겐 '산토리니국'이라고 불려야 할 정도로 산토리니와 아테네에 편중돼 있지만 알아보면 알아볼 수록 저평가된 도시가 참 많다.
물론 모든 그리스 도시가 유적지가 채일정도로 많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대도시들도 경제성장기에 난개발이 심각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만으로도 한번쯤은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들이다. 비록 역사에서의 존재감보다 초라해서 실망할지라도 그것도 여행의 한 부분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배워가는게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화이트 타워라고 불리는 건축물로 그리스어로 레프코스 피르고스라고 불린다. 1535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축된 탑으로 같은 위치에 동로마제국시대인 12세기에 건축됐던 탑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 역사학자 프란츠 바빙거는 이 곳이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설계했다고 추측했다.
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부탁했더니 "No"라고 해서 "뭐지? 이 싸가지는..."하고
그 여성과 같이 온 일행인 다른 여자한테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고맙다고 하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니까 아르메니아에서 왔다고 했다.
얘기 끝내고 내 갈길을 가려고 하는데 아까 사진찍어주는걸 거부한 여자가 오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영어를 잘 못해서 내가 자기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뜻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경쓰지 말라고하고 자리를 떴다.
역사적인 사건으로나 접하던 아르메니아 인들과의 첫 조우라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닥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솔직하게 사과하는 모습에 근본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래 나는 전망대에 큰 흥미는 없어서 일본여행갈때 천수각 빼면 잘 안가는 편인데 화이트 타워는 꼭 한번 들러보고 싶었기에 티켓을 사서 들어갔다. 혹시 내가 잘 모를 거라고 염려했는지 입구에 있던 직원분이 이 곳은 도시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기념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럴땐 그냥 들어야지 예를 들어 서울에 온 미국 관광객이 가이드가 설명을 하는데 "네... 저 4대궁 다 알아요... 경희궁은 복원이 되면 좋을텐데 아쉬워요" 이러면 좀 웃기잖아? ㅎㅎㅎ
계단이 완만하게 지어져있어서 올라가는게 그리 힘들지 않다.
테살로니키에서 출토된 도자기가 전시돼있었다.
바닥재로 쓰이던 모자이크가 전시돼 있었다.
도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품들이 설치돼 있었는데 주로 오스만 제국 시대가 많았다.
그리스에서 오스만제국 시대의 역사에 대해선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는 이즈미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스미르나가 그리스인들에게 아직도 크나큰 향수로 남아있는 것처럼 셀라닉(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시대 이름) 이라는 이름만으로 많은 터키인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리스에 오기전 이스탄불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셀라닉으로 간다고할때 좋은 도시라고 하면서 그가 보였던 반응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약간의 상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서 일본식 가옥을 찾고 터키에서 비잔틴 제국의 흔적을 찾고 반대로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잔재를 찾는다.
이런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막상 방문을 했을땐 그 아우라가 어슴푸레하게 남아있을 뿐이어서 상상력과 주의력을 동원해야 겨우 알아차릴 만한 유적들이 많았다. 심지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고해도 말이다.
이 곳도 오스만 제국이 만든 건축물이지만 투르크인들이 떠났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대 피의탑이라고 불리던 서슬퍼런 분위기는 남아있지 않다.
탑의 최상층인데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어서 기념엽서를 2장 샀다.
이 중에 한 장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평소 잘가는 카페 사장님께 드렸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사실 제 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이 없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그건 내가 다른 나라의 교통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서 일 것이다. 나는 도시에 지하철이 없으면 비록 우리나라라도 왠만하면 걸어다니려고 한다. 이유는 실수로 버스를 탈때 방향을 반대로 타면 안타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ㅎㅎ
저 앞엔 망망대해로 펼쳐지는 것같이 보이지만 저기도 드넓은 에게해의 한쪽 귀퉁이일 뿐이다.
마케도니아 조선소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테살로니키는 고대 때부터 배를 만들던 도시라고 한다.
이 곳의 조선회사들은 큰 대기업보다 중소규모의 가족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국립 북부그리스 극장이다.
건물외관을 대리석으로 장식한게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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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티니에서 테살로니키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렸다.
3시간이면 꽤 먼거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유럽여행에서 했던 장거리 이동에 비하면 가까운 것이었다.
비잔틴 문화 애호가인 필자에게 가장 가볼만한 도시 3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스탄불, 라벤나, 테살로니키를 꼽고 싶다.
오늘 포스팅할 테살로니키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내내 쇠락한 적이 없는 역사적인 도시로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살로니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15곳의 초기 기독교 성당과 비잔티움 유적이 위치해있다.
이 곳이 동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의 제 2 도시로서 번영했던 이유는 바로 구 로마(로마)와 신 로마(콘스탄티노플) 중간에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과 마찬가지로 이 곳 테살로니키도 황제를 위한 궁전과 요새, 공회당, 성당, 도서관, 각종 편의시설 등 당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만들어졌다.
이 곳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목욕탕인 야후디 하맘이다.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 시대 제2의 도시로 '셀라닉(Selanik)'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큰 번영을 누렸다.
현재는 전시회 공간으로 비정기적으로 사용 중인데 도시에 남은 오스만 제국 시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홍보도 안하고 이런식으로 비정기적으로 운영할 경우 더더욱 알길이 없게된다.
나야 소수의 특이한 관광객이니까 인터넷을 찾아서도 가겠지만...
단편적인 인상으론 그리스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이런 곳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홍보까진 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규물지네(코모티니의 터키어 명칭), 데데아치(알렉산드로폴리스의 터키어 명칭)는 트라키아지역 역사에 딱히 관심이 없으면 터키 젊은 세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터키인들이 셀라닉이라는 도시에 갖는 향수는 어마어마하다.
가령 여행에서 만난 터키인들에게 테살로니키 이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셀라닉이라는 이름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함자 베이 자미'라는 이름이었던 옛 이슬람사원 이었던 곳이다.
그리스 독립 이후 극장으로 개조되어 '알카자'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468년에 지어진 것으로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고 있는 옛 비잔티움 성당들을 표기할때 현재 사원 이름을 쓰고 그 다음 원래 이름을 표기했는데 그리스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해서 현재 쓰이는 이름인 '알카자 테살로니키(함자 베이 자미)'라고 표기했다.
아쉽게도 복원공사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숙소를 언덕위에 있는 호스텔로 잡았는데 도시 중앙에서 빨리걸어서 30분이고 버스타기도 애매하고 은근히 빡세다.
이럴거면 그냥 짐이 무겁더라도 백팩메고 하나라도 저녁에 체크인을 할 걸 그랬다.
그래도 이런 것도 경험이니까....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오스만식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테살로니키엔 이런 분수대가 자주 보였다.
그중엔 지금도 분수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이 도시에 터키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수대위엔 아랍어로 장식된 동판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언덕 왼편에 성 테오도레스 성당이 보인다.
1990년에 지어진 성당인데 이탈리아의 성당들이 바실리카→비잔티움→로마네스크→르네상스 양식(고딕, 바로크, 고딕 양식 혼용)으로 발전했다면 그리스는 바실리카에서 비잔티움 양식으로의 발전은 이탈리아와 동일하지만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시대로 발전할때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게 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샤리아 법에 따라 새로 짓는 성당의 규모는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지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동네 강당 정도로 퇴보하는 양상으로 이뤄졌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그리스의 종교건축은 다른 양식으로 변화하기보다 그 동안 금지됐던 동로마제국 시절의 비잔티움 양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다만 현대에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대체됐고 성화의 표현에 있어서 헬레니즘적인 감정표현이 강화됐다. 하지만 이런 비잔티움 회귀 성향과 러시아에서 유행한 네오 비잔티움 스타일 건축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비잔티움 양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기존 구조에서 변화를 꽤해 돔을 극대화시키거나 바로크 양식, 신고전주의 등을 도입하는 특징이 있지만 그리스의 네오 비잔티움 양식은 기존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돔에 빨간색이 칠해진 것도 이 곳이 오스만 제국이나 터키가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만약 그랬다면 하맘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음식점으로 개조해서 사용 중인데 겨울엔 클럽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건물 내부 사진을 보면 하맘의 기본 구조는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 끝에 이슬람식 오지 아치가 있었다.
이런 형태가 오지 아치로 기독교식 건축물과는 구분된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태어난 집으로 대부분의 터키인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태어났을땐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1933년에 터키 공화국의 10주년을 기념하여 그리스 정부가 아타투르크 대통령에게 이 집을
선물했고 나중에 터키 영사관으로 소유권이 이전되게 된다.
터키 메르신 지방에 있는 타슈주라는 도시와 수도인 앙카라에 이 생가의 복제품이 있다.
생가로 들어서니 그리스인 직원과 터키인 직원 2명이 나를 맞아주었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직원분들이 놀라기도 한것 같은데 아주 친절하게 환영해주었다.
앞뜰에서 삼각대로 사진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박물관 구역 모든 곳에서 삼각대 촬영을 금지하여 사진은 찍지 못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사진이 전시돼있었다.
내부는 이렇게 전시실처럼 꾸며져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살았던 때처럼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다.
10년 정도 전엔 이 곳이 전시실이 아니라 박물관 전체가 가정집처럼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부 터키인들은 지금은 너무 박물관같다고 예전 모습을 그리워 하는 것 같다.
침실이 있던 1층 모형이다.
2층의 모형이다.
10대 시절의 아타투르크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타투르크의 모친은 아타투르크가 어린시절 이슬람 교육을 받길 원해서 이슬람 학교로 보냈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세속주의 성향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아타투르크의 모친인 주베이데 하님의 모습이 밀랍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주베이데는 이름이고 하님은 투르크 계열 유목민족 사이에서 지체높은 여성들을 호칭할때 사용되던 단어로
남성의 '칸'과 비슷한 명칭이다.
아타투르크의 금발벽안은 모친에게서 유전된 것이다.
밀랍으로 만든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형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밀랍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마치 살아있는듯 했다.
이 당시의 모습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1920년대 말~ 1930년대 초반)의 아타투르크 대통령을 표현한 것 같다.
테살로니키는 동로마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 말기엔 유대인, 투르크인에 이어 3번째 인구 비율로 떨어지게 된다. 이는 다른 지방으로부터 투르크인들의 이주와 더불어 기존의 그리스인 정교회 교도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테살로니키가 현재 그리스령이기 때문에 아타투르크가 그리스어를 구사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그리스어를 구사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단지 그리스어로 된 노래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당시 다민족 사회였던 셀라닉(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제국시대 공식명칭)에서 간단한 그리스어 정돈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는 정도다.
그리스인들 중에선 자신들과 전쟁을 한 지도자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리스에 대해 그가 한말을 옮겨본다.
"내가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이 5세기 동안 함께 형제처럼 살아온 테살로니키의 아들이자 루멜리아의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이 피를 흘렸던 전쟁에 참전한 것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불행히도 그걸 운명, 필연 아니면 역사라고 부르든지간에 나는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그리스인들과 더 많이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양측이 (그리스와 터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는데 실패한 것은 나에게 평생 가슴아픈 일입니다."
박물관엔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은 옷을 잘 입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니 옷뿐만이 아닌 당대에 유행했던 모든 문화에 능했다.
전시된 구두를 보면 요즘 유행하는 구두보다도 선이 날렵하고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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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래간만의 포스팅이다.
이 날은 카발라를 갈까하다가 알렉산드로폴리스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후자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역시 교육의 도시라 그런지 버스를 기다리는 대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 곳엔 동양인은 나혼자 있었는데 대학생들이라 그런지 무심한 눈빛보다는 외국인도 포용할 수 있는
우호적인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도시들이 외국인들에게 관광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지역박물관만해도 콜렉션의 깊이가 대단하다.
한마디로 괜히 그리스가 아니시다.
사실 나에게 돈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결정적으로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그리스를 자세히 여행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
버스로 내리자마자 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민속박물관이 문이 닫혀 있어서 방문하지 못했다.
오래 전에 의과대학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그렇겠지만 알렉산드로폴리스의 이름을 들었을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게
알렉산더대왕이었는데 사실은 그리스왕국의 국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1세의 방문을 기념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트라키아 민족 박물관으로 문은 여는 날이었지만 내가 갔을땐 10분넘게 문이 닫혀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곳으로 갈때 이 곳의 직원인 것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 박물관으로 원래는 고등학교였다고 한다.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이 곳의 소장품들은 평가가 좋다.
같은 색으로 채색된 건물이 성당 건물과 통일성을 갖게 한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정교회의 성호는 가톨릭과 반대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교회의 성호 긋는 방향을 몰랐고
가톨릭식으로 성호를 긋고 들어갔다.
성당으로 들어서니 천장의 펜던티브 돔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빛으로 인해 돔이 하늘에 떠있는 효과를 의도했다.
성당내부는 그리스 십자가 모양으로 디자인되었으며 비잔틴적인 요소는 다른 정교회 성당과 같다.
작지만 아름다운 영화관이었다.
이 영화관은 원래 담배창고로 문을 열었지만 1927년에 영화관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2012년에 문을 닫았었지만 리모델링을 거쳐서 다시 운영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광진구의 동부극장이 생각났다.
과거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최근에 서울극장이 올 8월을 마지막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서브컬쳐 관련 오프라인 매장이 모두 사라졌지만 지금은 영화같은 대중매체까지
잠식하고 있다.
1년전에 포터블 빔프로젝터를 샀지만 막상 가동시킨건 몇번 되지 않는다.
영화의 감동을 전해주기엔 역부족이고 극장에서 영화를 볼땐 이야기속에 몰입된 느낌이라면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볼땐 그냥 내 방이네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다가구 주택이다.
그리스 사람에게 이런 다가구 주택이 많은 것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건물을 지어대다간 땅이 남아있지 않을걸?
이라는 대답이었다😂
철길이 나있었는데 한적하고 좋았다.
세계 1차대전때 군사 기차역으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낙서가 있지만 100년이 넘은 건물치고는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철도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때는 지금은 사라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지선이 이 곳 알렉산드로폴리스를 지나갔다.
성 넥타리오스 성당이라는 곳인데 성당 앞 광장에 노인분들이 많이 있었다.
유럽에서 성당은 종교건물이지만 지역 커뮤니티 역할도 담당한다.
사실 그리스라고 노인들이 갈 곳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당에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시간보내고 이런 풍경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성당에 들어가려는데 신부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에 갈때마다 이런 친절함을 자주 경험했다.
대학 교양수업에서 알게되었던 단편적인 정보로 접한 정교회가 아닌 내가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고 그리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된 정교회는 차이가 정말 컸다.
천장의 판토크라토르 성화의 예수 그리스도는 감정이 나타나있지 않는데 이는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베드로 성인의 이콘이 있었다.
흔히 가톨릭교회는 베드로 성인이 상징이고 정교회는 안드레아 성인이 상징이지만
정교회에서도 흔히 베드로 성인의 이콘을 쉽게 볼 수 있다.
정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가 베드로 성인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진 않지만
초기 사도들중의 한명으로서 그 의미는 가볍지 않다고 한다.
동로마제국과 정교회를 상징하는 쌍독수리이다.
자주색 염료는 한때 황실의 일원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코노시스타스가 인상적이었다.
성유물로서의 이콘은 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라틴 문화권에선 종교 예술이 변화도 많았고 표현이 자유롭다.
하지만 비잔티움 예술은 엄격한 규칙을 통해 정립된 형식만을 표현한다.
가톨릭이 좋든 나쁘든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했다면 정교회는 전통을 고수했다.
그런 역사적인 근거로 나는 정교회가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다.
뭐하는 건물인지 정말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물이었다.
버려진 건물같아서 아무도 없을 줄알고 들어가봤다.
폐허 매니아다보니 이런 곳에 오면 항상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경을 하게 된다.
이 사진을 찍고난 직후 5명정도의 청소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롬인(흔히 집시라고 불림)들이었는데 적대적인 어조로 알수없는 언어로 이야기했다.
아마 자기들이 살고있는 곳이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는것 같았다.
상대는 여러명이니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될것같아서 웃으면서 끄덕끄덕하고
장소를 빠져나왔다.
이 쪽으로 쭉가면 비잔틴 요새 유적이 남아있다고해서 가보려했는데 가는 도중에 들개들이
짖으면서 달려들어서 크게 다칠것같아 다시 왔던길로 돌아왔다.
이때 황급히 길건너편으로 걸어가자 개가 쫓아오려고 했는데 다행히 트럭이 개 앞을
휙 지나가줘서 개도 쫄아서 몇 초를 허비하면서 꽤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보니 걸어서 갈 거리가 아니었고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구글링해서 퍼온 사진인데 이 곳이 원래 가려고 했던 아반타스 성채라는 곳으로
12세기 동로마제국 시대에 지어진 곳이다.
이 깃발은 마케도니아 지역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깃발에 있는 문양은 베르기나의 태양으로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을 상징한다.
내가 그리스를 방문했을 당시엔 북마케도니아 공화국(통칭 FYROM)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FYROM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역사가
도둑질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하다.
북마케도니아라는 이름으로 타협을 봤다지만 역시 이에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인들도 많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이름도 결국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면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인들이 발해라는 이름의 나라를 건국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나도 그리스 역사를 알기전에는 마케도니아하면 찬란한 역사를 지닌 대제국이 아닌
발칸반도에 붙어있는 소국을 연상했다.
부두에 정박중인 페리선을 볼 수 있었는데 에게해를 내해로 쓰는 그리스답게 수많은 노선을 운행한다.
1880년 프랑스 회사에의해 지어진 등대로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이 곳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는데 앞에서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있었는데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서 한국에서 왔다고하니 알렉산드로폴리스의 주민이라고 했다.
카페에 들어가서 그릭커피를 시켜서 마시는데 웨이터가 나에게 오더니
"저 사람들이 커피를 계산했다." 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웨이터의 손은 아까 카페 입구에서 이야기한 사람들을 가르키고 있었다.
예상치못한 호의에 그들의 테이블로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카페 입구에선 짤막하게 이야길 했지만 자세히 그 친구들의 직업이나 사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알게되어 너무 즐거웠고 이번 여행에서 보석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인스타그램을 교환했는데 꼭 다시 만나게 되길 소망한다.
Odos Basileos Alexandrou(알렉산더왕 거리)는 알렉산드로폴리스 행정의 중심지로 공공건물이
늘어서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신고전주의 건축물로 2014년에 새로 지어졌다.
색감도 아름답고 요소요소 반영된 그리스의 건축양식이 눈을 기쁘게 한다.
원래 자리에 있던 건축물로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이다.
새로 지은 건물은 이 건물이 연상되도록 지어졌다고하는데 그전엔 몰랐지만 이 사진을보니
상당히 닮아보인다.
위의 건물이 여러번 개조를 거친 모습이다.
한국에 있는 일본식 건물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아직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꽤 많지만
개조를 많이 거친 탓에 원래의 모습을 잃은 경우도 많다.
작은 성당이 보인다.
멀리서봐도 정교회 성당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은행의 알렉산드로폴리스 지점이다.
알렉산드로폴리스 우체국으로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갈매기가 사색에 빠진것같이 보인다.
사실은 내가 사색에 빠진 것인가!?
아쉽지만 알렉산드로폴리스 여행은 여기까지 끝을 맺게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달려 코모티니로 돌아오게 되었다.
코모티니에서 머물때 이 곳에서 간식거리, 생필품등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유럽은 대도시에서도 이정도 2층짜리 마트를 찾기도 쉽지 않다.
슈퍼마켓에 올리브유와 기타 식용유만 이렇게 많다.
크레타섬의 올리브유가 가장 품질이 좋다는데 한국에 수입되는 그리스 올리브유는 가격이 아주 비싸다.
글리코사의 포키가 유럽에선 미카도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미카도의 존재를 알게된건 이탈리아인 친구 밀레나에게 빼빼로 사진을 보여줬을때
그거 미카도 아니냐고 했을 때였다ㅋㅋㅋ
코모티니에서 마지막 날을 만끽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그리스 사람들이 트라키아를 여행하는 나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한국에서도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가 아닌 곳의 사찰 같은 곳에 외국인들이 방문할 때가
생각보다 많다. 그럴땐 부정적인 인상보다 의아함과 즐거움을 느끼는게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가끔 호기심이 많거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볼 것이고 말이다.
그리스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다.
밤이 되자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다.
새벽에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던 코모티니..
그런 코모티니에서의 시간도 저물어 간다.
다음날 일어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테살로니키에 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걸어갔다.
오른쪽에 있는 알파뱅크는 유로가 떨어지면 이 곳 ATM기에서 돈을 뽑아썼다.
알파뱅크를 지나면 오른쪽에 기로스 가게가 하나 있었다.
기로스 가게엔 영국에서 꽤 오래 살았다는 그래서 영어를 아주 잘하는
그리스 청년이 나를 반겨주었는데 나에게 몇마디의 그리스어 문장을 가르쳐주었다.
짧은 여행이지만 이렇게 작은 인연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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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한글로는 크산티(Xanthi)로 표현하는것 같지만 실제 발음은 산씨(띠와 씨의 중간)라고 부르는데
크산티로 표현하면 마치 내가 가지않은 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영 어색하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근처에 있는 이 곳을 발견했다.
담배창고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트라키아 지방의 담배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이 지역에서
생산된 담배는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3번째로 큰 농구장이다.
성 라파엘, 니콜라스, 이레네 성당(그리스어로는 라파일, 니콜라우, 이리니)이라는 곳이다.
멀리서보니 미쳐 다 지어지지않은 성당이 아우라가 굉장해서 찾아갔다.
원래 들어오면 안되는 것 같았는데 어떤 중년의 그리스 여성분이 들어가길래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서 성당을 둘러보고 있는데 정교회 신부님께서 오더니 짧은 영어로 친절하게 환영해줬다.
내가 구경하고 있을땐 신부님이 불편한 눈치를 주거나 빨리 나가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나중에 나갈때 보니 신부님이 대문을 잠궜는데 원랜 공사중이라 개방을 안하는 것 같다.
이런 경험은 그리스에 있는 다른 곳에서도 경험했는데 혼자서 지키는 소규모 전시관 같은 경우
내가 마지막 입장시간을 약간 넘겨서 들어왔을때 굳이 불편하게 안하고 살짝살짝 지켜보다가
관람을 다 마치고 나가면 잘가라고하고 문을 닫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식 친절이라는건가...
(물론 이건 예외적인 경우니 독자분들은 그리스를 여행할때 꼭 입장시간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린다.)
사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신부님들이 대부분 너무 친절했다.
이탈리아에선 관광지를 주로 다녀서 그런지 신부님들과는 이야기할 일이 없었는데
그리스에선 신부님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그리스의 성당도 속전속결로 짓지않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짓는다고 한다.
정교회 성당 앞엔 이렇게 그리스 국기와 정교회 깃발(원랜 동로마 제국의 깃발이었다.)이
걸려져 있다.
이것은 그리스가 오스만령이었을때 정교회가 사라진 비잔틴 제국 대신 구심점으로서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인데 그리스에서 정교회의 위치는 민족종교로서의 성격도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 남부에서 한번씩 볼수 있었던 양식인 것 같다.
건축물은 세월을 머금을수록 아름답다.
테라스가 보기좋게 꾸며져 있었다.
성 12사도 성당이라는 곳이다.
특이하게도 펜던티브 돔양식이 아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정교회 성당이다.
190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1954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포스팅을 하면서 느끼지만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은 대부분이 국내 웹사이트는 물론이고
위키피디아나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혹시 몰라서 여행중에 성당 이름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찍은게 도움이 되었다.
파사드의 모자이크는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왼쪽과 오른쪽엔
각각 베드로 성인과 사도 바울이 표현되어 있다.
성당에 들어가니 봉사하시는 아주머니가 반겨주셨다.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가면 신부님이나 직원분들이 반겨주는 경우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유의미하게 아주 많았다.
그것은 정교회가 우월하다는 의식이 아닌 진심으로 정교회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친절함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개신교회를 내가 근처에도 가지 않는 이유가 너무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너무들 쉽게 개종권유를 하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서울 아현동에 있는 정교회인 성니콜라스 대성당의 성화와
비슷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 성당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
사실 내 블로그에선 성당장식중에선 모자이크 작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도 중요한 요소이다.
모자이크와 마찬가지로 스테인드 글라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성서'라고
불릴 정도로 문맹이었던 사람들에게 성서를 대신해서 신앙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도 단순히 아름답고 멋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모자이크처럼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돼있다.
사진처럼 성모님이 입고있는 옷의 색깔인 파란색은 하늘, 희망, 성실, 경건을 상징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입고있는 옷색깔인 하얀색은 주로 신을 위해 표현하는 것으로
순결, 순수함을 의미한다.
'간구' 성화는 주로 모자이크에만 봤는데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건 처음이었다.
왼쪽에 있는 깃발이 정교회를 상징하는 쌍독수리 깃발이고 오른쪽이 그리스 국기이다.
사실 국기가 성당에 걸려있는게 일반적인 모습은 아닌데 이런 예외적인 특징이
나타난 이유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 통치하에 있을때 정교회를 구심점으로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했고 그리스의 독립에도 정교회가 일익을 담당했다.
쌍독수리 깃발은 후기 동로마 제국을 상징했던 쌍독수리 문양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당시 쌍독수리 문양이 깃발로 사용된 적은 없고 옷에 자수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곳은 '디모티키 아고라' 라는 곳으로 육류와 수산물, 과일 등을 파는 전통시장이다.
1935~4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았다고 하는데 도시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잃었다고 슬퍼하는듯 하다.
한국같은 경우는 보존을 위해서는 건물을 성격을 바꾸기도 하는데 여긴 건축물이
원래 용도로 사용되게끔 하려는 의식이 있는 것 같다.
건물 내부에도 흑백사진으로 시장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현대 건축물이지만 반복되는 아치의 모습이 인상깊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치 양식이 처음 도입된 곳은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된 로도스섬의 인도교라고 한다.
크산티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다.
성당의 디자인이 코모티니에 있는 성모희보 대성당을 연상하게 했다.
전통성과 현대의 기술이 만난 완벽한 디자인이고 더 빼고 더할 것도 없다.
그냥 그대로 이 자리에 있으면 충분한 아름다움을 준다.
돔양식은 기독교 건축에서 발견되는 최고의 성취가 아닐까?
판토크라토르는 그리스어로 만물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세계의 왕들처럼 왕관을 쓰거나 왕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돔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눈은 인간의 영혼을 직접 들여다 본다.
사전지식없이도 판토크라토르와 마주했을때 신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가톨릭의 성화는 본래 정교회랑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많은
발전이 있었다.
정교회 미술도 변화는 있었지만 급격한 변화보단 비잔틴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비잔틴 성화를 보다가 근세 서유럽 성화를 보면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곳은 크산티의 랜드마크인 시계탑으로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것이다.
1972년 크산티현청에 의해 철거될 뻔했다.
이유는 이 시계탑이 도시 한가운데에서 시민들에게 오스만제국 시대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 소수인종단체를 고려하여 시계탑은 보존하는 쪽으로 선회하되
시계탑에 붙어있던 대리석 초생달 장식과 아랍어 장식은 제거되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보다 더 험악하다.
지난 일들은 다 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기엔 과거의 끔찍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성 블라시우스 성당으로 1838년에 지어진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옛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진 저택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크산티도 다른 트라키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그리스 영토가 된 곳이다.
여기도 이렇게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다.
그리스도 한때 난개발이 심하게 이뤄졌지만 현재는 오래된 건물들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재개발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구의 2동, 객관적으로 봐서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푸근하고 정감이 갔던 그 동네가 지금은 구역 자체가 사라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
마치 전쟁에서 미사일을 투하해서 마을 하나가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에클레시아 아기오 게오르기우스 우리말론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이다.
1842년에 지어졌으며 이 성당을 보자마자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것임을 확신했는데
오스만 시대 말기까진 돔형 성당을 짓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교회 종탑에 다소 소심한
인상을 줄 정도로 작게 표현된 돔의 모습이 그 것이다.
오스만 제국 때 지어진 정교회 건축물들을 보면 외관이 최대한 교회스럽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정도로 종탑이 없으면 교회인지 그냥 집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관은 수수했지만 내부는 그래도 측랑도 있고 의자들도 세월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보통 돔이 있는 곳에 판토크라토르 성화가 있는데 이 곳은 돔은 없지만 천장에 판토크라토르 성화를
설치함으로서 돔의 부재를 보완하려 했다.
성당을 버티고 있는 코린토스 열주를 보면 정교회가 단순히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고
그리스 로마 문화의 타임캡슐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종교의 보수적인 면을 봤을때 돌을 던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보수성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과 그리스 로마 유산이 지켜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정교회를 온전히 지켜주던 모체가 사라졌을때 그리스 문화도 함께 잊혀져 갔다.
신부님이 크리스챤이냐고 물어서 가톨릭이라고 하니까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한때 원수였던 점, 그리고 대부분의 원인이 가톨릭왕국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상기하면 내가 머나먼 동아시아에서 오긴 했지만 그렇게 따뜻하게
환영해주신 것에 대해 존경심이 일었다.
또한 이 곳엔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와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는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메흐메트 파샤 빌딩이라는 곳인데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건물이다.
크산티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크산티하면 이 실루엣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터키식 가옥이 눈에 띄었다. 보존상태도 좋고 잘지은 집이다.
이 가옥은 현재 시립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나 전시가 비정기적이기 때문에 닫혀있을때가
많다고 한다.
이 곳은 크산티 민속역사 박물관이다.
원래는 담배를 취급하던 거상이었던 Vassilis Kougioumtzoglou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말기는 크산티가 도시로서 가장 번영하던 시기였다.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가보자.
트라키아 지역 전통 복장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전형적인 그리스 복장과 많이 다르다.
그리스하면 연상되면 헬레니즘적인 복장이 아닌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스도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지역별로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전통복식도 다 다르다.
다이닝룸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시대 그리스 부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오스만 제국 말기에 등장한 그리스인 거상들은 향후 그리스 독립에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박물관 내부는 정성스럽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호화로운 저택이지만 당시 모든 그리스인들이 이런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스만 제국 말기 법적으로 이교도 신민들의 처우가 다소 나아졌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개종하지 않고도 외교관, 상인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았던건
사실이지만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인 파이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유한 그리스인들은 한정적으로 존재했다.
그런 부유한 그리스인들의 삶을 이 저택에서 느낄 수 있다.
관람을 거의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리스인 할아버지가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해서
남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젊은 시절에 1960년대때 한국에서 해외자원봉사단체를 통해
한국에 계신적이 있었다고 한국 도시들의 지명을 이야기해주셨다.
할아버지도 일행이 있으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다.
언어의 차이로 인해 서로 생각하는 바를 전부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한국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시려는걸 느낄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헤어질때도 못내 아쉬웠다.
한국엽서나 조그마한 기념품이라도 있으면 드렸을텐데 아쉽게도 가지고 있는게 없었다 ;;
이때 교훈으로 여행을 할땐 한국 관련 기념품들을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1839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도시에서 오래된 성당 중 한 곳이다.
이 성당앞에 작은 광장이 있는데(사진에 일부가 보인다)
벤치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묻더니 한국이라고 하니까
북한 김정은 얘기를 하며 폭탄이 터지는 흉내를 입으로 내며 김정은을 조심하라고 했다ㅋㅋ
유쾌한 아저씨였다.
1934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이곳에는 원래 작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크산티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물음표가 인상적이었다.
이걸보니 꼭 뭔가 질문을 해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는데 아무말 대잔치같이 질문을
해보자면 서트리키아와 동트라키아는 달라?라는 것이다.
아마 원랜 같았으나 지금은 다르다는 대답이 어울릴 것이다.
갈라진 두 지역에 사는 민족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지역이 나눠져도 괜찮아?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이 세상의 지도엔 너무 많은 모순이 있으니
지금 현실에 순응하고 최대한 더 나쁜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곳에선 히잡쓴 사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곳이다.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코모티니로 다시 돌아왔다.
여긴 공원인데 숙소에서 이 곳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겨울만 아니었다면 앉아서 여유를 만끽했을텐데 아쉽다.
옷이 더러워져서 무인빨래방으로 왔는데 그리스어를 읽지못해서 세탁기 조작에 어려움을 겪다가
친절한 현지인 남성의 도움으로 세탁을 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또한 티비에 그리스팝 방송을 틀어놔서 몇곡을 스마트폰으로 인식해서 나중에 따로
찾아서 들어보았다.
숙소로 와서 스파르탄 맥주를 먹었는데 고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 부대의 공격처럼
시원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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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4~0205 그리스 - 코모티니: 성모희보 대성당, 비잔틴 요새
결국 몇일간 컨디션이 안좋더니 몸살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그리스 입국 첫날에 새벽에 돌아다닌게 탈이 난 것 같다.
몸에 열이 나고 기운이 빠져서 오전 시간은 제끼고 누워서 잠을 잤다.
오후엔 상태가 좀 나아져서 밖으로 나왔다.
비올레타가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가이드를 해줬다.
이 요새는 14세기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지어졌다.
20세기 초만해도 보존상태가 양호했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그리고 그리스 공화국 모두 책임이 있다고 한다.
십수년 전만해도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었는데 몇년전에 보수공사를 마친 상태라고 한다.
20세기초 비잔틴 성벽의 모습이다.
망루의 모습이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곳은 코모티니에서 유명한 카페로 오래된 신고전주의 건물을 복원했다고 한다.
내부도 아주 고풍스럽다.
트라키아 출신 그리스인 거상이었던 Nestor Tsanaklis가 후원하여 1907년에 설립된 학교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의 흉상이 있었다.
코모티니는 지역대학이 있기 때문에 교육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거리를 지나다닐 때에도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도시가 젊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된 담배창고라고 한다.
한때 코모티니는 담배관련산업으로 번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무리하지 않기로 해서 여기까지 보고 숙소로 들어가서 쉬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몸살기운에서 회복되서 일찌감치 숙소에서 나왔다.
이 곳은 코모티니 번화가로 새벽에 이 곳에서 버스가 하차한 곳이다.
그땐 새벽 6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은근히 가게에서 삼삼오오 모여있었는데
깜깜해서 아무도 없는 풍경보다 오히려 안심이 되고 좋았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위험해보이거나 시비거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너무 편안했다.
저 앞엔 그리스의 유명 카페 프랜차이즈인 '커피 아일랜드'가 보인다.
그리스에 갈때마다 꼭 들리는...
그리스 사람들은 더 좋은 곳을 많이 알고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일단 유명 프랜차이즈를
알아두면 어느정도의 맛은 충분히 보장된다.
유럽의 소도시들은 문을 일찍 닫는 가게들이 많은데 이 곳 코모티니는 새벽까지도 문을 여는 곳들이
많아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에 나와보면 다양한 업종의 가게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임대료가 비싸지면서 최소 150~200만원의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어렸을때 동네에 있었던 NBA카드를 팔던 가게가 생각난다.
서부 트라키아 지역은 흔히 산토리니로 대표되는 우리가 아는 풍광좋고 따뜻한 그리스와는
거리가 있다. 겨울날씨는 한국과 비슷할 정도다.
1608년에 건축된 Eski Mosque라는 곳으로 '옛 사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도시에 있는 Yeni Mosque(새 사원)보다 이후에 건축되었는데 저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 전에 존재했던 사원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Yeni Mosque라는 이름은 마치 정교회의 수많은 Ἁγία Σοφία(아야 소피아)처럼
아나톨리아에서 흔하게 사원에 붙는 이름이다.
1910년 불가리아 인들은 사원을 성당으로 바꾸고 미나렛을 파괴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미나렛은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왜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통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아에 있는
쉴레이마니에 자미나 술탄아흐멧 자미 같은 거대한 사원이 없는 걸까?
혹시 있었다가 파괴되었는지 조사해봤지만 그런 사원은 검색되지 않았다.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지역 중에 그리스 지역은 상대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코모티니에 사는 무슬림들에 대한 대우는 어떠냐고?
그리스의 무슬림 커뮤니티들은 자유롭게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이 곳은 유럽이고 다른 문화권에 비하면
소수자가 법적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에서 무슬림들을 공식적으로 '터키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꺼리고 있다.
무슬림들이 전부 터키인들은 아니거니와 이들이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이 곳은 트라키아 음악학교로 공연도 자주 열린다고 한다.
그리스 사람들 이미지는 산토리니에 있는 아름다운 단독주택에서만 살 것 같은 이미지인데
도시에서 사는 그리스 사람들은 아파트나 연립주택에 많이 산다.
왜냐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있고 인구는 몰려들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터키식 이슬람 사원이라 표기는 자미(Camii)라고 하고 싶지만 그리스에서 터키식 사원을
따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 정책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모스크로 표기했다.
이런 집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어서 내겐 용산의 오래된 집들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유럽에 대해 전혀 모를때는 유럽하면 다른 나라를 먼저 떠올렸는데 막상 가보고 생각이 바꼈다.
근세시대 넘치던 부로 분칠을 한다고해도 넘을 수 없는 찬란한 문명의 흔적이 그리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곳 그리스를 포함한 이탈리아, 터키에 매력을 느낀다.
남아있는 첨탑은 사원의 미나렛으로 쓰이던 것이다.
그리스에 남아있는 구 오스만 제국 이슬람 사원들의 첨탑을 보면 하나같이 고깔모양이
제거돼있는데 이게 어떤 원칙인지 궁금하다.
90년대에 한국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첨탑을 제거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가 독립하고 수백개의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뿌리깊은 미움에서 그랬을 것이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만 해도 패전한 일본인들이 돌아가고 나서 분노한 백성들이 일본신사나 절들에
대신 화풀이를 하지 않았는가?
그리스인들이 알아서 할일이지만 내 개인적인 바램으론 철거하는 것보단 보존해서
다른 용도로 썼으면 좋겠다.
비잔틴 성벽은 군데군데 끊겨있는데 원래 있었던 면적의 60%정도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뭔가 동아시아 전통건물 느낌이 났다.
작은 예배당이 있는 종탑이었다.
지난번 저녁에 찾았던 올드 마켓이다.
코모티니에 있는 모스크만 10개가 넘는다.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에서 로마자를 쓰지 않는 나라는 그리스가 처음이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물이라고 한다.
1967년에 건립되었다.
기념물에 장식된 검의 길이는 코모티니의 해발 높이와 일치한다고 한다.
성모희보 대성당이다.
산씨에 있는 아야 소피아 대성당과 디자인이 흡사하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새벽에 여기서 시간을 좀 때웠는데 벤치에 앉아있다가 얼어죽을 뻔한 곳이
이 곳이다.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정교회의 위대한 전통에 따라 지어진 성당이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성당이 뭐냐고 물어보면 성베드로 대성전이나
라테라노 성당을 이야기 할 것이고 프랑스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노틀담 대성당을 이야기 할것이다.
그리스인에게 물어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있는데 그리스를 대표하는 성당이 어디인지에 대해
물어보면 다 다른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 밖에 있는 곳을 이야기하기도 한다.(예: 하기아 소피아)
즉 지역을 대표하는 성당은 있어도 그리스 전체를 대표하는 성당은 없다.
대신 그리스의 많은 성당들이 하기아 소피아와 전성기 비잔틴 성당들이 가졌을 화려함을
재현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사실 가수들의 베스트앨범이 의도적으로 히트곡이 한두개씩 빠져있듯이 비잔틴 문화도
한군데만 가서는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초기 비잔틴 문화를 보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를 가야되고
콘스탄티노플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는 터키의 이스탄불로 가야되고
전례와 온전한 형태로의 복원을 보기 위해선 그리스로 가야한다.
따지자면야 시리아에도 있고 불가리아에도 있겠지만 대략적으론 세 지역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면 비잔틴 퍼즐이 맞춰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당의 입구에 Deesis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었다.
현대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들은 이처럼 입구에 모자이크가 장식된 경우가 많고
성당내부는 주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성모님
세례 요한
성당내부는 외부에서와 같이 비잔틴 스타일이었다.
양쪽의 측랑과 후진, 돔구조까지 완벽한 비잔틴 스타일이다.
비록 현대에 지어진 성당이지만 이 완벽한 디자인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성당의 바닥은 천국의 완전성에 대응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고급 대리석이나 목재로 바닥을 장식한다.
이런 특징은 보편교회와 정통교회 두 군데서 모두 발견된다.
사진의 원형 샹들리에는 정교회에서 '호로스(Horos)'라고 불린다.
정교회에서 흔들리는 호로스는 신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교회의 특징은 첨탑대신 돔을 건축한다는 것이다.
원랜 정교회와 가톨릭 둘 다 돔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로 정교회 건축의
특징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도시에 하나씩은 볼 수 있는 큰 성당 정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온전한 판토크라토르 성화를 보고 경외심을 느꼈다.
내 존재는 한없이 작은 존재로 느껴졌다.
대성당앞에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간혹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라는데 지나가다 찍어봤다.
1884년 오스만제국 술탄 압뒬 하미트 시대에 지어진 시계탑이다.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오스만 제국 근대화 시기에 지어졌다.
새로운 사원이라는 뜻의 Yeni Mosque로 1600년을 전후해서 건축되었다.
코모티니에 위치한 모스크 중에선 가장 오스만 제국의 느낌이 난다.
사원의 내부는 아나톨리아 이즈닉에서 제작된 타일들로 장식되었다.
무슬림 이야길 더 해볼까 한다.
그리스와 터키간 인구교환때 그리스 땅에서 터키 땅으로 이동한 무슬림들은
터키인뿐만 아니고 그리스인 무슬림도 포함되었다.
사실 모호함 투성이었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 사람들은 수많은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어를 하는 터키인 무슬림, 터키어를 하는 그리스 정교회교도, 극히 소수였지만
그리스어를 하는 터키인 정교도 까지...
이들 모두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자신들의 존재 그대로 양국가에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슬람을 믿는 그리스인 무슬림들이 터키와 그리스 중에 어느 편에 써서 싸웠을지를
생각하면 이 시대를 간단히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혼자 돌아다니다가 출출해서 사람들이 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기로스를 주문했는데
다 그리스어로 되있어서 내가 이해를 잘 못하니까 점원분이 영어로 설명을 해줬다.
그리스도 참 친절한 나라다....
첫날에 갔던 카페에 다시 가서 그리스 커피를 즐겼다.
여긴 가게 규모도 아담한데 동네 아재들이 들르는 정겨운 곳이다.
번화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니 많은 빈집들이 보였다.
도시의 분위기는 우중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보이는 아름다운 날씨가
이 곳이 그리스임을 일깨워 준다.
이 곳은 버려진 집들이 꽤 눈에 띄었는데 이런 집을 고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현실적으론 말도 안되는 망상이지만...
이 집은 아마 철거할 것 같아 보인다.
다소 관리가 잘 안돼보였지만 아름다운 집이다.
불가리아도 이 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데 비잔틴 유적이 어느정도 남아있다고 한다.
나중에 터키에 갔을때 불가리아도 가보려고 했지만 다시 지옥의 버스여행이 될 것 같아
그냥 비행기타고 아테네에 박물관 투어를 하러 갔었다.
비올레타와 Sultan Tepe라는 터키 음식점에서 케밥을 먹었는데 터키에서 먹던거랑
별로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가격은 당연히 터키보다 비쌌다.
요거트 먹어봤는데 우리나라랑 달리 단맛이 적었다.
그리스에 왔으니 그리스 맥주를 샀다.
알파라는 이름의 밀맥주인데 부드럽고 맛있었다.
맥주로는 그리스가 아시아에선 유명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맥주도 잘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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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정도 자다가 일어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1달간 겨울에 밖에 싸돌아 다니고 무박버스여행도 여러번 했으니 탈이 날만도 했다.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생각이 복잡하다.
근데 이번여행에서 하루도 쉬지않고 달려왔으니 이제 좀 쉬는 것도 좋겠다.
한국사람들보면 여행도 일하는것 처럼 한다고 하지 않나..
사실 일정을 널널하게 잡은게 다행이다.
만약 여기서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이나 이탈리아 콜로세움같이 시간이 정해진
입장권을 예약했다면 어쩔수없이 봐야했기에 힘든 여행이 됐을 것이다.
숙소는 Orpheus Hotel이라는 곳에 묵었다.
간만에 호텔에서 묵게되서 편하게 잘 지냈던 것 같다.
직원들도 내가 들어올 때마다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리스 친구인 비올레타를 만나 카페로 갔다.
그릭커피 한잔을 마시니 몸이 좀 풀리는 듯했다.
숙소로 가서 다시 잠들었다.
전날에 일찍 잠이 들어서 그런지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그리스의 명물 프레도 에스프레소를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사장님이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동계올림픽이야기를 했다.
나는 외국여행을 오면 굳이 상대방이 물어보지 않아도 항상 내가 한국인임을 어필하는 편이다.
이런 비관광도시에 올때는 로컬주민들이 나를 보면 약간 놀라는 사람도 보인다.
그게 싫어서 보는 시선은 아니고 그야말로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시선이다.
가게가 마음에 들어서 몇번 방문했는데 2번째 방문할때 카페 사장님이 바로 알아봤다.
하긴 동양인은 여기 나 하나 뿐이니 기억하지 쉽지 하하!
빵도 주문해서 먹어봤는데 괜찮았다.
터키에서 보던 아이란이 여기에서도 있었다.
아이란은 요거트+물+소금의 혼합물이다.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는 이처럼 돔부분이 루프타일로 덮혀있었다.
모스크도 비슷하게 루프타일로 덮혀있었는데 터키에 있는 종교건물들은
돔이 매끈하게 금속으로 마감되 있었는데 이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독립 이후에 그리스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들을 보면 비잔틴 양식을 계승한
성당들이 많이 보인다.
반면에 오스만 제국 시대 이스탄불에 지어진 현존하는 정교회 성당들은
탄지마트 개혁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비잔틴적인 특징을 배제하거나
건물사이에 숨어있어서 저게 성당인지도 모르게 생긴 경우도 꽤 있다.
이는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는 정교회 성당 본당에 돔을 건축하는게
1839년 탄지마트 개혁까지 금지됐었기 때문이다.
개혁 이후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비잔틴적인
특징들이 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부분에선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돔의 마감이 다르다는
특징들로 인해 두 국가가 다른 국가라는걸 실감할 수 있다.
코모티니는 14세기 동로마 제국 시대에 코무치나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인근에 있던 모시노폴리스에서 이주한 그리스인들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다고 한다.
1361년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한 코무치나는 소아시아에서 많은 터키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외에 포마크인(불가리아 무슬림), 유대인, 롬인(집시)들까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코모우치나는 터키어인 '규뮬지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20년 로잔조약체결 전까지 도시의 무슬림 인구가 정교회 인구보다 많은 도시였다.
인구교환때도 서트라키아 지역의 터키인들은 교환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에 도시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터키 양국간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상당수는 아나톨리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지금도 코모티니의 무슬림 인구는 도시의 전체인구 중에서 10%정도나 된다.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이 이스탄불 포그롬으로 대거 그리스로 이주한 것에 비하면
조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엔 위의 사진처럼 모스크도 꽤 남아있고(아마도 사라진 모스크도 있겠지만!)
터키 은행인 할크은행지점도 찾아볼 수 있고 터키음식점도 찾기 어렵지 않다.
숙소 근처에 있던 우체국이다.
그리스 공화국이 신생국가임에도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띈다.
도시가 국가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이다.
서울은 궁궐을 제외하면 전쟁과 재개발로 여러번 갈아엎었기 때문에 오래된 도시라는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동네를 좀 둘러보다가 다시 숙소로 가서 쉬었다.
이틀동안 거의 쉬었기 때문에 한게 별로 없어서 분량이 너무 짧기 때문에
나중에 알게된 코모티니 명소를 소개해볼까 한다.
코모티니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져있는 곳에 있는 비잔틴(동로마) 시대에 지어진
모시노폴리스 유적으로 일반인들의 입장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모시노폴리스는 역사에 4세기부터 등장하는데 13세기에 불가리아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초기 기독교 성당이라고 하는데 유적을 둘러싼 농지아래엔 다른 유적들도
묻혀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성당유적을 보존하고 홍보하는데 드는 비용이 30억원정도 된다고 한다.
숭례문 복원하는 비용보다 거의 9분의 1 비용이다.
비올레타가 저녁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서 코모니티 중심지역을 구경시켜줬다.
여긴 코모티니의 명소중 하나인 올드마켓이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많은 가게들이 닫혀있었다.
인테리어가 멋있는 바였는데 여기서 우조를 한잔했다.
투명한 우조 원액에 물을 타면 저렇게 우유색깔로 바뀐다.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지 술이 센건지 먹으니 졸립고 헤롱헤롱했다.
일단 숙소로 가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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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1 터키 - 이스탄불: 부콜레온 궁전, 예레바탄 사르니지,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일찌 일어나서 우선 부콜레온 궁전 유적, 예레바탄 사르니지 등을 둘러보고 탁심으로 가서
자난을 만나기로 했다.
큐축 아야소피아 사원이다. 영어로 리틀 하기아 소피아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한때 정교회 성당이었던 이 곳은 하기아 소피아를 지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에 의해 536년에 건축된 곳이다.
비잔틴 초기 팔각형의 돔은 아직 원형돔으로 발전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자이크나 성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기둥이나 석조부조는 남아있다.
2014년에 큐축 아야소피아 사원을 방문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 성하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께선 개조된 사원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 많은 종교가 화합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바르톨로메오 1세의 말씀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는데 내 종교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는데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슬람 사원이지만 그리스어로 장식된 부조는 지금도 남아있다.
처음 이스탄불에 가면 대체로 하기아 소피아와 술탄아흐멧 자미를 둘러보고 좀더 시간이 있으면
예레바탄 사르니지,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등을 둘러본다.
좀더 시간이 있으면 이처럼 비잔틴 시대 성당에서 개조된 사원을 둘러보면서 원래 구조에서 무엇이
남았는지 찾아보는 과정이 역사의 보물찾기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시간이 있다면 오스만 제국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덜 알려진 자미들을 둘러보면
이스탄불을 좀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나도 아직 이스탄불을 잘 모른다.
자난은 나보단 이스탄불을 훨씬 잘 알지만 역시 아직 가보지 못한 유적지가 많다고 한다.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콜레온 궁전이다.
부콜레온 궁전은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도 꽤 보존이 잘 되있었는데 특히 중앙 파사드부분은
150년 전까지도 건재했다.
그러나 1850년~1870년 사이에 기차 선로를 만들면서 궁전의 일부가 파괴됐고
도굴꾼들에 의해 석조 장식들이 도난당해 지금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자신들의 문화인 모스크(모스크로 개조된 구 비잔틴 교회포함), 궁전, 기타 기념물과 달리
선주민들이 세운 유적(고대 그리스, 비잔틴)들이 가치가 있다는 인식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발굴단이 유적을 뜯어가든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고대 이집트 유산에 대해 자신들의 문화라는 인식도 없었기 때문에 쿨하게 외국에 마음껏 팔아넘겼고
어떤때는 타국에 고대 이집트 사원 하나를 통째로 선물로 주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고대 유적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거나 훼손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알짜배기는 독일에 빼앗겨서 반쪽짜리 유적이 된 베르가마(페르가몬) 유적이고
파르테논 대리석군이 없는 아테네의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다.
서유럽은 이미 고대 유적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터키 공화국은 예전보다 고대 문화유산 보존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터키정부는 이 곳을 야외 박물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리석 표면이 청소되고 풍화 및 마모된 부분은 보수작업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철로건설로 나머지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은 훼손된 파사드만 겨우 남아있다.
부콜레온 궁전의 원래 모습을 표현한 다른 일러스트다.
1850년에 촬영된 부콜레온 궁전 파사드의 모습인데 의외로 중앙 파사드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양쪽에 있는 사자상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이관되어 보존중이다.
궁전에서 떨어져나온 석조부조들이 모여있었다.
몇년전부터 철제펜스가 설치됐지만 예전엔 그냥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후기 동로마 제국이 블라헤르네 궁전을 사용하면서 부콜레온 궁전은 그대로 방치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메흐메트 2세가 이 곳에 왔을때 궁전은 거미줄로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같은 폐허상태는 아니었고 그냥 버려진 상태정도로 추정된다.
황제의 문 측면에 있는 아치가 위태롭게 남아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제1 건축물 하면 하기아 소피아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만 그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궁전 유적이 남아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치상태를 약간 벗어난 수준이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제국의 두 번째 수도에
남아있는 유의미한 궁전 유적이라는 것이 지금도 역사적 가치는 충분한 곳이다.
팍스 로마나라는 명칭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제국의 신민들은 로마인이라는 보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제국도 정복과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이 약해지면서 서양은 더한 정복과 폭력의 시대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유럽역사에서 이민족에 대한 대량학살과 잔인한 통치는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오스만 제국도 결국 신민들을 하나로 묶는데 실패하고
몰락하면서 로마라는 보편제국은 결국 역사에 후계를 남기지 못했다.
바로 위에 올린 황제의 문의 원래 모습이다.
원래 궁전 앞에는 바다가 있었는데 매립되서 지금은 도로가 나있다.
창문의 대리석 프레임이 건재하게 서있다.
기둥이 위태롭게 상층부를 떠받치고 있다.
이 곳은 궁전의 망루였던 곳이다.
궁전의 석벽은 모르타르로 채워진 내부를 석회암 벽돌이 감싸고 있는 구조다.
예전에는 테라스 였을 곳들이 지금은 저렇게 구멍만 남아있다.
구글링으로 가져온 사진으로 원래는 궁전의 작은 예배당이 있었던 곳이다.
원랜 버려진 상태였고 쓰레기 더미에 방치된 곳이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관리는 되는 듯 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오래된 가옥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도 위치는 그닥 좋지않기 때문에 출퇴근시간에 공항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숙박을 말리고 싶다 ;;
Duvares 카페 레스토랑 왼편에 있는 건물이 동로마 제국 대궁전의 일부이다.
궁전의 내부분은 남아있지 않고 아주 극히 일부만 저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원랜 위에 부콜레온 궁전처럼 심하게 풍화가 된 상태였지만 보수작업을 거쳐 말끔한 상태이다.
현존하는 부분은 본래 대궁전의 램프타워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원래 모습으로 지금의 술탄아흐멧 사원과 그 일대가
대궁전 권역이었다.
때문에 술탄아흐멧 사원 아래에 유구가 묻혀있을텐데 모스크이기 때문에 발굴작업이
불가하다고 한다.
먼 미래엔 사원을 훼손하지 않고도 유구를 조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아주 오래된 하맘(터키식 목욕탕)이 남아있었다.
1482년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그랜드 비지어였던 이샥 파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지금은 폐허상태로 남아있는데 소유주가 600만 달러에 건물을 내놨는데 팔리지 않아
원래 가격의 절반인 300만 달러에 내놨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건축된 예레바탄 사르니지에 도착했다.
연대기로 치면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영어로는 바실리카 시스턴이라고 불리지만 가급적 현지 명칭을 부르는게 내 원칙이라
예레바탄 사르니지(지하 저수조라는 뜻)로 표기했다.
이 곳은 예레바탄 사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지하궁전'이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단순히 저수시설을 넘어 로마시대 궁전이 지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도 그럴것이 옛 신전에서 쓰이던 기둥과 건축부재들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탑은 한 때 저수조의 일부로 기능했다고 한다.
화질이 좋지 않은 이유는 삼각대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장할때 직원이 삼각대를 검사해서 퇴장할때까지 보관한다.
이 곳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여러번 배경으로 등장한 곳인데 최근엔 영화 인페르노로
유명해진 곳이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에서도 등장한다.
일부 기둥은 휘어져있었는데 좀 불안해 보였다.
기둥의 부조를 보면 저수조로 쓰이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지하궁전이라는 이 곳의 또 하나의 별명이 과장이 아니다.
현재의 예레바탄 사르니지는 관람을 위해 물의 수위를 낮게 조절한 상태인데
예전엔 인간의 머리높이넘게 물이 차올랐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건 역시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점이다.
워낙 잘만든 인프라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계속 보수공사를 해서 사용했다.
아쉽게도 이 곳도 위기에 놓인 건축물인데 오스만 제국 때부터 터키 공화국까지
4번의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석조기둥들의 균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더 이상 기둥만으로 저수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위에 사진처럼 금속막대로
기둥과 기둥사이에서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속막대가 작년 말 조사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서 현재 복원작업이 시급하다고 한다.
기둥끝에 메두사 머리가 있었다.
머리가 거꾸로 되어있는 이유는 정면으로 메두사를 보면 돌로 굳어버린다는 이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장 독특한 분위기의 여행지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만 역술인들이 기가 강하다고 이야기하는 장소에 부합할 만한 곳이다.
특유의 마술적인 분위기에 상당히 압도될만하다.
베식타쉬 경기장인 보다폰 파크인데 바다앞에 있어서 스타디움으로 쓰기에 최고의 입지였다.
자난을 만나서 터키 군사박물관에 왔다.
터키의 역사는 전쟁없이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터키 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제 1군 사령부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한 돌마바흐체 궁전을 디자인한 가라벳 발얀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다.
1841년에 지어졌으니 이 건물 자체도 역사인 셈이다.
다르다넬레스 전투에서 주포가 고장나자 Seyit Çabuk이라는 군인이 275kg의 포탄을 직접 옮겼다는
일화를 재현한 것이다.
재미있는건 전투가 끝나고 같은 상황을 재현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들어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Seyit Çabuk 상병은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들어올리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많은 추락사고로 인해 과부제조기로 알려진 F-104이다.
1071년에 셀주크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있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전으로 동로마 제국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는 것이 터키측의 평가이고
생각보다 사상자 피해가 적었다는게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다.
반대로 레판토 해전이 오스만 제국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게 서유럽의 평가였지만
실제론 오스만 제국은 별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역사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니....
나 개인적으론 아나톨리아 중부를 상실한게 단순한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선 그리스+아나톨리아(전통적인 아나톨리아 영역)+크레타섬 3곳은 무조건 사수해야하는데
일단 그리스는 경제력과 수확하기에 최적의 조건이고(단점은 이리저리 흩어져있어서 각개격파 당하기 좋음)
아나톨리아는 그야말로 본진이고 크레타는 에게해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나톨리아 중부를 털린건 나중에 수복을 했다하더라도 해프닝으로 치부할 일은 아닌 것이다.
가운데 있는 생도가 무스타파 케말이다.
이땐 아타투르크라는 이름을 쓰기 전인데 이땐 무스타파(아랍식) 케말(터키식 아랍이름)이라는
이름을 썼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나선 자신의 이름을 K.Ataturk라고 표기하는데 세속주의자로서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거북선 모형이 있었는데 터키의 26대 참모총장이었던 일케르 바쉬부그가 기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참전용사가 기증한 훈장이라고 한다.
제일 아래 가운데 있는 메달은 한국전쟁 터키군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때
감사의 선물로 받은 기념메달이라고 한다.
나머지 전시품은 한국전쟁때 터키군에서 군법무관을 했던 세이피 에르크멘씨가 기증한
군번줄, 팔찌, 태극기 등이다.
한국전쟁때 터키군의 군복이다.
터키병사들은 총알이 떨어지면 총검술로 싸웠다는데 차낙칼레(갈리폴리) 전투에 기록된
오스만 제국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다.
이분들이 목숨걸고 싸웠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은 사실 상투적이지만
사실임에 틀림없다.
이 여행에서 에미노누 근처에 있던 마트에서 계산을 할때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좋아하던
점원이 생각난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6.25 전쟁이 당시 참전국가들의 현 세대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터키사람들은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파병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당시 한반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발발과정과 터키군이 참전한 주요 전투를 다루고 있었다.
군우리 전투, 금양장리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의 설명이 전시되고 있었다.
한국전쟁때 사용됐던 터키군의 깃발이다.
한국에 파병된 터키 군인들을 위해 학생들이 피로 지장을 찍어만든 깃발이라고 한다.
'아일라'로 알려진 한국전쟁때 전쟁고아였던 김은자씨와 터키 병사들이 찍은 사진이다.
한가지 오해를 바로잡을까 하는데 한국전쟁때 터키군이 대부분 쿠르드족으로 구성됐었다는
루머가 정설인것 같이 여겨지고 있는데 당시 터키군의 대부분은 앙카라와 서부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희박한 이야기이다.
당시 터키의 쿠르드족 인구비율로 따져보면 15%정도가 될 것이다.
루머의 소스도 쿠르드인 참전용사에게서만 나온 것이라서 근거가 부족하다.
키프로스 전쟁 중에 그리스계 민병대에게서 노획된 군기라고 한다.
현대 키프로스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1960년에 키프로스는 대략 그리스계 인구 78% 터키계 인구 18%로 영국에게서 독립했지만
그리스계 인구가 터키계 인구를 일방적으로 배제, 차별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민족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운동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리스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그리스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Enosis 운동을 지지했고
터키의 지원을 받는 터키계 키프로스 인들이 키프로스의 분단을 주장하는 Taksim 운동을 지지했다.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터키군이 직접 키프로스에 상륙해서 영토의 37%를 장악하고 9년뒤 분리독립을 선언했고 40여년이 흘러 지금에 이른다.
현재 상황은 그리스계가 이끄는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3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통일에 소극적인 상태이다.
터키계가 이끄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은 터키 이외에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제금수조치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탈피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대체로 여론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24%가 통일에 찬성하고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65%가
통일에 찬성한다.
통일 논의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에서는 2국가체제를 원하고 있는데
이는 섬의 영구적인 분할을 의미한다.
남키프로스 입장에서는 1/4밖에 안되는 북키프로스 인구가 영토의 37%를 차지하는것에
불만이 많고 분리독립 이후에 북키프로스 지역으로 이주한 아나톨리아 터키인과
팔레스타인 등에서 이주한 아랍인들에 대해 키프로스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양쪽이 납득할만한 재조정이 없는한 2국가 체제는 힘들어 보인다.
(남키프로스에선 분단 이전의 터키계 키프로스인과 그 자손들에 대해서만 키프로스인으로 인정한다.)
북키프로스 입장에선 40%에 가까운 땅이 비록 무력침공이지만 아버지 세대의 피값으로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포기할리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키프로스를 국가로 인정할 경우 탄압받는 소수민족은 얼마든지 무장투쟁을 통하여
분리독립을 해도 좋다는 안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을 얘기해보면 그리스계의 쿠데타 시도는 잘못되었고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물론 터키계도 나중에 그리스계를 살해한게 사실이지만 처음엔 그리스계가 가해자의 위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터키군의 쿠데타 진압은 진압으로 끝냈어야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이유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섬의 미래를 위해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
이 깃발은 그리스 독립전쟁때도 쓰였던 깃발인데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병대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전시실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유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이끌던 터키 공화국은 세계에서 손꼽힐정도로 법과 제도가 앞서간 국가였다.
지금의 터키는 중우정치로 전락한듯하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터키군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모형이 있었다.
한국 전쟁기념관이 기증한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냥 모형일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터키인들이 한국에 이런 기념비가 있는지 모를텐데
우리의 존중을 잘 알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100년의 터키와 한국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최근 터키가 반미노선으로 갈아타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터키 경제제재가 있었다.
현재 터키에선 반미정서가 상당한데 미국이 세속주의 터키를 '온건 이슬람' 국가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영향력이 약했던 터키에 대해 굳이 종교를 강화해서 온건 이슬람 국가로 가공하고 싶어했다.
우선 세속주의자들 입장에선 미국이 온건 이슬람 국가로 터키를 변화시키려고 하는게 세속주의에 대한
파괴로 받아들였는데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절대 온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슬람주의자들 입장에선 미국의 계획이 이슬람주의자들을 길들이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저 이슬람이 있을뿐 온건 이슬람이란 것은 없다고 언급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미국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온건 이슬람'을 표방하는 페툴라흐 귤렌(이하 FETO) 세력을
지원하는 실책으로 이어졌다.(실제론 귤렌 세력은 전혀 온건 이슬람이 아니라는게 세속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FETO 세력은 터키의 군, 경찰조직내에서 세속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터키와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언젠가는 한국도 몇년전 이란의 경우처럼 선택을 강요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런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난이 예전에 자주갔다는 Tıkıntı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다.
포르투갈식 치킨이라는 뜻인 Portekiz Usulü Piliç을 먹었는데 역시 너무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이랑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잔했는데 일이 있어 자난은 먼저 가고
나는 좀 더 시간을 때우다가 밖으로 나왔다.
몇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터키라는 나라와 정이 들은것 같다.
내가 이 곳 베식타쉬를 좋아하는게 도시가 젊은 느낌이 들고 이름도 베식타쉬할때
공기가 새는 느낌이 세련되게 느껴지고 좋았다.
그리고 몇일전 자난과 베식타쉬의 골목을 지날때 카페 웨이터가 한국사람맞냐고 하면서
한국사람들이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떠나기전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부조를 보기위해 술탄아흐멧 광장에 들렀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궁정을 묘사한 부조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서 그런지 부조에 새겨진 로마인들의 모습이 서글퍼보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승전을 기념한 부조이다.
아래쪽 쐐기자국은 오벨리스크를 옮길때 생긴 흔적이다.
부조를 보면 신기한 것이 한쪽은 라틴어로 돼있고 한쪽은 이렇게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제국의 공식언어로서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둘 다 사용됐던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돌로만 쌓은 성들을 보면 몇십년 관리안하면 우수수 무너져버리는데 몰타르로 만든 로마의 건축물은
천재지변과 변덕스러운 기후 앞에서도 천년이 넘게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술탄아흐멧 광장은 여기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숙소로 가서 매니저인 라마잔씨랑 작별의 인사를 했는데
한국과 터키는 매우 특별한 관계라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지 아니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고 물어보길래
Selanik(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제국 시대 이름)으로 간다고 했더니 좋은 곳에 간다고 나를 부러워했다.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시대 제2의 도시로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터키인들에게는 많은 향수가 어린 곳이다.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때 돌아온 사람들이 거의 테살로니키나 크레타 출신이 많다.
사실 어떤 터키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면 아직도 영토수복을 꿈꾸는줄 알고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어떤 그리스인들은 터키사람들이 테살로니키를 셀라닉이라고 부르면
아직도 오스만제국인줄 아냐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베야지트 사원으로 아쉽게도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화질이 좋지 않다.
1년뒤 베야지트 사원에 방문했을땐 복원중이라 입장이 불가하고 작은 기도실에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 곳도 나와 인연이 없나보다 ㅠ
이때 트램을 타고 악사라이 역으로 가려고했는데 퇴근시간이라 전동차가 만차라 배낭을 메고
도저히 탈수가 없었다.
시간이 그래도 넉넉해서 포기하고 베야지트 사원에서 악사라이 역까지 걸어갔는데
출퇴근 시간에 술탄아흐멧에서 공항이나 터미널로 가는 분들은 일찍 나오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1783년에 건축된 라렐리 사원이다.
이 모스크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서유럽의 문화가 오스만 제국으로 조금씩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보다 훨씬 서양의 기술을 먼저 받아들인 오스만 제국도 결국 무너졌는데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는게 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 사원의 유지를 위해 상인들을 위한 캐러밴도 같이 건설했다고 한다.
버스터미널로 가야할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매순간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ㅋㅋ
이 곳은 후기 오스만제국때 지어진 사원으로 이슬람사원으로서는 드물게
고딕양식을 도입한 곳이다.
무라트 파샤 자미로 1471년에 완성된 이슬람 사원이다.
이 사원의 건축을 의뢰한 하스 무라드 파샤는 본래 동로마 제국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의 아들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 함락후에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가 황위를
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이 곳을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자난은 일주일동안 일도 못하고 나를 가이드 해주려고 연차를 내서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서 참 좋지만 한가지 아쉬운게 자난이랑 닭갈비를 못먹은 것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한국인 레스토랑을 가봤지만 닭갈비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꼭 닭갈비를 같이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버스터미널인 오토가르로 가서 그리스 코모티니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이스탄불에서 코모티니까진 7시간 정도가 걸렸고 가격은 280리라였다.
혹시 몰라서 미리 예매했다.
위의 사진은 중간에 들렀던 휴게소인데 작고 아담했다.
육로로 유럽에 입국했던 것은 처음인데 우선 터키에서 출국할때 탑승객의 여권을
버스 승무원이 전부 걷었다가 나중에 돌려준다.
터키에서 출국할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리스에 입국심사할때 분위기가 정말 가관이었다.
웃긴게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모든 탑승객이 바깥에서 일렬로 늘어서서 출입국 심사를 받았는데
부스를 통과해서 심사를 받는것이 아니고 심사관이 한명한명 취조하듯이 여러가질 물어봤다.
나에게는 호텔바우처를 보여달라고하는데 하필 후불로 내는 곳이라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몰아세우면서 주소가 어디냐고 쏘아붙여서 다운받아둔 예약 확인번호를 보여주고 필요하면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했다.
그외에 제일 태클이 많이 걸린 사람들이 동유럽에서 온 걸로 보이는 젊은 여자 3명이었는데
입국심사관은 그 여성들을 거의 성매매취업하러 온 윤락녀 취급을 했다.
그만큼 불법이민자 문제가 심각하다는건 알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렇게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하고 다시 터키에 재방문해서 그리스에 갈때는 일부러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로 왔다갔다하니 시비도 안걸더만....
아무튼 그리스 코모티니에 도착하니 시간이 5시정도가 됐다.
호텔에 체크인 시간이 되려면 멀어서 일단 짐부터 맡겼다.
사실 잠도 제대로 못자서 그냥 로비 쇼파에서 잠을 청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새벽에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력이 최악인게 이때 무리를 해서 그 다음날 몸살에 걸리게 된다😓
그리스 코모니티에 있던 무슨 공원에 왔는데 겨울이라 분수대는 당연히 작동하지 않았다.
번화가로 갔더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편안했다.
추워서 카페에 갔더니 다 영업이 끝났다고 해서 이번엔 근처에 있던 성당으로 갔는데
체력이 고갈된 상태라 잠깐이라도 앉아있었으면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처럼 성당에서
죽을뻔했다.
2시간정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이번엔 기차역으로 가봤다.
기차역을 서성거리는데 역무원인지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그리스어로 이야길하는데
당연히 나는 하나도 못알아들었다.
그랬더니 더 열심히 그리스어로 이야길 하는 것이었다 ;;;;;;;
아마 내가 예매를 하려는줄 잘못 알고 도와주려고 하시는것 같았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역에서 찍은 사진인데 시간도 다 바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올려본다.
코모티니에서 테살로니키까지 대략 5시간 좀 넘게 걸리는듯한데 버스가 나은것 같다.
기진맥진해서 9시정도에 호텔로 돌아갔는데 프론트 직원이 친절하게도 체크인을 시켜주겠다고했다.
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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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터키 - 이스탄불: 뷔위카다
이렇게 아침에 하기아 소피아를 볼 수 있다는게 지금 생각하면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이 건축물의 규모가 이 곳이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현대 터키의 이스탄불 서쪽과 동트라키아 지방은 지역적으론 유럽에 속해있지만
터키민족이 아시아에서 왔다는 점과 종교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유럽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다.
이스탄불에는 이렇게 동로마 시대 지어진 유적들이 수도없이 많다.
특별한 보존작업이 없음에도 이런 잔해가 남아있다는 것이 대단할 뿐이다.
에미노누에서 배를 타기 전에 시미트를 샀다.
아침에 막 만든 시미트가 더 맛있는 것 같다.
이스탄불이 바다로 나뉘어져있다보니 있다보니 그로인해 도시가 어느 도시보다도
입체적으로 다가오는것 같다.
페리는 헤이벨리아다 섬을 지나쳐갔다.
헤이벨리아다섬은 정교회 계열인 할키 신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할키 신학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신학교였지만 1971년에 터키 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회의장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할키 신학교를 다시 열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미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터키에게 미국의 요구가 오히려 역효과가 되는건 아닌가 싶다.
미국이 역으로 할키 신학교를 영원히 폐쇄할 것을 에르도안에게 강력하게 요청하면 어떨까?ㅋㅋ
헤이벨리아다섬을 지나서 뷔위카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은 고대 그리스 시대엔 왕자를 뜻하는 Prinkipos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엔 권력에서 밀려난 황족들의 유배지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자동차가 없는 섬으로도 유명한데 마차랑 자전거만이 교통수단으로 이용가능하다.
뷔위카다섬을 일정에 포함한건 자난의 결정이었는데 처음엔 생소했는데 여행하고나선
자난의 선택이 옳았다는걸 깨달았다🙂
1908년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이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1858년에 지어진 아르메니아 가톨릭 성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은 무기한 폐쇄상태인 상황이다.
자난이 이야기하길 지금도 섬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빈 건물들은 매물로 올라와서 나중에 리모델링해서 개발할
사업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보건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런 저택들은 프랑스에서 본 양식과 비슷한 점이 보인다.
오스만제국의 근대화때 프랑스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독일식 저택도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곳은 그리스인 부자였던 키르바코 하코풀로스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1층부터 3층까지 23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키르바코 하코풀로스가 터키를 떠난뒤 호텔로 사용되다가 1927년부터 관공서로 사용중이다.
Con Paşa Köşkü(John Pasha Pavilion)이라고 불리는 이 목조저택은 1880년에 지어졌으며
베네치아 출신인 이탈리아인 존 파샤(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가 소유했던 건물이다.
존 파샤의 사망 후엔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살았지만 1차대전때 소식이 끊긴뒤
그리스인 건축가인 Achilles Politsis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뷔윅카다섬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저택 중 하나다.
오스만 제국 시대말기 부자들의 삶은 당시 유럽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로인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시기였다.
이 근처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해와서 살던 집의 폐허가 남아있는데 아쉽게도
당시엔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 곳이 트로츠키가 살던 저택으로 지금은 잔해만 남아있다.
스탈린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트로츠키는 이 곳에서 1929년부터 4년간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터키 공화국이 트로츠키의 망명을 받아주는 조건은 소련이 암살시도를 하지않을것을 요구했고
트로츠키에게는 터키 국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이 뷔위카다섬으로 갈수있는 교통수단은 페리뿐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웹서핑을 통해 레온 트로츠키가 뷔위카다 섬에서의 망명생활 당시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트로츠키는 망명지로 터키를 원하지 않았고 터키 문화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고
아타투르크의 반공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 알려진 바로는 트로츠키는 뷔위카다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항상 보안을 유지하고
저택내의 가구배치를 정기적으로 바꾸는등 꽤나 긴장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안 좋은 생활만은 아니었는지 가끔 그리스인 어부랑 낚시를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것 같았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중병에 걸린 트로츠키를 치료하려 의사가 왕진을 와서 청진기를
꺼내려는데 이를 의심한 트로츠키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 생각은 트로츠키에게 경호인력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제 2인자였던 사람이
저런 무례한 행동까지 했을 것 같진 않다.
어쨌든 뷔윅카다에서 체류하던 당시의 트로츠키는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 이 뷔윅카다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념적 공백상태인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연속혁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너무 어렵다.
뷔위카다 섬에서 가장 큰 저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장식때문에 목조저택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인다.
오르한 파묵이 왜 그리 옛 이스탄불의 목조저택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간다.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낀건데 자동차가 없으니까 공기가 너무 맑았다.
지나가는데 젖소가 들판에 누워있길래 가까이 가봤다.
별로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는듯 했다 하하!
963년 동로마제국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는데 악명높은 4차 십자군에 소속된
라틴 해적들에 의해 파괴됐고 오스만 제국 시대인 1751년에 재건됐는데
현재 남아있는 종탑이 그때 지어진 것이다.
종탑옆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은 1884년에 지어졌고 예배당 건물은 1905년에 지어졌다.
성당에 터키 국기가 걸려있는게 인상깊었다.
마치 이 성당이 외세에 의해 지어진 성당이 아니며 터키의 일부로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여기도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고 노출이 심한 복장은 금지되어 있다.
자난이 성당직원한테 정교회냐고 물어봤다.
성당 앞에 있는 나무에 끈을 묶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끈을 묶진 않았다.
이미 유럽온거 자체로 나는 소원을 이뤘다구 ㅎㅎㅎ
성당내부는 촬영금지여서 대신 사진을 퍼왔다.
사실 터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이 사진촬영을 금지하는건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역사적으로 증오의 타겟이 된 적이 있다보니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 같다.
왜냐면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도 오래된 성화가 많은데 플래쉬만 터뜨리지
않으면 딱히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4월 23일 성 조지의 날에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성당에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이 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해서 무슬림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렇지만 터키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당들이 많이 있다.
다만 터키의 경우는 무슬림이 주류인 국가이기 때문에 잊혀진 성당들이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이 있던 건물이다.
성당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자난과 터키쉬 커피를 한잔했다.
이 커피는 터키에선 터키쉬 커피라고 불리고 그리스에선 그릭커피,
키프로스에선 씨프리옷 커피라고 불린다.
주의해야 할게 터키 커피숍에서 그릭커피를 달라고 하거나 그리스에 있는 커피숍에서
터키쉬커피를 달라고하는건 금기시된다.
예전에 국내 여행 블로그 글을 읽는데 남키프로스에 있는 카페에서 터키쉬 커피를 달라고하자
카페주인이 '우리에게 터키쉬커피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나 씨프리옷 커피라고 할때까지
주문을 안받아줬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기억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세데프 섬을 볼 수 있었다.
여기도 비어있었는데 참 잘 지은 건물이다.
저택의 파사드 부분이 그리스 신전처럼 생겨서 발걸음을 멈췄던 건물이다.
무려 저택의 입구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저택의 첫번째 소유주는 알레포에서 온 Yorgi Sabuncakis라고 한다.
설계도 아테네 대학 건축 교수인 Fotiadis가 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엔 아주 화려했을 것같은 집이다.
뷔위카다섬에선 마차와 자전거가 주요이동수단이다.
오래된 집들이 아름답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있었다.
군산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래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칠을 하지 못한 외벽의 모습도 그런대로 좋아보인다.
방문은 하지 않았지만 소개하고 싶은 건물이 있어 올려본다.
바로 뷔윅카다에 있는 버려진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프랑스인 건축가 Alexandre Vallaury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날씬한 실루엣의 오스만-터키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1898년에 지어졌을땐 호텔과 카지노로 사용할 계획이었는데 오스만 제국 압뒬 하미트 2세가
도덕성 타락을 이유로 이를 무산시켰고 건물은 부유한 그리스인에게 팔렸고 이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기부했다고 한다.
1903년에 고아원 개관식에는 황제 압뒬 하미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요아힘 3세가 참석했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의 쉼터가 된 이 건물은 난방을 위해 러시아인들이 건물의 목재 외벽을
떼어서 땔감으로 쓰면서 건물의 손상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전쟁동안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현재는 이렇게 버려진 상태다.
복원을 위해서는 4천만 유로(현재환율로 한화 537억원)가 든다고 한다.
이게 어느정도 돈이냐면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운영했을 때 1년 입장수입의
반 정도 되는 금액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은 위험한 상태에 놓인 7대 세계유산에도 뽑혔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85년부터 관리인이 있는데 허가를 받은후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건물에서 5미터이상 떨어져있어야 한다.
1999년 이스탄불 지진으로 건물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바람으로부터 이 건물을 막아줄 지붕도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상태다...
100년전 이 섬의 고아들이 보호를 받아야했던 것처럼 이 건물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관리인의 말을 전하면 이 곳에서 자랐다는 그리스에서 온 노인이 와서 관리인과 내부를
둘러본뒤 "왜 우리집이 이렇게 됐나요?"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찍은 사진인데 9시 방향에 있는 건물이 바로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바다 건너편엔 이스탄불 아시아 지구가 보이는데 아마 저쪽엔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겠지만 여기 뷔위카다는 모든게 느리고 평화롭다.
섬을 떠나기 전에 발릭에크멕을 먹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게 너무 좋았다.
자난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은 다시 집으로 가고 나는 유럽지구로 돌아갔다.
시간은 한정돼있는데 가보지 못한 곳은 너무 많기에 나는 이 날 밤도 돌아다니기로 했다.
보드럼 사원으로 본래는 10세기에 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진 곳이다.
나에게 의미가 남다른 곳인데 나중에 이 곳에 다시 왔을때 사원의 젊은 이맘인 모하메드씨가
나를 환대해줬던 곳이다.
다만 이때는 아직 그를 몰랐을 때였다.
몰라 페나리 이사 사원으로 원래는 10세기에 지어진 정교회 수녀원과 성당이었다.
사원 명칭 중에 '이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정교회 성당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지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이 곳과 나는 인연이 없는지 이때 방문했을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두 번째 방문했을때는 복원작업 때문인지 아예 문이 닫혀있었다.
1550년에 만들어졌다는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을 발견했다.
사실 술탄아흐멧에 있는 하맘은 너무 비싼데 이 곳은 관광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저렴할 것 같다.
이 곳에 대한 소문이 몇가지가 있는데 바로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미마르 시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있다.
이땐 하맘을 체험하기 전이었는데 나중에 카파도키아에서 하맘을 즐길 수 있었다.
이 하맘이 만들어질 당시 서유럽에선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인 이유때문에
목욕을 기피했는데 동로마인들과 오스만인들은 계속해서 목욕을 했다.
터키의 국기를 보면 Red 보단 Crimson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것 같다.
마르마라 대학건물이다.
가끔 악몽을 꾸는데 대표적인 악몽이 대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그 악몽엔 18학점을 들어야한다 20학점을 들어야 한다 이런 말이 나와서
날 괴롭게 한다.
당시 집에서 먼 학교를 다녀서 지각을 했을때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수업을 포기하고
PC방으로 가거나 도서관으로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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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나 혼자 파티흐구를 돌아보다가 우스크다르에서 자난과 만나기로 했다.
이 날 여행은 이른 아침부터 자정까지 엄청난 활동량을 보였던 날로 기억한다.
1분 1초도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가려고 했던 일정, 그 숨가쁜 일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볼까 한다.
베야지트 트램역 근처에 있던 케밥가게에서 Döner 케밥을 사서 먹었다.
뭐가 한국어로 표준인진 모르겠다만 한국 매체에선 Döner를 '되네르'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발음인줄알고 터키에서 '되네르'라고 하니까 대부분 못알아 들었다.
'도나르'라고 해야된다.
아무튼 한국에도 도나르 케밥을 파는 곳이 많이 있지만 저 뻣뻣하고 질긴 특유의 빵은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터키에 다녀온 뒤로 저런 빵을 무척 좋아하게됐다.
11세기에 완성된 성당으로 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복되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붙여진 성당이다.
이후 13세기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에 의해 재수복 된후 프로토스트라토르였던
미카엘 두카스 글라바스 타르차나이오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수되게 된다.
그가 사망한뒤엔 미망인인 마리아가 수녀가 되면서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성당의 소예배당을 추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성 사도 성당에 이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성당으로 1456년부터 1587년까지
사용된 곳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성당의 역사는 성사도 성당→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 성당
→성 요르고스 성당 순이다)
1587년 성당은 오스만제국의 황제 무라드3세의 아제르바이잔 정복을 기념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게 되는데 이때 '페티예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꼈다.
즉 현재의 이름인 페티예 박물관이라는 명칭이 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이스탄불에서 하기아 소피아, 코라 수도원 다음으로 비잔틴 모자이크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기실 건물의 많은 부분이 개조되고 추가됐지만 후기 비잔틴 건축양식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본관은 이슬람사원으로 쓰이고 있고 부속 예배당만이 박물관으로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페티예 박물관 앞에는 버려진 동로마 시대 기둥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곳이 천년동안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그냥 동네 공원에
로마시대 돌기둥이 나뒹굴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인류가 고대 유적에 관심을 가진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에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나르텍스엔 아무것도 없는 벽만이 노출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으론 인류를 축복하고 있고 오른손으론 성서를 들고 있다.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스어 비문은 수녀 마르타가 그녀의 남편을 기리기 위해 이 예배당을
구원의 서약으로 바친다고 쓰여있다.
계몽자 성 그레고리오다.
아르메니아가 세계에서 첫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한 성인이다.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관계가 극도로 안 좋아진 상황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성모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을 청하는 간구 모자이크.
대천사 미카엘의 모자이크이다.
이렇게 훼손된 모자이크를 보면 언제 저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천사 우리엘의 모자이크이다.
구원을 청하는 세례요한.
대천사 라파엘
얼굴이 너무 선하게 디자인 되었다.
자난이 저 선모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축복을 뜻하는
표시라고 한다.
성 카리톤의 눈이 파여져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
루넷에 남아있는 이 모자이크는 페티예 박물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서 장면이다.
예수 그리스도 왼쪽은 세례 요한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둘기는 성령을 표현했다.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세례당에도 이와 비슷한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 아래 위치한 프리즈는 상감 기법으로 장식돼있다.
페티예 박물관에도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인물들은 구약의 예언자로 12시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사야, 모세, 예레미야, 스바니야, 미카, 요엘, 즈카르야, 오바드야, 하바쿡, 요나, 말라키, 에제키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밑에 예언자들은 하늘과 땅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른손으로는 인류를 축복하고 있다.
왼쪽은 성 사바, 오른쪽은 성 요한 클리마쿠스이다.
예전에 쓰여졌을 기둥들이 무심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 지어진 미나렛이다.
퍼온 사진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보다시피 많이 개조되었고
사원으로서도 미술적 측면에선 특별하지 않은 것 같다.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들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 성당처럼 작은 돔으로 지어진 동로마 후기 건축물에선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페네르 지역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인들이 모여살았던 곳이다.
오스만 제국 말기 이스탄불 인구 중에서 20%가 그리스인이었다.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때도 이스탄불은 교환 지역에서 면제됐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그리스인들이 대거 이스탄불을 떠나게 된 사건이 1955년에 일어난 이스탄불 폭동이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아타투르크의 생가가 폭파되었다는 가짜뉴스때문에 촉발된 폭동은
그리스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으로 번지고 말았다.
(물론 부가적으로 키프로스의 터키인 학살사건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시에서 이교도들을 벌하자는 외침이 골목골목마다 울려퍼졌다.
그리스인들이 평생을 일궈온 집과 점포들, 교회들, 묘지들이 파괴됐다.
사실 당시 세속주의 터키에서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집단증오에 선동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도 만보산 사건같은 반 중국인 폭동을 겪었기 때문에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탄불 폭동과 만보산 사건의 기록사진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스탄불 폭동을 끝으로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멸종된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100년 뒤에 페네르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예전에 홋카이도를 여행했을때 하코다테에 있는 북방민족 자료관의 전시사진 속에 있던
아이누족의 사진처럼 저들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이 텅비어있는 목조주택을 보니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옛 이스탄불의 모습이 연상된다.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정겹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을 봤다.
골목 한복판에서 고양이가 누워있는데 그 곳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운전자가 이를 보고
다시 후진을 해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었다.
광경이 너무 재밌어서 자난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Çeşmesi라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에 공공수도로 설치됐다고 한다.
현대에 와선 집집마다 수도가 공급되기 때문에 그냥 모뉴먼트로만 남아있는 곳이 많다.
관광지에 있는 Çeşmesi같은 경우 역사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나오게끔 해놓은 곳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터키와의 친선으로 서울 어린이대공원역 근처에 있는 공원에
터키식 수도가 있으니 구경해봐도 좋을 것 같다.
이스탄불엔 이런 동로마 시대 폐허들이 길가다가도 자주 보인다.
이런 유적 하나하나가 굉장히 유서깊은 역사의 흔적이지만 이런 유적을 완벽하게 보존 관리하는
프로젝트는 국가 하나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울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만 해도 포로 로마노를 둘러싼 고대 로마 유적들은 잘 보존했지만 콜로세움 건너편에
있는 목욕탕 유적은 발굴만 하고 일단은 펜스쳐놓고 보류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페네르 정교회 신학교이다.
페네르 정교회 신학교의 역사는 14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렇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듬해이다.
이 신학교를 졸업한 그리스인들중에선 오스만제국의 장관까지 역임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터키역사도 프로파간다 영향이 강해서 어느정도 걸러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인들이 나중에 오스만 제국에서 고위직에 임명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연봉의
실권없는 직책에 많이 등용됐다.
현존하는 학교건물은 1881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스 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스탄불 폭동 이후로 많은 학생이 떠나고 현재는 학생이
50여명만 남아있다.
어쩌면 지금 이 포스팅을 할때는 더 줄어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에 6명의 신입생이 등록했다고 한다.
페네르 지역은 그리스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번화가보다 보수적이고 아랍인들에 가까운 옷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라거나 폭력적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니
불필요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벽에 One Way Islam이라는 낙서가 적혀있었다.
가슴 한켠이 답답해졌다.
1281년에 지어진 곳으로 '몽골의 성모마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정교회 성당이다.
동로마 황제 미카엘 8세의 서녀였던 마리아 팔레올로기나가 정략결혼한 일칸국의 아바카 칸이
사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설립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동로마 제국시대부터 한번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적이 없는 성당이다.
그마저도 메흐메트2세가 이 성당의 보호를 약속하는 칙서가 있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유일하게 개조되지 않은 정교회 성당이 동로마시대에 지어진 성당 중에 가장 작은
성당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교회 조직이 세월의 풍랑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곳도 이스탄불 폭동때 내부가 파괴되는 참화를 겪었다.
아쉽게도 시간상 방문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사실 내부는 옛 느낌이 별로 없다.)
성당의 정문이다.
성당 앞에 차가 세워져있었는데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강경에 꽤 크고 오래된 일본식 창고 건물이 있는데 두 번 갈때 전부 차들이 창고를 가로막고
있어서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오스만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터키 프로파간다에선 제국의 일원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았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고
2등 신민으로서 쉴레이만같은 성군치세엔 그럭저럭 잘 지내기도 했지만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킬때는 가혹한 처분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때 그리스인들의 반란이 100번정도 된다고 알려졌으니 이들에 대한
대응은 상당히 변덕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건축양식이 신고전주의 양식이라 나중에 찾아봤는데 그리스인 초등학교였다.
성 요르고스 대성당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 성당이다.
오래전에 자난과 했던 약속이 유적지 명칭을 표기할 때 비잔틴 시대 유적이라고 해도
현재 사용되는 터키식 이름을 먼저 붙이고 그리스식 명칭을 병기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터키인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이 건축물들을 잘 보존했으면 하는 바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가를 쓰고 내 여행을 도와주었던 자난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이 곳만큼은 현존하는 건물이니 만큼 예외적으로 그리스식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항상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하기아 소피아에서의 퇴거로부터 3번째 쫓겨간 곳이 이 곳이다.
이 곳은 1600년에 지어졌지만 몇번의 화재를 거듭해 지금 남아있는 성당은 19세기 중반에
재건된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신 고전주의로 지어져 비잔틴 양식과 연속성을 찾아볼 수 없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하기아 소피아에 비하면 작은 성당인데 이는 당시 이슬람의
딤미법에 근거해서 기독교 건물이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짓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도 안드레아가 만든 정교회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고
세계 정교회 신자 3억인의 영적 고향이다.
나는 가톨릭이지만 오래 전 동서교회 분열의 역사를 알고 나선 정교회가 가톨릭보다
조금도 못할것이 없고 상호동등한 정통교회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성당에 입장할때 입구에서 보안검사를 받아야하는데 이 곳은 90년대까지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됐던 곳이고 지금도 테러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카톨릭에서 바티칸과 같은 곳. 하지만 그 규모는 너무나도 작고 수수하다.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경건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멀리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신 바오톨로메오스 1세를 볼 수 있었다.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런건 아니지만 일부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바로 그리스 독립전쟁 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반란으로 정의하고 규탄했기
때문인데 당연히 총대주교는 도시에 남아있는 그리스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사제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벽 중간에 있는 페디먼트는 예전 성당에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불가리아 성당으로 강철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겨우겨우 버스를 타서 에미노누로 돌아왔다.
이제 페리를 타고 우스크다르로 갈 것이다.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려면 꽤 비싼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이 곳은 운송수단으로 쓰이고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뱃놀이를 할 수 있다.
안에서 터키쉬 커피를 파니 커피 한잔을 하면서 마르마라해를 즐겨보자.
건너편에 어제 방문한 돌마바흐체 궁전이 보였다.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시대의 전설을 지닌 크즈 쿨레시(처녀의 탑)다.
현존하는 탑은 오스만 제국 시대인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
탑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스크다르에 도착해서 자난을 만났다.
자난이 루트를 다 알려주긴했지만 그래도 실수없이 도착했다는 것에 스스로 너무 대견했다.
위의 사진은 미리마 술탄 사원으로 슐레이만 1세의 딸인 미리마 술탄이 후원해서 지어진 곳이다.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작품으로 그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건축물만 300여개가 된다고 한다.
속설에는 미마르 시난이 미리마 술탄에 대한 사랑을 이 모스크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게 흔한 야사인지 정말 사실이었는진 알 수 없지만 이 모스크는 미리마 술탄을 고려한듯
유려한 디자인으로 표현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원의 차양막과 본 건물의 조화가 마치 치마를 입은 여성이 연상된다고들 한다.
배를 타고 우스크다르에 도착했다.
우스크다르는 6.25 전쟁 당시 터키군이 불러서 유명해진 [Üsküdar'a Gider İken]라는
노래제목에 나오는 지명이다.
사원에 들어가려는데 히잡을 쓰고 있는 한 여성이 누가 신발을 훔쳐갈 수 있으니
잘 챙기라고 이야기했다.(자난이 통역해줌)
히잡을 쓴 여성들을 외국에서 봤을 때 보수적이고 대화라도 하면 큰일날 것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 친절하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터키가 아닌 다른 무슬림이 주류 인구인 나라에서 모스크에 들어갈 때 나에대한 불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터키에서는 가장 편안한 곳이 모스크였다.
걸어가다 힘들면 넓은 모스크에서 앉아서 쉬어도 나같은 이교도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오스만 제국 전역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다.
시난도, 미리마 술탄의 어머니인 휴렘 술탄도, 미리마 술탄의 남편이었던 뤼스템 파샤도
원래는 투르크인이 아니었다. 전부 비 투르크 기독교인 이었다.
역사에 기억되는 오스만 제국의 재상들 중에 순혈 투르크인은 많지 않다.
이 점은 투르크인이 잘나거나 못나서가 아니고 능력있는 비주류를 등용 했을 때 그들의
고군분투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한 때 오스만 제국 전역에 지어졌던 이슬람 사원들은 민족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터키 밖의 나라들에선 대부분이 사라졌다.
배가 정박하기 직전에 베일러베이 궁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정박하면 이 출구를 통해 나오게 된다.
바다의 문이라고 불린 문이다.
돌마바흐체의 황제의 문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문장이 아직도 제국이 건재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 파빌리온엔 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궁전 외벽의 일부는 복원공사 중이었다.
베일러베이 궁전은 1860년대에 황제의 여름별장으로 지어진 궁전이다.
원랜 동로마 제국 시절 이 곳에 큰 십자가가 설치된 정원이 있어서 십자가 정원이라 불렸다고 한다.
궁전을 지은 건축가는 아르메니아인인 사르키스 발얀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은 건축가인
가라베트 아미라 발얀의 아들이다.
규모는 돌마바흐체 궁전보단 작지만 내부 공간은 돌마바흐체 궁전 뺨칠정도로
화려하고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역시 돌마바흐체 궁전처럼 내부는 촬영불가다.
퍼온 사진인데 내부 모습은 이러하다.
앞에 배치된 일본 아리타 도자기가 인상깊었다.
이 곳은 압둘라지즈 황제 때 건설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공존한다.
압둘하미트 2세가 폐위되고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한데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발칸 민속축제가 이 곳에서 열려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베일러베이 궁전 관람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라마춘을 먹었는데 역시 맛은 최고였다.
카디쿄이 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탔는데 로템 제작년도가 프린팅된 플레이트가 있어서 신기해서 찍어봤다.
사진을 찍는데 승객들이 '저걸 왜 찍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ㅋㅋ
서울에서 다니는 전동차가 이스탄불에서도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들뜨게 한다.
대구가 여기서 왜 나와? ㅋㅋ 예상치못한 광고판이 너무 반가웠다.
폐차된 전동차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보인다.
하기아 에페미아 성당으로 1694년에 지어진 곳이다.
에페미아 성당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던 동명의 성당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원래 있던 하기아 에페미아 성당은 일부 유적이 전해진다.
지금 있는 성당에도 동로마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워서 내부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자난이 안들어가려고해서 난 모스크에 갔는데 왜 넌
성당에 안들어가냐고 하니까 같이 들어갔다 ㅋㅋㅋ
카디쿄이 지구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한 곳이다.
당시 여행을 위해 구입했던 작은 백팩 가방끈 한쪽이 다 뜯겨져서 가방가게에 가서
새로운 백팩을 구입했다.
가격은 역시 저렴하고 품질도 괜찮았다.
가게 사장님이 아주 친절했고 한국을 여행하고 싶다고해서 기분이 좋았다.
여기서 샀던 백팩은 이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1년동안 출퇴근때 매고 다녔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스탄불에서 느꼈던 행복한 기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가방을 멜때 나는 이스탄불에 대해 한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었고 자유로웠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었다.
자난과 펍에가서 나는 맥주 한잔을 주문하고 자난은 커피를 주문했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자난은 집으로 가고 나는 일단 에미노누로 가기위해 배를 탔다.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 기차역인 하이다르파샤 역으로 1908년에 완성된 기차역이다.
독일인 건축가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2010년 지붕의 화재로 아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작년에 이 곳에서 플랫폼 리뉴얼 공사 중에 고대 칼케돈 유적과 동로마제국 시대 유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발견된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세기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관광지로 조성된다면 정말 굉장할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스카이 라인이다.
148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건축된 사원으로 미마르 시난의 작품이다.
다른 오스만 제국의 사원들처럼 하기아 소피아의 중앙식 돔에서 영향받은 디자인이다.
관광객들은 거의 지나쳐가는 것 같다. 나도 그랬고....
이탈리아 로마도 메이져 바실리카 말고도 더 오래되고 좋은 성당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런건 재방문을 할때라야 더 감명 깊은 것 같다.
차이집이 보였는데 사이버펑크스러워서 찍어봤다.
쉴레이마니예 사원을 가기위해 언덕을 올라가는데 손자로 보이는 어린 소년의 손을 잡은
히잡은 쓴 장년여성이 나에게 "제팬??" 이라고 물어봐서 웃으면서 "코렐리임"이라고
대답했다🙂
이들도 쉴레이마니예 사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두운 언덕을 올라가고 있으니
어렸을때 시골에서 밤에 찬송가를 부르며 개신교회를 갈때가 생각났다.
이미 관광객 입장시간은 지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사원 앞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양에선 장엄제라고 불렸던 쉴레이만 대제의 이름이 붙은 사원답게 높은 위치에서
다른 사원들을 굽어보고 있다. 지존의 위치인 것이다.
터키 드라마 '위대한 세기'로 유명해진 쉴레이만 대제의 황비였던 휴렘술탄의 영묘이다.
슐레이마니예 사원 앞에있는 루프탑 카페인 미마르시난 카페에 왔다.
사실 더 좋은 루프탑 카페도 있다고 하는데 난 관광객이니까 일단 FM대로 간다...
명소라서 그런지 겨울인데도 옥상에 사람이 꽤 많았다.
터키쉬 커피를 시켰는데 일반 카페보단 가격이 비싸다.
경치를 즐길 수 있으니 당연한 거지만...
테라스 카페답게 쉴레이마니예 사원 뷰가 너무 멋있었다.
쉴레이만 1세 시대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였는데 상대적으로 이교도 신민들에게
너그러웠던 시기도 이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문제는 군대만을 제국의 기반으로 했다는데 있는데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의 인프라를 개발하기보다 자치권을 줘서 세금이나 바치게하고
이어서 다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반복했는데 비엔나 포위가 실패한뒤 그러한 방식에
제동이 걸리면서 제국은 점차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야경 사진을 찍는데 가죽 라이더 자켓을 입은 젊은 남성이 삼각대를 잠시 빌릴 수 있냐고 물어왔다.
괜찮다고 하고 어디서 왔냐고 하니까 시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터키에서 시리아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경계는 했지만
무리한 요구를 하지않고 깔끔하게 삼각대를 돌려주는 모습에 이 시리아 청년은 좋은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물론 술탄아흐멧 광장에서 사기를 치려한 시리아 사람들도 있지만 안 좋은 것은 잊어버려야지😂)
헤어지면서 시리아가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건너편에 있던 루프탑 카페이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고 있었는데 모스크 앞에서 이런 음악을 트는게 아이러니했다.
그게 터키고 이런 특이함을 터키를 여행하면서 많이 느낄 수 있다.
전 포스팅에서 올렸던 보즈도간 케메리(발렌스 수도교)이다.
같은 건축물이라도 낮과 밤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이었던 곳이다.
복원을 거친 것인데 측면 외벽의 복원 수준은 나를 실망시켰다.
테라코타의 아름다운 무늬가 안보이고 그냥 미장공사만 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붕괴위험까지 갔던 건물이기 때문에 복원자체에 의의를 두고 싶다.
위키피디아에는 이 곳이 밤에 위험하다고 했는데 죽기나 하겠냐라는 생각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사람만 없었지 조용했다.
다행히 전면부는 크게 손을 대지않아 비잔틴 예술의 품격이 살아있었다.
사원 앞에는 큰 카페가 있는데 내가 갔을땐 카페앞을 천막으로 다 가려놓은 상태라서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다. 물론 다 문을 닫은 시간이었겠지만...
카페에서 보는 제이렉 사원은 정말 멋있다. 하기아 소피아 바로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같은 성벽이라도 유럽과 터키의 분위기는 사뭇다르다.
로마의 성벽이 낭만과 생동감을 준다면 터키나 그리스에 남아있는 동로마제국 시대 성벽은
쓸쓸함과 허무의 정서가 강한 것 같다.
어쩌다보니 나도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갈라타 다리로 위에는 많은 낚시꾼 아재들이 고기를 낚고 아래엔 맛있는 Balik Ekmek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Balik Ekmek은 한국에선 '고등어 케밥'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난에게 발릭 에크멕이
고등어 케밥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정말 이상하다고 하면서
Balik Ekmek은 케밥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했다.
꽤 큰 체스메시가 있었다.
터키인들이 그리스 사람들을 놀리려고 만든 노래라고 한다.
동로마제국 시대 기념물인 쳄벨리타쉬가 보였다.
330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반암으로 만들어졌다.
원랜 위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이 있었으나 12세기 초에 태풍으로
동상과 상층부가 무너졌다고 한다.
그 후 십자가로 대체했지만 오스만 제국 정복후에 제거되었다.
18세기에 하층부 기단이 화재로 불에타버려 보수한게 지금의 모습이다.
미친 스케줄의 하루가 또 이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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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포스팅할 톱카프 궁전은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된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경복궁과 창덕궁을 합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경의의 문으로 제국시대엔 이 문부터 백성들의 출입이 제한됐다고 한다.
톱카프궁 앞에선 큰 개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대부분의 개들은 누워서 자고 있는데 일부는 관광객들 옆에 붙어서 어슬렁대기도 하는데
자신들이 관광객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라고 한다😂
입구에서 자난을 만났다.
왼쪽 건물이 '부엌궁전'이라는 곳으로 황실주방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곳엔 중국,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도자기가 전시되있다.
청조시대 중국도자기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중국인 단체관광객 중 어떤 아저씨가
도자기를 보고 큰소리로 "중궈다!"라고 외쳐서 깜짝 놀랐다.
무슨 큰일이라고 소리를 그렇게 질르나...
참고로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있다.
구중궁궐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옛 콘스탄티노플 구역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톱카프궁에서는 시내를 조망할 수 없었다.
아흐멧 3세 도서관이다.
도서관 내부에 있는 장식이다.
황제 알현실이다.
톱카프궁전 사원인데 규모가 아담했다.
보안요원 아저씨가 벽에 등을 기댄채로 너무 편안하게 풍경을 즐기고 있어서 평화를 깨기 싫어
조용히 구경하고 사원에서 나왔다.
궁궐의 반대편은 바다쪽이었는데 성벽으로 막혀있었다.
이즈닉에서 제작된 타일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타일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타일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칠기 기술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 파빌리온은 황제가 라마단 기간에 이프타르를 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또한 여름낮엔 그늘을 즐기는 용도로 여름밤엔 달빛을 즐겼다고 한다.
여러 개의 타일이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있다.
몇몇개는 색깔이 달라 나중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아랍어가 쓰여진 타일이다.
터키 문화재 건축물에서 아랍글자가 써있는걸 보면 마치 한국의 고궁에서 중국 한자가 연상된다.
과거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참고로 나는 한자를 잘 몰라 궁궐현판에 있는 간단한 한자도 엉뚱하게 이야기해서 친구한테
혼나곤 한다.
할례실의 입구 전체가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지속적으로 교류했기 때문에 톱카프 궁전도 서양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사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 경복궁처럼 19세기에 혁신없이 중세건축 그대로 지어진 건축물보단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편이 더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제국 의회 입구로 들어가는 문이다.
제국 회의실 내부인데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게 장식되 있다.
하렘에서 일하는 내관들이 담배를 피웠던 흡연실이라고 한다.
장대같이 긴게 바로 파이프다.
여기서부터 하렘이다.
하렘은 제국의회 건물과 바로 옆에 있는데 궁전 전체로 보면 중앙에 위치해있다.
궁전의 뒤쪽에 위치한 다른 궁전의 하렘과는 다르다.
하렘의 여인들은 하렘밖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지만 소리로 뜻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하렘의 여인들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법원건물에 있는
황제의 자리 바로 뒤가 하렘이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재판 내용을 들을 수 있었고
의사결정 과정에도 황제를 통해 참여할 수 있었다.
자난이 톱카프 궁전이 돌마바흐체 궁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관리상태가 좋지 않다고 얘기했다.
사실 그러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정말 지금 사용하고 있는 궁전을 방문한 느낌이라면 톱카프 궁전은
황제나 황실가족이 아주 오래전에 살았다가 떠나버린 느낌이 들어서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서깊은 궁전이니 난 너무 좋았다.
명나라, 청나라 궁녀들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의 하렘은
후궁들만 아니면 외부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황태후의 방에 있던 벽화인데 서양식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무라트 3세때 지어진 황제의 방이다.
1585년에 제국의 수석 건축가인 Davut Aga에 의해 지어졌다.
Davut Aga는 미마르 시난의 제자로 이스탄불에 있는 예니 사원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방은 톱카프 궁전의 다른 어떤 공간보다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황제의 방에 있는 이 돔이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큰 돔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이 아랍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비잔틴 양식에서
영향받은 돔구조이다.
돔이 금박으로 둘러쌓여있다.
황제의 개인실로 1579년 무라트 3세의 지시로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다.
왕자의 궁에 있던 스테인드 글라스인데 너무 아름다웠다.
스테인드 글라스하면 보통 유럽에 있는 성당을 떠올리는데 이곳도 너무 아름답다.
하렘에서 후궁들의 아파트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자주 거닐었던 마당이기도 하다.
아흐멧 3세 도서관 후면이다.
정의의 탑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이다.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래엔 위에서 설명한 제국회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곳에선 기독교와 이슬람과 관련된 성유물을 전시 중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을 깜빡해 인터넷에 있는 사진으로 대신한다.
내부 성유물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있다.
두 번째 일정인 하기아 이레네 성당으로 향했다. 톱카프 궁전 구역 내에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기인 337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보존된 성당은 740년에 지진에서 재건된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하기아 소피아랑 바로 옆에 있는데 이 두 성당은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만들면서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이었다.
325년에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978년부터 2014년까지 클래식 공연장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내부는 별다른게 없어서 자난은 밖에서 기다리고 나만 보고 나오기로 했다.
성당의 나르텍스 부분이다.
기록에 의하면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는데
앱스의 세미돔에 있는 십자가 빼고는 모든 모자이크가 사라져있다.
740년 재건때 성상파괴운동이 한창이었으니 그때 사라졌을수도 있고
오스만 제국때 없어졌을수도 있고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이 날 하기아 이레네를 방문한 이유가 바로 이 십자가를 보기위해서 였다.
하기아 이레네의 십자가는 성상파괴운동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쉽게 말해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거나 인간 동물 구분없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성화나 성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는 사상이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 재건된 740년엔 성상파괴운동이 한창 벌어졌던 시기였다.
이후 동서교회 모두에게 성상파괴운동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는데
보편교회(카톨릭)은 성상파괴운동 이전과 같이 성상과 성화를 모두 사용하게 했고
정통교회(정교회)는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배려하고자 성화만 사용하게 했으니
현재 두 교회의 풍습의 차이가 여기서 기인한다.
성당의 보존상태는 심각해 보였는데 천장에서 돌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져내려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늦기 전에 보수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기둥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런걸보면 이런 것들을 없애지않고 몇 백년동안 관리했던 오스만 제국 군인들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도 간혹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집에서 현재 살고 있는 주인들이 원래 있던
장식같은걸 없애지 않고 손님들에게 자랑하곤 했는데 그런 심리일까?
일부가 떨어져나간 이런 십자가를 봐도 궁금해진다.
내부장식이 전부 떨어져나간 것을 보면 앙상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성당의 아치형태를 보니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산타 코스탄자 영묘가 떠올랐다.
기독교 건축물은 석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파괴된 건물을 재건할때 완전히 새로 짓지 않고
기존에 멀쩡한 부분은 남겨놓는다거나 부재를 재활용한다거나 하는일이 많다.
창문 아래 배치된 신트로논(계단형 사제석)은 이스탄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로마시대
사제석이다.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힌 골고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왼편엔 그리스어로 성서 구절이 인용되 있다.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음직할 돔도 일체의 장식이 사라져있다.
지하철을 타고 탁심역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은 지하철이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탁심광장에 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동상이다.
대통령 시절이 묘사되었는데 조력자였던 이스메트 이노누, 페브지 차크마크 등의 인물도
표현되있다.
바로 다른면에 있는 동상으로 아타투르크의 터키 독립전쟁 사령관시절 모습을 표현했다.
탁심 이스티크랄 거리를 횡단하는 열차다.
치첵 파사주라는 곳인데 유럽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 정문이다.
흡사 궁전의 문에 쓰일 정도로 웅장하다.
아브루파 파사주라는 상점가이다.
Galata Konak Cafe 라는 곳에 들렀다.
갈라타 타워가 보이는 곳이다.
과거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으로 유명한 시르케지역이다.
한때는 이곳에서 유럽까지 철도로 이어져 있었다.
이때는 아쉽게도 보수공사 중이어서 일부가 가려져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니 이 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엄넘치는 외부와 달리 내부 인테리어는 정말 편안하다.
기차를 기다리지 않을때 플랫폼에 서면 그냥 운치있고 좋지만 막상 외국에서 기차를
타려고할때는 항상 조마조마하고 가슴을 졸인다.
자난과 시르케지역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셨다.
이 날도 정말 많은 곳을 걸어다녔다.
자난은 집에가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근처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이스탄불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인것 같다.
지형자체의 장점이 이 곳이 어떤 건축물로 채워져도 무한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게 만든다.
그래서 한때는 많은 세력들의 타겟이었고 지금도 관광객들을 매혹시키고 있는것이 아닐까?
석양과 예니사원 그리고 주야에 관계없이 드리워진 낚시대들이 인상깊다.
이 곳은 구 프랑스인 감옥으로 1850에서 190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당시 프랑스인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여기에 수감했다고 한다.
숙소에서 찍은 술탄아흐멧 사원이다.
어제 돌마바흐체 궁전 기념품점에서 산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프린트되있는 수첩이다.
숙소에서 에페스 맥주를 마셨다.
숙소내 룰이 음식은 방에서 먹어도 되지만 맥주는 베란다에서 먹어야 한다고해서
떨면서 마셨다. 그래도 여행 중에는 한번씩 맥주를 마셔줘야 마무리가 되는 것 같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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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일디즈 궁전을 가기위해 트램을 타고 버스를 갈아탔다.
가는 도중에 내려서 몰라첼레비 사원을 사진에 담았다.
1584년에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다.
일디즈 궁전을 방문했지만 군인들이 제지를 했다.
아쉽게도 복원을 위해 무기한 폐쇄상태였다.
구글에서도 폐쇄라는 표시가 없었는데 이런 일은 외국을 여행하다가 자주 벌어진다.
자난에서 연락을 해서 일디즈 궁전이 폐쇄중이라고하고 베식타쉬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디즈 궁전에 가는 길에 있는 일디즈 하미디예 사원이다.
술탄 메흐멧 2세의 동상이 있었다.
자난을 만나서 해군 박물관으로 갔다.
이건 자난이 계획해서 방문한 곳인데 아주 유익한 곳이었다.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의 역사는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4척의 황실 카이크선과
터키 공화국 초기에 사용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3척의 배가 보존되어 있다.
후기 오스만 제국 문화의 화려함을 느끼려면 근처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과 함께
이 곳을 방문하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초입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사진과
그가 쓰던 작은 선박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배는 이따 말미에 다룰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현대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인물이다.
아타투르크라는 이름은 '터키인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의 이미지는 대체로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쓰러져가는 오스만제국의 장군으로 유럽의 군대를 격퇴하고 아나톨리아를 사수한 전쟁영웅의
이미지일것이고 두 번째는 서구화와 세속주의 정착을 성공시킨 개혁가 일것이다.
안타깝게도 권위주의 이슬람 정당(AKP)이 집권하면서 첫 번째 이미지만이 강조되고 있다.
가령 AKP를 지지하는 터키인들은 집이나 가게에 아타투르크의 군인시절 초상화를 더 선호한다.
오스만 황실의 카이크선으로 주로 황실 이벤트나 황제의 일일여행에 사용됐다고 한다.
선미에 장식된 음각이 너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곳의 배들은 열, 습도, 빛에 매우 민감하다고 한다.
100년의 수명이 넘은 이 배들이 뒤틀리거나 망가짐없이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와 복원사들의 노력했을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압둘메지트 황제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카이크선이다.
독일의 빌헬름 2세와 황후가 1889년 이스탄불에 상륙할 때 이 배를 이용하여 해안가에 내렸다고 한다.
셀주크 스타일에 영향받은 기하학적 형태의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대형 선체의 경우 이렇게 따로 분리하여 보존하였다.
박물관은 마르마라해 바로 앞에 지어졌는데 해군 박물관으로서 최고의 위치임에 틀림없다.
오스만 제국의 해군 문장이 전시되 있었다.
보존을 너무 잘해놔서 지금도 바다에서 사용이 가능할 것 같다.
황제의 키오스크가 카이크선 위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화려함 때문에 배 자체가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궁전 같았다.
키오스크에 있는 황제의 옥좌이다.
압둘아지즈 황제가 사용했던 카리크 선이다.
오스만 제국의 문장이 키오스크 중앙에 장식되어 있다.
선미에는 독수리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동로마 제국의 상징도 독수리상이어서 흥미로웠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거나 제국 편제에서 동로마 제국을 참고했는데
그럼 당시 아나톨리아 밖의 아랍 민족들에게 이 제국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하다.
정통 칼리파 국가들처럼 보였을지 아니면 종교적으로 느슨한 유럽의 제국처럼 보였을지 궁금해진다.
해군 박물관엔 14척의 황실 선박이 있는데 최적의 환경에서 보존하기 위해 2009년에
지금의 위치에 박물관을 새로 지었고 기존의 콜렉션도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배가 만들어진 시대인 19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약해지는데 반해
예술적인 측면에선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당시 공예품을 비교하면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문화적인 역량은
대단했다.
위에서 언급한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사용했던 요트였던 MV Savarona의 구명선으로 쓰이던
보트가 전시되어 있었다.
MV Savarona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건조한 대형 요트로 원래 소유자는 다른 사람이었으나
말년의 병이 든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바다공기가 건강회복에 좋다는 주치의의 조언을 듣고
1938년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의 바램과 달리 요트는 두 달도 채 사용되지 못하고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소유자도 바뀌고
여러 용도로 전용되다 지금에 이른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플로리아(미국 플로리다 아님)의 여름별장에서 사용한 보트라고 한다.
마호가니 목재로 건조되었다.
베식타쉬에 가서 도너 케밥을 먹었는데 서울 이태원에서 먹던 케밥보다 훨씬 맛있다.
Sebil Cafe라는 곳으로 오스만 제국 시대 유서깊은 건축물을 카페로 개조한 곳이었다.
오늘 방문할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입장료는 90리라(한화 13000원)로 상당히 비싸다.
하지만 한국어 오디오가이드가 제공되고 정말 완벽한 상태로 관리되고 있으니 방문하시길 권하고 싶다.
안가면 후회해서 나중에 또 이스탄불에 와야할 수도 있다...
정원의 배치가 정말 아름답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1856년에 지어진 서양식 궁전으로 로코코,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까지
여러 서양 건축양식이 절충되었다.
건축가는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건축가인 가라벳 발얀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시간이 흘러 1915년엔 터키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적대하게 되고 끔찍한 참극으로 이어지지만 어쨌든 이 시대는 그랬다.
돌마바흐체 궁전도 바다 앞에 지어졌다.
때문에 압둘 하미트 2세는 적성국가들의 해상공격을 염려하여 육지쪽에 있는 일디즈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정적 탄압은 잘하던 사람이 외적은 또 무서웠나보다;;;
이후 돌마바흐체 궁전은 33년 동안 국가행사 용도로 1년에 한 두번 사용됐다고 한다.
터키공화국이 건국된 후엔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하렘에 있는 방 하나를 침실로 쓰게 된다.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는 사진촬영이 일절 금지돼있다.
이후 내부사진은 전부 퍼온사진으로 대체한다.
실내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오스만제국 황제가 부활한다면 이 곳을 보고 "오랜만에 와보니까 원래보다 약간 낡았네?"
라고 할만한 컨디션 이었다.
그만큼 관리도 매우 엄격하다.
오디오 가이드로 거의 모든 방에 대해 해설을 들을 수 있으며 관람시간도 꽤 오래 걸린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이 있다고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에 있는 하맘(목욕탕)인데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다.
이 정교한 조각을 보라!
돌마바흐체 궁전의 하렘 건물이다.
하렘은 입장료를 별도로 받는데 역시 방문안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으니 가보길 권하고 싶다.
아무래도 술탄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이니 세람르크에 비해 인테리어도 컬러풀하고 아름답다.
내부촬영이 불가한 관계로 이 사진도 퍼왔다.
하렘은 옛날 서양에서 가지고 있던 자유분방한 환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공적인 공간이었다고 한다.
세람르크도 마찬가지지만 여기도 정말 실밥 하나도 허술하게 관리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
제국의 역량을 쏟아부어 만든 훌륭한 건축물이지만 그냥 방치된다면 3년도 안되서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실제론 주기적으로 채색도 다시 해주고 아주 정교한 보수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 같은 관광객들은
그런 머리아픈 작업들에 대해 잊고 건축됐을 당시로 타임슬립한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
하렘에선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사용한 방을 볼 수 있었다.
이 방은 본래 오스만 제국 압둘메지드 황제의 겨울 침실로 사용된 곳이었고
터키 공화국 건국 후엔 앞서 언급했듯이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침실로 사용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요트에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용태가 악화되고 이 곳으로 돌아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57세의 나이로 서거한 곳이다.
이 방의 시계는 그가 사망한 시간인 9시 5분에 멈춰져있다.
내 옆에는 히잡을 쓴 나이지긋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슬픈 표정으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침대를 보면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세속화 정책으로 히잡을 쓴 여성은
터키 사회내에서 소수가 되었는데(이슬람주의 정권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반대가 됨)
이 아주머니는 아타투르크 대통령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의 마음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의 표정을 떠올리면 그 세대의 터키인들은 그런 것을 초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여행을 할때도 즐거웠지만 요즘같은 때서야 더욱 느낀다.
나는 정말 행복했음을...
자난과 다시 베식타쉬로 가서 카페에 들렀다.
사진에 보이는건 내 카메라가 아니라 자난의 카메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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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달간의 여행이었는데 1년 넘게 연재를 해오고 있다.
요즘 뉴스를 보니 아마도 1년은 팬데믹 상황이 지속될 것 같아 보이는데 내년에도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인것 같다.
여행 이야기나 풀어내야겠다...
차이 가게를 나와서 자난이랑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걸었다.
한때는 수많은 침략자들에게 참교육을 시켜줬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규모는 옛 콘스탄티노플 구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해 군데군데 끊어진 구간이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풍화로 인한 훼손이 심각했다.
중세 요새도 그렇고 일본 전국시대 성도 그렇고 규모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멋있는 요새들이
화약무기의 발전에 의해 두껍고 단순한 모습의 성채로 대체되는 모습을 보면 아쉽다.
콘스탄티노플을 1000년간 버티게 해줬던 테오도시우스 3중성벽이다.
역사에서의 퇴장까지도 위대했던 명요새이다.
성벽의 일부가 누군가의 작업실로 쓰이고 있었다.
오래된 집들을 보면서 터키인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 작품인 이스탄불이 떠올랐다.
파묵은 한땐 세계의 보석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을 자신들의 조상인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것이
정복인지 몰락인지 고민했다.
포파이로제니투스 궁전으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궁전이었던 블라헤르네 궁전 단지의 일부였다.
이 구역에 있는 성당에서 로마누스 성인이 성모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수많은 성가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아니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라고 불러야 마땅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날에 하기아 소피아에서 예배를 마치고 가족들과 마지막 만찬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술탄의 동물원으로 쓰이다가 17세기엔 매음굴로 개조되었고
18세기엔 타일을 제작하는 공방으로 쓰여졌으며 19세기엔 유태인들을 위한 구빈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내가 갔을땐 복원작업이 막바지였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터키에서 쓰는 명칭인 Tekfur Sarayi라는 명칭의 Tekfur은 동로마 제국 황제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뜻하는 말로 로마 황제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한적하지만 한때는 서양세계를 대표하는 도시의 궁궐이었다.
전체적으로 수수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동로마 제국 후기의 경향이었다고 한다.
사진과 같이 지붕이 재건되어 있었다.
과거엔 지붕도 무너져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워낙 잘 지은 건축물이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성벽을 보수하는 작업중이었나보다.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읽어보면 어딜가나 외국인이 있었던 오스만 제국 시절에 비해
터키 공화국 초기의 이스탄불엔 외국인을 찾기도 힘들었고 길거리에도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적인 문화도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내가 파묵이 살았던 적막과 슬픔의 도시 이스탄불을
상상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정말 순간순간마다 과거의 정취가 되살아 나는듯 했다.
미리마 술탄 사원으로 쉴레이만 대제의 딸인 미리마 술탄을 위해 지어진 사원이다.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같은 이름의 사원이 우스크다르에도 있는데 그 곳에 있는 사원이 더 유명하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발렌스 수도교로 378년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회색 매의 아치'라는 뜻의 보즈도간 케메리라는 터키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은 원래 규모에 비해 80%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도 충분히 길다.
제이렉 이슬람사원으로 원랜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으로 쓰이던 건축물이다.
현존하는 동로마 시대 건축물 중에선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사실 이스탄불에서 동로마시대 성당들 중에 하기아 소피아와 카리예 박물관(코라 수도원)이
유명하지만 동로마시대 성당이었던 모스크들이 15개가 넘는다.
이들 성당들은 모스크로 개조되어 실내에 성화들은 모두 없어졌지만 그래도 희미한
흔적이나마 감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카라쿄이 팰리스로 1910년 이스탄불 태생의 이탈리아인 건축가인 지울리오 몽게리의 작품으로
비잔틴 건축요소였던 반원형의 아치가 표현되었다.
지울리오 몽게리는 오스만 제국 말기와 터키 공화국 초기 많은 건축물을 디자인했고
터키 1세대 건축가들의 육성에 기여했다고 한다.
갈라타 타워앞에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다들 알았을 것이다 하하!!
주 터키 한국문화원이 문화교류를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들었다.
동로마 제국이 아닌 제노바 공화국에서 세운 건축물로 1348년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메갈로 피르고스라는 타워가 있었으나 4차 십자군에 의해 무너졌다고 한다.
1892년에 건축된 옛 터키 중앙은행 본사 건물이다. 원랜 오스만 중앙은행 본사였다.
은행건물들이 늘어선 이 거리는 Bankalar Caddesi라고 불리는데 초기 터키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곳들중 하나이다.
이 곳의 서양식 건물들은 유럽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터키도 한국도 왕정에 의한 서구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행을 시작했을때는 살이 좀 쪄서 허리띠없이 다녔는데 10키로 넘게 빠지면서 허리띠가 필요하게 되서
지하상가 상점에 들러 허리띠를 구입했는데 자난이 흥정을 해줘서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수명이 다 할때까지 썼다.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1년동안 이스탄불에서 느낀 좋은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갈라타 다리에서 쉴레이마니예 모스크가 보였다.
저녁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밝았다.
터키 디저트인 바클라바이다.
아주 풍부한 맛이 난다.
터키를 대표하는 디저트라 유럽국가들에가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터키에서 먹는게 가장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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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7-1 터키 - 이스탄불: 이슬람 예술박물관, 술탄 아흐멧 사원, 카리예 박물관
푹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러 갔다.
Seatanbul 호스텔에서는 아침식사가 무료로 제공됐는데 식당에서 보이는 마르마라해 뷰가 압권이다.
아득하니 생각에 잠기기 좋은 풍경이었다.
오래 전엔 이 동네도 원래 동로마 제국의 왕궁이 있던 곳이었다. 왕궁의 유구는 이 근처에 남아있다.
Seatanbul 호스텔도 있고 호텔도 있는듯한데 투숙객들을 위한 식당은 1개인듯했다.
보통 호스텔에서 아침식사가 제공된다고하면 평범한 토스트 정도만 제공되는데 여긴 퀄리티가 꽤 괜찮았다.
먼저 도착해서 자난을 기다렸다.
여긴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한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이브라힘 파샤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이브라힘 파샤는 오스만령 그리스 출신으로 원래 정교회 출신이었다.
2등 국민이자 비주류였던 셈인데 오스만 제국의 말직부터 재상까지 오른걸보면 오스만 제국은 종교만 이슬람을 믿으면 계층간 이동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황족이나 쓸법한 명칭을 자칭하는등 처신에 부족함을 보이다가 결국 쉴레이만 대제에게 처형당한 것을 보면 비주류로서의 좌절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슬람의 경전인 성 쿠란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성 쿠란을 아주 깨끗하게 관리하고 집에 가장 중요한 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중에 성서에 많이 읽은 흔적이 남는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시대 만들어진 쿠란이다.
색채가 빛이 바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터키식 모자이크이다.
그리스 로마식 모자이크와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15세기초 콘야에 있던 나무 문이다.
기하학적인 음각이 정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셀주크 제국 시대 부조이다.
그리스 로마 조각과 다르게 반복적인 식물 디자인이 돋보인다.
지금 기술처럼 기계로 뽑아낸 것도 아니고 전부 수작업으로 짜서 만든 것이다.
터키 & 이슬람 예술 박물관 지하에는 로마제국시대 히포드롬 경기장 유구가 남아있다.
진짜 로마는 지하에 있다는 이야기가 다시 한 번 확인이 되는 순간이다🙂
한땐 이렇게 거대한 전차경기장이 존재했지만 4차 십자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때 공격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보물들이 서유럽으로 약탈되었고 다시는 예전처럼 세계의 수도로 기능하지 못했다.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가 Sedefekar Mehmet Agha에 의해 지어진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오스만 제국하면 떠올리는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사원의 일부는 동로마 제국 대궁전 유구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이 동로마 제국에게서 모티브를 차용했기 때문에 돔이라는 테마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대형 돔 양식으로 인해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기아 소피아와 마주본 모습이 흥미롭다.
사원의 규모때문에 주입구에서도 일부만 보인다.
아쉽게도 술탄아흐멧 사원을 건축한 시기부터 제국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사실 비잔틴 제국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나 성 사도 성당등을 제외하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성당들인데
이런 대형 모스크를 하나도 아니라 여러 개를 지어댔으니 오스만 제국이 사원건설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사원에 들어갈땐 신발을 벗어야 하며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들어갈 수 없다.
또한 여성은 머리카락을 가려야 하는데 사원에서 히잡이나 천을 빌려주었다.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기독교 성지순례 목적으로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단체관광객 코스에도 포함되어 있는 곳이다.
그 정도로 종교를 초월해서 꼭 방문해야할 터키의 보석이다.
(물론 더 파고들어가면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도 있고 셀리미예 모스크도 있지만 접근성과 상징성을 고려하면 술탄 아흐멧 모스크가 방문 1순위라고 할 수 있다.)
기대 이상으로 모스크는 너무 아름다웠다.
블루모스크라는 별명답게 푸른빛깔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신기한 마음에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본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에 쿠알라룸푸르 국립모스크나 싱가포르에 있는 술탄 모스크도 밖에서만 사진을 찍고 들어가진 않았다.
왜냐면 둘 다 현대에 생긴 모스크이고 국립모스크에서 직원이 내 물음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불친절했기 때문에 굳이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반면 터키의 모스크에선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고 부담을 주지 않았다.
돔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오차를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듯 했다.
아랍에서 온 사람들같은데 민바르를 신기한 듯이 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민바르 자체도 아주 큰 규모이다.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임을 넘어 삶의 규범이 되어 국민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터키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않고 라마단 기간을 꼭 지키지만 그래도 아랍국가들보단 많이 자유로운 편이다.
아브라함 계열 종교는 경전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평화도 되고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종교이다. 가톨릭은 공의회로 개혁을 해왔지만 이슬람은 바티칸같은 중앙조직이 없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이런 퇴행성이 무슬림 이민자 집단과 원주민 집단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에서 샤를리 엡도의 모하메드 풍자를 소개한 교사가 참수당한 사건은 그러한 예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으로 가기위해 왼쪽 지하터널로 이동했는데 터널안에서 노신사가 인사를 했다.
사소하지만 좋은 기억이다.
술탄아흐멧 모스크와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 중간에 위치한 아라스타 바자르이다.
가격은 그랜드 바자르보다 비싸지만 규모 대비 고퀄리티 상품이 많다는 평가를 듣는다.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은 5세기~7세기 동안 건설되었다.
이 곳에 보존된 모자이크는 바닥에 장식된 모자이크들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와도 겹치니 한때 이 곳의 모자이크를 황제도 걸어다녔을 것이다.
1953년에 개관한 박물관이지만 그 당시 지어진 목조 박물관은 습도와 온도관리가 안되서 모자이크가 손상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에 현재의 박물관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흔히 동로마 제국에 대해 갖는 오해가 그리스도교때문에 그리스 로마 고전 문화가 약화되었다는 것인데
세속 분야에서는 여전히 헬레니즘 문화가 살아있었다.
대궁전 모자이크는 바닥 장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발굴 당시엔 훼손도 심하고
이스탄불이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공기에 있는 염분이 부식을 가속화 시켰다고 한다.
지금 전시된 모자이크들은 모두 염분과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보존작업을 거친 것이다.
위 사진의 모자이크는 원래 모자이크에 붙어있던 모르타르를 제거하고 새로운 모르타르를 붙여 전시되고 있다.
대궁전의 모자이크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모자이크가 없고 그리스 신화나 동로마 제국의 세속에서의 모습을 반영했다.
성당에서 보이는 성화와 달리 이 곳의 모자이크는 그리스-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자연주의 경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여기도 군데 군데 모자이크가 듬성듬성 사라진 부분이 있는데 복원작업때 새로운 모자이크로 대체해보려고 했지만 위화감이 너무 심해서 원래 있는 모자이크를 강조하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호랑이 사냥꾼들을 묘사한 모자이크로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색채의 유려한 묘사가 제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모자이크 장인들을 불러모아 제작했음을 상기시킨다.
프리즈 장식으로 사용되던 모자이크다.
멸실된 부분을 제외하면 상태가 아주 괜찮았다.
역시 프리즈 장식이다.
카리예 박물관 외관은 이렇게 공사중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명품건축물이지만 수 없는 지진을 견뎌내며 만신창이가 된 건물이기 때문에
보수작업이 필요하다.
평소엔 이런 외관이라고 한다.
코라 수도원으로 지어진 이 곳의 역사는 동로마 제국 초기인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구조는 11세기에 완성되었다. 이후 지진으로 일부가 붕괴된 수도원은 14세기에 이삭 콤네노스 왕자에 의해 수도원 성당으로 재건된다.
이 때 추가된 벽화들은 서유럽에 의해 벌어진 콘스탄티노플 침략 이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헬레니즘 색채가 더해지게 된다. 라틴 예술에서 멀어지고 동로마 제국 지역의 뿌리가 된 그리스의 고전에서 답을 찾은 것인데 '비잔틴 르네상스'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이 곳의 성화들은 이전의 전형적인 비잔틴 예술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 배치가 너무 조화롭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미쳐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친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1500년부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게 되는데 코라 수도원에서 카리예 사원으로 바뀌게 된다.
동시에 성당일 당시 제작된 모자이크들이 회칠로 덮여지게 되는데 5세기 동안 비잔틴 예술은 서유럽에 건너간 흔적으로서만 남아있게 된다.
그 후 1958년에 터키 공화국의 세속화 정책의 일환으로 하기아 소피아처럼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2020년 8월, 카리예 박물관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됐는데 지지층 결집을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여겨진다.
내가 방문했을때는 카리예 박물관이었기 때문에 이 명칭을 따르고자 한다.
2020년 8월 20일을 기해 카리예 박물관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왼쪽 사진이 이전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이 성화를 커튼으로 가린 현재 모습이다.
이슬람 예배 중엔 위에 사진처럼 커튼으로 가려질 것이라고 한다.
카리예 박물관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을땐 Naos(본당)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본당은 훼손이 많이 진행됐기도 하고 돔 부분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진으로 쓰러진 것을 재건한거라 모자이크가 남아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 곳의 백미는 외부와 내부 나르텍스와 소성당 구역의 정교회 장식이다.
솔직히 이 곳은 구조때문에 이슬람 사원으로 쓰기엔 불편함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건축물 전체에 걸쳐 수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있는데 이걸 억지로 가리고
굳이 천장낮은 이슬람 사원으로 쓰는건 정말 어색하기 그지없다.
과거의 터키 세속주의 정권은 몇 개의 상징적인 정교회 성당이었던 곳은
비록 중간에 모스크로 개조되었을지라도 박물관으로 타협할 줄은 알았다.
코라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행적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잔틴 모자이크를 감상하기엔 하기아 소피아보다 더 좋은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나르텍스 입구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고 왼편엔 로마시대의 순교자 게오르기우스 성인의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사도 바울 모자이크인데 금빛 모자이크를 실제로 봤을때 느낌에 최대한 근접하게 촬영된 것 같다.
자난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반짝인다'라고 표현한 그 금빛 모자이크...
현대에는 LED 등도 있고 별의 별 기상천외한 조명도 없던 11세기의 동로마인의 눈에 이런 모자이크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해봤다.
내부 나르텍스에 있는 모자이크로 성모님 아래엔 동로마 제국의 왕자였던 이삭 콤네노스가 표현되어 있다.
돔에 새겨진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는 처음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조들이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육신은 100년도 가지 못하지만 이 곳의 모자이크는 1000년 가까이 늙지 않고 살아있다.
성모님과 12천사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최후의 심판이 프레스코화로 표현되있다.
소성당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Parekklesion 소성당은 장례식을 지내던 곳이다.
소성당의 앱스부분에 그려진 프로스코화를 마주했다.
'부활'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예수 왼편은 아담, 오른편은 하와이며 아담 왼쪽의 3인은 세례요한, 다윗, 솔로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엔 파괴된 죽음의 문과 열쇠들이 널부러져 있다.
그저 오래된 성화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성당예술의 레퍼런스가 된 작품이다.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도 Anastasis가 이콘으로 표현되어 북한교회 부활을 망자의 부활로 표현했다.
이 곳에서 Anastasis 성화 아래 장례식이 치뤄졌다고하는데 동로마인들의 종교적 열망이 느껴졌다.
아담과 하와를 일으켜 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동로마인들은 구원을 확신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부분이 이렇게 훼손되어 있었다.
13세기 모자이크면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기술적으로는 가장 발전했을 시대여서 온전하게 관리되었다면 어느 모자이크보다도 훌륭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유럽국가의 경우 훼손된 모자이크 부분을 교체해서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터키의 경우 훼손된 부분은 놔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터키도 2차대전 이후에 모자이크 복원 인력을 양성했지만 어디까지나 복원에 대한 것이고
비 기독교 국가로서 성화들을 새로 창조한다고 한다면 정교회 국가들의 심리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중풍환자를 치료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카리예 박물관의 백미는 성모님의 삶을 표현한 18개의 모자이크 패널이다.
위쪽 모자이크는 요아킴이 아기 성모님을 사제들에게 데려가서 축복을 받는 장면이다.
모자이크들이 높은데 있다보니 관람하다가 목이 아플 수 있다.
아래쪽 모자이크는 사가랴가 성모님의 남편감을 다윗왕가 후손 12명중에서 선발하는 장면인데 맨 앞에 서있는 요셉이 지팡이에서 꽃이 돋아나자 당황하는 장면이다.
기도하는 성모님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못했다.
사실 카리예 박물관의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여러 문제가 많다.
많은 관람객들이 내부에서 뿜어내는 이산화탄소와 습기때문에 액체화된 염분이 백화현상을 일으켜서 그림을 훼손시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위쪽에 아나스타시스 성화도 군데군데 백화현상이 발견되는데 처음엔 그림을 망가뜨리지만 그 다음은 그 아래 석고를 무너뜨린다고 한다.
카리예 박물관을 나와서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서 차이를 한잔했다.
따뜻한 차이를 한잔하니 뱃속이 따뜻해졌다.
사실 추운 야외를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도 아프지 않은건 터키에서 잘 먹고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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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6-2 터키 - 이스탄불: 술탄아흐멧 광장 야경
하기아 소피아를 나온 자난과 나는 에미노누로 향했다.
나오는 와중에 테오도시우스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는 이집션 바자르였다.
이건 낮에 먹은 쾨프테인데 뒤늦게 올린다.
정말 맛있고 우리 한국사람 입맛에도 잘 맞는다.
요거트의 일종인 아이란은 어느 음식에도 잘 어울린다.
이집션 바자르에선 로쿰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손으로 한줌 분량도 한국에서 만원이 넘는다.
터키쉬 커피 원두를 즉석에서 로스팅하는 곳에서 커피를 구입했다.
자난은 저녁시간이 되서 집으로 갔고 나는 예약한 호스텔로 갔다.
Seatanbul 호스텔이란 곳에서 숙박했는데 여긴 낡긴했는데 별로 지저분하진 않았고
관광객은 나 혼자였고 나머진 인근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터키 현지인이랑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
그냥 가정집 느낌이었다.
한가지 불편했던 점은 호스텔 자체룰로 인해 방안에선 술을 마실 수 없고 베란다에서 술을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는데 과거 제2의 로마였던 이스탄불이니 이스탄불 법을 따르라고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결국 베란다에서 떨면서 맥주를 먹었다.
그래도 맥주마시는 것에 대해서 안좋게 보진 않았던 것 같다.
그 맥주도 사실 호스텔에서 하는 작은 상점에서 산것이니 말이다 하하!!!
사실 술탄아흐멧 지구는 숙박을 하기에 좋지 않은게 너무 안쪽이다 보니까 다른 구역으로 가기에 불편하고
만약 출퇴근시간에 공항으로 간다면 배낭이나 캐리어를 들고 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적으론 좀 시끄러워도 탁심광장 근처가 좋은 것 같다.
밤의 하기아 소피아는 다른 표정을 보여줬다.
이건 내 버릇인데 밤에 보는 역사건축물을 보면 꼭 역사인물들이 밤에만 살아나서 안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밤에 오사카성을 방문했을때도 불이 켜진 천수각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안에서 오사카 여름의 진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것같은 공상에 빠졌다.
하기아 소피아를 카메라에 담기위해 사진을 찍는데 남자 둘이 오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고해서 찍어줬다.
그리고 자기들은 두바이에서 여행왔는데 두바이에 있는 기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랑 한잔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전형적인 사기수법이다.
여기서 그래 한잔하러 가자고 둘이 가자는 곳으로 간다면 룸살롱같은 술집에서 100만원 이상을 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터키어로 'Istemiyorum(싫다)'고 대답했더니 둘이 어리둥절하는 반응을 보였고 뒤도 안돌아보고 다른 포인트로 이동했다.
나중에 검색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두바이에 기아차 공장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게 터키인 중에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탈리아나 다른 남유럽 사람들을 사칭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리아인이라면 그 보다 잘사는 아랍국가를 사칭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몇 분뒤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와서 어디서 왔냐고 하면서 자기랑 한잔하자고해서
나 지금 사진찍느라 바쁘다고 했다.
서유럽의 팔찌 사기꾼이나 집시들은 그냥 대놓고 나 사기꾼이요 도둑놈이요하고 다 써져있어서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이 자식들은 자꾸 뭔가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것같아서 구질구질하고 짜증이 났다.
웃긴게 이날 총 3명이 나한테 접근했는데 이 모든게 첫 10분동안에 벌어졌다.
10분간 술탄아흐멧 광장의 사기꾼들이 내가 호구인지 아닌지 나를 시험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대체로 평온했다.
술탄 아흐멧 광장은 원래 콘스탄티노플의 전차경기장이 있던 장소이다.
동로마 제국 시절 니카 폭동의 근원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4차 십자군의 공격때 전차경기장은 파괴되었다.
원래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로 기원전 1475년 전에 제작되었다.
서기 390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이 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상단엔 이집트 상형문자, 하단엔 그리스어, 라틴어가 모두 적혀있다.
지난 포스팅에서 설명한 뱀머리가 원래 붙어있던 기둥이다.
원랜 3개의 뱀 머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기둥만 남아있다.
아폴로의 델포이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해충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로 이집트에서 반출해온 것은 아니고 10세기에 콘스탄티누스 7세때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겉에 청동으로 덮여있었다고 하는데 4차 십자군의 약탈로 인해 청동이 제거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엔 예니체리들의 암벽등반 장소가 되어 추가적으로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그림과 비교해보니 그때 훼손된 부분은 재건이 된 상태이다.
카이저 분수로 독일이 빌헬름 2세의 이스탄불 방문 2주년을 기념하여 1900년에 지은 것이다.
터키와 독일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보면 나치 독일 기간을 빼면 대부분의 기간동안 우방이었지만 현재는 냉랭해진 상태이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의 다리 역할을 할 때 가장 강했는데 속상하게도 이젠 아랍세계의 대장역할을 하려고 한다.
하기아 소피아 맞은편에 있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다.
나는 술탄아흐멧 모스크 사진을 처음 봤을때 하기아 소피아랑 헷갈렸다.
그도 그럴것이 하기아 소피아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사원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진을 찍을때 아까 2번째로 접근했던 사기꾼 자식이 와서 너가 뭐가 바쁘냐고 나를 자극했다.
그래서 지금 사진찍고있는거 안보이냐고 응수했다.
그랬더니 화해하는척 연극을 하면서 자꾸 질척대서 무시하고 숙소로 향했다.
사실 터키인 사기꾼들은 평균적으로 별로 집요하지 않은데 아랍인 사기꾼들은 자기 맘대로 안되면
강요하는 느낌도 있고 더 집요한 것 같아서 상대하기 싫다.
평화롭게 야경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아주 성가셨던 촬영이었다.
어쨌거나 술탄아흐멧 광장의 야경은 너무 아름답다.
나는 나중에 깨달았다. 직접 술탄아흐멧 광장에서 야경을 만끽하는 것보다 내가 머물렀던 Seatanbul 호스텔 창문에서 보는 술탄아흐멧 사원이 더 평화롭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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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바티칸 박물관 (0) | 2020.10.09 |
20180126-1 터키 - 이스탄불: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하기아 소피아
고난의 버스이동 끝에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이스탄불 사비하 궥첸공항으로 향하는
페가수스 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천에서 태국이 6시간정도 걸리는걸 감안하면 진짜 가까운 거리다.
짐찾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이 공항이 지하철로 도시와 연결되 있지 않아서 친절하게도 나의 터키인 친구인 자난이 공항으로 나와주었다ㅠ
사비하 궥첸 공항에서 버스로 시내로 들어가는데는 시간이 40분정도 걸렸던것 같다.
이스칸데르 케밥을 먹었다.
이날 밥을 먹지 못한터라 자난이 다 못먹겠다고해서 그거까지 다먹었다. 꺼억~ ㅋㅋㅋ
아무튼 지하철역에서 내리고 근처 환전소로 가서 고국에서 가져온 달러를 점원에게 주었더니
'노 유로?'라고 대답하더니 없다고하자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리라화로 환전을 해줬다.
유럽이랑 경제가 가까워서 그런지 유로화를 선호하다보다.
환전을 하고 나오는데 귀신같이 잘생긴 청년이 나한테 담배있냐고해서 없다고 하니까 곧바로
자기도 여행자라고 말을 건다. 2초만에 탐지 완료.. 난 너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그냥 여행 잘하라고하고 트램을 타러갔다.
트램을 타고 술탄아흐멧 광장근처 예약된 호스텔로 갔는데 간판이 없어서 같은 블록을 다섯번 뺑뺑이를 돌았다
제길슨....
자난에게 부탁해서 호스텔 스탭이 앞으로 나와주어서 들어갈수 있었다.
특이한게 이 사람도 내 이름 마지막글자와 같았다. 재밌었다.
여기 호스텔은 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도미토리 객실에 한국분이 한분 있었는데 그분도 이스탄불에 오기전에 스페인을 여행했다고 해서 즐겁게 이야길했다.
너무 피곤해서 이날은 야경촬영을 안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짐을 빼서 4일간 예약한 호스텔로 짐을 옮겼다. 위치는 큐축아야소피아 사원 근처로 잡았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추후 뷰를 올리겠음)
짐만 맡기고 술탄아흐멧 광장으로 가서 자난을 만났다.
이스탄불 박물관 카드를 샀는데 사실 가격은 해마다 달라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여기 올려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스핑크스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너무 귀여웠다;;;
기원전 9세기에 히타이트 문명에서 만든 스핑크스이다.
몇 년전 국내모방송에서 바빌론문명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위대한 바빌론'을 방영한 적이 있다.
3D로 되살린 찬란했던 바빌론 문명의 모습과 아름다운 배경음악때문에 감명깊게 본 기억이 있다.
아직까지도 화려한 색상과 완성도는 감동적이었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빌론 문명은 그 흔적조차 희미하고
바빌론 문명의 후예인 민족이 당면한 혼란으로 인해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여 소개할 상황이 못되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는 돈을 쓰는 만큼 연구가 되는 것인데 예산은 커녕 전쟁도 수습하지 못한 이라크로선 먼나라 일일 것이다.
과거 이집트 처럼 현대 이라크인들도 자신들이 바빌로니아 왕국의 후예라는 인식은 있지만 너무 오래전일이고
제대로 연구도 안됐기 때문에 내가 보기엔 그들은 아랍인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리스 인들도 오스만 제국때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생각했고 굳이 고대 그리스와 자신들을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한민족도 조선시대에 삼국시대 고구려의 요동정벌에 대한 계승의식은 있었지만 현대 한국인들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 어딜 가장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다 발굴작업을 하고 옛 유산을 보존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지금과 같은 정체성이 만들어 진 것이다.
멋있기는 사자가 멋있지만 오른쪽 상단에 있는 용(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용맞다)은
바빌로니아 유적 발굴 현장에서 몇점 나오지 않은 것이니 더 진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가는 중에 오른쪽에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잔했다.
사진은 보시는 바와 같이 비잔틴 제국시대 석관들이 놓여있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는 십자군의 약탈,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방대한 유물이
남아있어 나를 감탄하게 했다.
왼쪽부터 토르소, 니케 여신상, 아르테미스 여신상 등이다.
이 청동 뱀 머리는 원래 히포드롬에 있던 뱀기둥의 일부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폴란드 대사가 술에 취해 머리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청동뱀의 아랫턱은 분실된 뒤로 발견되지 않았다.
카렌데르하네 이슬람 사원이 '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성당'일 당시에 남아있던 모자이크를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안쪽에 깃털모양 부조가 너무 디테일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가족 묘지에서 출토된 부조들이다.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때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학자인 동시에 건축가였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에 의해 건축되었다.
수차례의 화재, 지진, 파괴 등에 시달렸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3번째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이다. 이때 돔은 반구형 돔으로 새로 지어지게 된다.
13세기 초에 4자 십자군에게 3일간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는 약탈당하게 된다. 무차별 학살은 수천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수녀들을 포함한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대주교가 서는 연단에는 매춘부를 세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했다. 귀중한 성유물들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한 예술품들이 약탈당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직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한 가운데 제국의 부활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메흐메트 2세의 항복권유를 거절하며 이야기한다.
"이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으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의지로 죽을 것"이라고....
그 해 5월 23일 지원을 요청한 베네치아의 함대가 출발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함에 휩싸인 비잔틴 제국의 의원들은 황제에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갈 것을 간청하지만 황제는 자신 스스로도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제국의 신민들과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고 거절한다.
5월 28일 포위당한 콘스탄티노플 성안 곳곳에서는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성인들의 이콘을 든 신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의 맨 앞에는 바로 유일무이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가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로마제국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기적이 다시 이뤄지길 기도했다. 신앙의 힘은 그렇게 대단했다.
황제는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무례하게 대했던 적이 있었다면 미안하다며 자신은 도시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죽을 생각이며 "그대들은 그리스와 로마영웅들의 후손들이며 조상들과 같은 용기를 보여줄것"이라며 "오늘부터 라틴인
과 로마인(그리스인)은 같은 민족이며 신에 의해 연합되었으며 그가 도시를 지켜 줄것" 이라고 이야기한다. 불과 200년
전에 콘스탄티노플을 망가뜨린 라틴인들을 황제는 끌어안았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정교회 미사가 거행되었다. 도시에 남은 정교회 사제들과 가톨릭 사제들이 함께
미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했다. 최소한 하기아 소피아에서 동서교회통합은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주 예수에게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도시를 상대로 총공격을 감행한다.
7000명의 동로마와 서유럽의 병사들은 결국 15만명의 오스만 군대의 숫자를 이겨낼 수 없었다.
황제는 몇 남지 않은 친위대와 함께 이교도 군대의 인파속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53일만에 로마제국은 황제의 죽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도시를 정복한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하기아 소피아로 들어갔다.
1000년동안 하느님의 집이었던 이 곳에서 이슬람 예배가 거행되게 된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두려움에 떨던 비잔틴제국의 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엔 이야기가 엇갈리는데 그리스에선 모두 오스만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하고,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터키에선
황제가 이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두 나라가 주장하는 바가 너무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하기아 소피아와 도시에 남아있던 비잔틴인들이 모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제국의 황실 모스크가 되었고 메흐메트 2세의 개인재산으로 소유가 변경된다.
터키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메흐메트 2세가 정교회에게서 하기아 소피아를 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이슬람군대가 도시를 점령했을때 교회건물을 모스크로 개조하는건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었다.
확실히 함락 당시엔 대부분의 정교회 성당이 동로마 유민들에게 남겨졌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성당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모스크로 개조해 나갔다.
이스탄불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을 로마황제라는 뜻의 'Kayser-i Rum'이란 호칭으로 자신을 칭했다.
물론 이 칭호는 신성로마제국,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주장하는 제3의 로마와 함께 서유럽에서 외면당했다.
하기아 소피아도 서유럽에서 점차 잊혀졌다.
오스만 제국하에서 이슬람 사원이 된 하기아 소피아엔 이슬람 미나렛(첨탑) 4개가 추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하기아 소피아가 이슬람 사람으로 개조되고 처음부터 모든 모자이크가 석고
회칠로 덮인게 아니었다. 슐레이만 대제가 몇몇개의 모자이크를 석고로 덮었을 뿐이다.
나머지 모자이크는 이슬람 사원의 노동자들에 의해 몰래 하나둘씩 뽑혀서 부적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남은 모자이크들 마저 1894년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지금 현존하는 모자이크들은 하프돔이나 높은 곳에 위치해서 노동자들의 손이 닿지않았고 동시에 술탄들도 굳이 없애고
싶지 않아서 남겨뒀거나 위에서 이야기한 석고 회칠때문에 노동자들이 잡아뜯어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중앙 하프돔의 테오토코스 모자이크나 3층에 있는 대주교들의 모자이크가 제거되지 않은 이유는 오스만 제국 술탄
자신들만이 알겠지만 이슬람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정화라는 명목하에 모두 없앤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외는 두고 싶어했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독교를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류로 보고 있었고 장기적으로 조금씩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기독교를 섬멸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조된 몇몇의 이슬람 사원에서만 이런 보존이 이뤄졌고 대부분의 개조된 비잔틴 성당에선 기존의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가 깔끔하게 모두 사라졌다.
모스크로 개조된 몇몇 비잔틴 성당에만 일종의 승리의 증표로 몇뼘 크기의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가 남아있을 뿐이다.
동시에 16세기에 건축가 미마르 시난을 통해 버트레스를 추가해 건물의 수명을 늘린 것도 오스만 제국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하기아 소피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지했겠지만 어쨌든 오스만 제국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방치했다면 에페소스 유적지에 있는 성요한 성당같은 폐허 건축물이 하나 추가됐을 것이다.
1847년 하기아 소피아는 이탈리아-스위스 출신인 포사티 형제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게 된다.
이때 손상된 정교회 모자이크들은 스케치로 기록되었고 아쉽게도 대부분이 이슬람 장식으로 교체되었다.
석고로 덮혀있던 모자이크의 존재도 확인되었지만 보수작업후 다시 석고로 덮히게 되었다.
1935년 터키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더 이상 교회나 모스크가 아닌 평화의 상징으로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도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종교적 상징에서 기억의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박물관으로 거듭나면서 회칠안에 잠들어있던 전설의 모자이크 벽화들이 부활했다.
그렇게 하기아 소피아는 종교적 상징에서 기억의 장소로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때 존재하던 정교회 성당 중에서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고 여전히 성당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몇개인지 아는지 터키인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정확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1곳만이 그것도 무슬림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만한 작은 크기인 '몽골의 성모마리아 성당'만이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고 정교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하기아 소피아는 정교회 신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 가든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성전 혹은 대성당이 존재한다.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아니면 라테라노 대성당일 것이고,
프랑스는 노트르담 대성당, 우리 한국은 명동성당이 있다.
현대 그리스 내에도 역사적인 정교회 건축물들이 많지만 가장 으뜸가는 지위를 하기아 소피아를 위해 비워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용은 정교회인들의 민감한 감정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더구나 모스크 전용에 대해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제 2의 정복'이라고 떠들어댔으니 갈등이 더 커질만하다.
오스만 제국 술탄 압둘 하미트 2세도 이스탄불 정복 기념행사를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리스인들로부터 이스탄불을
점령했기 때문에 기념식 자체가 그리스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며 반대한 것에 비교하면 개방성 면에선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어떤 무슬림들은 스페인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한 것을 예를 들며 너희부터
돌아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가 이슬람에서 정교회의 하기아 소피아와 같은 지위를
가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보다 이슬람의 카바, 가톨릭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비교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중세에 서유럽 왕국이 카바를 점령하고 가톨릭 대성당으로 개조한다면?
이슬람 교도들은 자신들 신앙의 고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와닿지 않는다면 바티칸을 힌두교 세력(그냥 가정이다)이 정복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의 장식을 힌두교 식으로 대거
바꾸고 교황은 로마 성밖 작은 교회 하나 주고 교황청으로 쓰라고 한다면?
아나톨리아를 정복한지 600년이나 되었지만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보면 아직도 문화적인 침략자 속성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 같다. 자난처럼 터키 고유의 문화와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문화적 유산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터키인들에겐 정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 앞뜰엔 십자가 부조가 조각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예수 그리스도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 좌우에 있는 메달리온은 왼쪽이 성모님이고 오른쪽이 대천사이다.
이 모자이크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일 당시 석고로 덮여있었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을 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성당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면 돔 부분은 그리스도의 눈을 상징한다.
한때는 이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모자이크가 돔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성당 건축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건축 형태에서 중앙 집중식 크로스돔 형태로 발전했다.
19세기 복원과정에서 예수의 모자이크가 사라지고 이슬람 서예로 대체되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얼마나 웅장했을지 상상이 안간다.
이보다 작은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에서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프레스코화를 본적이 있는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은 감동에 놀란 기억이 있다.
위 사진은 복원 상상도라서 실제 모자이크는 이보다 훨씬 웅장했을 것이다.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에서 성당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느님 나라를 현세에서 구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 최신기술과 자원들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종교건물뿐만 아니라 황제의 대관식등 국가행사 용도도 겸했다.
동로마 제국이 강성했을때는 황제가 매주 하기아 소피아에 방문할때마다 사제들에게 45kg나 되는 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제국의 열악한 사정으로 인해 사제들에게 줄 기부금이 없었기 때문에 1년에 6번만
방문했다고 한다.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에 쓰이던 민바르로 이슬람 이맘이 설교를 하는 단상이다.
16세기 무라드 3세때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앱스 아래 하프돔에 테오토코스 모자이크가 장식되어있다.
말은 하프돔이지만 왠만한 교회 앱스 규모 수준이었다.
성상파괴운동 이후 성화의 제작이 다시 허용되면서 867년에 바실리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메흐메트 2세의 정복후에도 이 모자이크는 회칠로 덮혀지지 않았다.
성모님이 아기 예수와 함께 옥좌에 앉아있는 성화이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남아있는 모자이크 중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이다.
이 조명은 모스크로 사용될때 추가된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채광이 다소 부족한 곳이 많은데 이슬람사원은 항상 환하게 조명이 배치되어 있다.
술탄 마흐무드 1세의 도서관이 금색 청동 그릴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 때는 이 곳에 지금은 술레이마니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5000개의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가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인데 바닥의 돌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알 수 있다.
2층에서 본 앱스 부분이 다른 성당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웅대했다.
오른쪽에 있는 세라핌 부분은 복원때 새로 그려넣은 것이다.
다만 원래 있던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때 살아남은 유일한 모자이크이다.
2층에 있는 대리석문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만져댔는지 가운데 부분이 까맣게 때가 탔다.
시노드 때 사제들이 이 문을 통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제 이 문을 넘어가면 남쪽 갤러리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2층 남쪽 갤러리의 90%는 1850년 이후에 전부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2층에서 3개의 모자이크가 살아남았다.
13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성상 파괴운동 이후에 다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왼쪽에 있는 창문때문에 수세기동안 빛이 들어와 왼쪽 성모님의 모자이크는 손상되었다고 한다.
왼쪽 성모님과 오른쪽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간을 구원할 것을 청하고 있다.
17세기에 석고로 덮혀졌다.
이 모자이크가 훼손이 심한 이유는 19세기 복원작업때 복원사들이 도착하기전에 작업자들이
벽의 크랙을 조사하려고 석고로 덮힌 패널의 일부를 벗겼을때 세례 요한 모자이크의 절반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디시스 모자이크가 장식되기 전에는 황제나 대주교의 모자이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 좌우로 요한네스 2세, 이레네 황후가 표현되어 있다.
왼쪽의 요한네스 2세의 얼굴부분, 특히 오른쪽 눈 부분은 의도적으로 손상되었다.
오른쪽의 이레네 황후의 눈부분이 손상되었고 가운데 아기예수의 오른쪽 눈 일부와 입 부분이 손상되었다.
술탄 압둘 메지드가 포사티 형제가 발견한 금색 모자이크를 보자 이들이 거액을 들여 모자이크를 새로 만든줄 알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모자이크가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이런 아름다운 모자이크들을
숨긴 그의 조상들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포사티 형제가 발견한 모자이크들은 다시 석고로 덮혀졌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와 예수 그리스도, 조에 황후이다.
황제는 금화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있고 조에 황후는 황실의 기부금 목록이 적힌 두루마기를 바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모자이크는 조에 황후의 전 남편의 모자이크를 지우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메달리온은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보수작업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서예가 카자스케르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의 작품이다. 직경 7.5미터로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와같은 메달리온이 총 8개가 하기아 소피아에 설치되 있으며 각각 알라, 선지자 모하메드, 4명의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그리고 모하메드의 손자인 하산, 후세인의 이름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위 사진의 글자는 후세인이다.
선지자 모하메드의 이름이 아랍어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몰랐는데 자난이 아랍어 글자를 조금 안다고해서 알려주었다.
십자가 모양 장식이 있었던 자리가 뽑혀있었다.
예전에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화를 찬성하는 터키인이 나에게 말하길 하기아 소피아에게 박물관이란
명칭이 맞지 않다고 하면서 그냥 건축물일 뿐이고 안엔 전시물도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작은 흔적 하나하나가 이곳이 박물관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면서 그것도 옛날 말이 됐지만.....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자세히 살펴보시길 추천한다.
여기 있는 대리석과 기둥, 모자이크 하나 하나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모스크로 사용됐던 시기에 채색된 천장이다.
정교회 성당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장식과 이슬람 사원일때 만들어진 장식은 때론 구분이 확실하지만 어떨땐 서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자난이 정교회 장식도 좋지만 이슬람 장식도 나쁘지 않다고 했던게 기억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겸손함이 느껴져서 지금도 오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된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기준으로 하는 자치제도인 딤미 제도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기존의 로마제국에서 정교회 조직으로 통치주체가 이관되었다.
이는 스페인이 과거 지배세력이었던 무슬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던 것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에 비하면 인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따져들어가면 그리스인들은 말을 탈 수 없었으며, 정교회 건물은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지을수가 없었고
정교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이슬람교도가 정교회로 개종하는건 금지되었다.
제국 말기에 딤미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그리스인이 오스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무슬림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터키인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당장의 혼란을 피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제도였지만 결국 전쟁으로 끝났다.
분할통치 제도아래서 결국 터키인들과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제국 신민으로 융화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유스티아누스 1세, 성모님, 아기 예수, 콘스탄티누스 1세이다.
유스티아누스 1세는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님에게 봉헌하고 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성모님에게 봉헌하고 있다.
자난이 나오면서 나에게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 기도를 했냐고 물어보았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고 그게 맞는것 같다고 했다. 그게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의 취지를 존중하는 길이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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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년에서 306년 사이에 지어진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으로 현재는 성당과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여기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인데 두번의 로마 방문에도 가지 못했다.
세 번째에는 무조건 갈 것이다.
1588년에 만들어진 펠릭스 분수라고 한다.
한인교회 무엇? 로만 카톨릭이 아니라 로마 한인교회!
1644년에 지어진 성당이다.
부지가 한정되서 최대한 공간을 살려 건축됐다고 한다.
바로크 예술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 의해 지어진 성당이다.
퀴리날레 오벨리스크는 1세기 도미티아누스 황제때 이집트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이탈리아 대통령 공식관저인 퀴리날레 궁이다.
15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여름별장으로 만들어졌다.
헌법 재판소이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 중의 하나인 나보나 광장으로 원래 이 곳엔 도티미아누스 경기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곳에선 Capitoline Agone라는 체육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과 같은 종목(이후에 다른 종목이 추가됨)으로 4년에 한번씩 치뤄졌다고 한다.
눈을 감고 그리스식 토가를 입고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여기 근처에 있던 레스토랑이 너무 관광객 대상스럽다고들 하는데 사실 다 맛있고
간혹 파스타하나에 3만원받는 이상한 레스토랑(밀라노에서 발견)만 아니면 다 좋다.
서기 86년에 지어진 건물로 무려 5세기까지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벽돌로 지어진 최초의 스포츠 건물이다.
16세기에 다음과 같이 경기장 부분을 허물고 건물을 지었다.
경기장은 없어졌지만 이 곳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광장의 형태가 잘 말해준다.
진짜 로마는 지하에 있다는 이야기처럼 도미티아누스 경기장도 지하유구는 살아있다.
2014년 나보나 광장 지하에 도미티아누스 지하유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티켓 가격은 8.5유로라고 한다.(2020년 기준)
아쉽게도 두 번째 방문에도 시간상의 이유로 가지 못해서 세 번째 방문땐 꼭 가보고 싶다.
말로만 듣던 콜로세움인데 아쉽게도 시간이 늦어 들어가지 못했지만 나중에 가기로 했다.
여기 근처에 흑인 팔찌 사기꾼이 있었는데 어떻게 귀신같이 한국사람인걸 알아보고 안녕하세요 하면서
쫓아오길래 빠른 걸음으로 자릴 피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업적들이 장식되어 있다.
포로 로마노도 관람시간이 끝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옆에 대욕장 유구를 보러가기로 했다.
Colle Oppio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렇게 보존이 잘 된 구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트라야누스 대욕장 유적으로 서기 2세기초에 완성되었다.
중세엔 매장지로 사용되었는데 1960년대 발굴조사에서 천 구 이상의 유해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원래 트라야누스 대욕장이 있었던 구역과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여긴 참고로 공원에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라 입장료가 없다.
4세기에 지어진 성당인데 이 곳에서 1차 니케아 공의회의 준비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지금 현존하는 성당은 18세기에 재건됐지만 옛 성당에서 많은 부분을 재사용했다고 한다.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뜻을 지닌 이 곳은 성 베드로 사도를 묶었던 쇠사슬을 보관하기위해
지은 성당으로 470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성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묶였던 쇠사슬과 로마에서 쓰인 쇠사슬을 같이 두었는데
하나로 붙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구조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5세기에 지어진 앱스 부분은 그대로이다.
가끔 티켓을 사야한다고 접근하는 사기꾼이 있나보다.
이탈리아에 있는 성당 대부분은 무료지만 성당에서 운영하고 있는 박물관이나
지하유적, 카타콤베등은 엄연히 입장료가 있으니 오해하고 싸우면 안된다!;;;
천장은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바실리카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갠적인 취향으로 두개를 꼽자면 이탈리아에 있는 성당이랑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을
가장 좋아하고 앞으로도 두 나라의 성당을 더 가보고 싶다.
율리우스 2세의 무덤으로 가운데 모세의 조각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원래 미켈란젤로가 의도했던 조각 배치는 이와 달랐지만 4번째 디자인이 바뀐끝에
이와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우연히 들른 성당에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발견하는 기적이 이탈리아에선 가능하다.
포로 디 아우구스투스로 다른 로마 포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로 건설되었다.
원랜 이러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로마 유적지를 가면 이와 같이 원래 모습을 표현한 복원도를 패널로 설치해서 비교해볼 수 있게끔 했다.
솔직히 미리 알아보거나 그때그때 구글검색을 하지 않으면 이런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옛날 기둥이고
고대 그리스 유적도 돌덩이만 보고와서 지겹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모습과 옛 모습을 비교하면서 과거의 영화를 상상해봐야 고대 유적을 만끽하는 것 아닐까?
아우구스투스 포럼에서 왼쪽 가장 자리로가면 이렇게 무료로 진입할 수 있는
구간이 있어서 트라이야누스 시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출처: 구글맵)
들어가면 데크가 있어서 이와같이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펜스로 분리되 있어서 내려갈 순 없었다.
트라이야누스 시장 내부는 티켓을 사서 들어 갈 수 있다.
우측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쇼핑몰인 트라야누스 시장 유적이다.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는 열주가 이 부분이다.
원랜 아래 그림과 같이 수많은 열주가 파사드를 양쪽에 서있었겠지만
이 처럼 두개의 열주만 남아있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겨우 두개만 남은 열주도 작년 2019년에
보수작업을 한듯하다 ;;
9세기에는 위와 같이 옛 포럼 구역안에 민가가 지어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열주 윗부분의
벽을 구성하던 석재들이 건축자재로 쓰여지게 된다 ;;
위의 복원도와 같은 방향에서 찍은 사진인데 보시다시피 옛 가옥의 유구와
벽들을 빼면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로마에 있는 다섯개의 포럼 중 가장 남아있는게 없는 포럼이다.
사실 로마라는 도시가 겪었던 고난에 비하면 지금 이렇게 유적이 남아있는 것도 기적일 것이다.
포로 디 트라이아노는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포럼을 짓는데 기존에 있던 언덕을 굴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포로 디 트라이아노의 원래 모습인데 열주는 지금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저 앞 중앙에 안토니우스 파우스티나 신전이 보인다.
나중에 포로 로마노를 가봤던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면 역시 티켓을 사서 들어가서 관람하는게
가장 좋지만 시간상이나 예산의 문제로 볼 수 없다면 밖에서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표를 사서 들어가고 안들어가고가 중요한게 아니고 고대 로마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멀리서봐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고 별로 관심이 없고 취향이 아예 안맞는다면 그냥 돌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1585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1935년에 완성된 건축물로 페르가몬의 신전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성모의 원주로 네 명의 조각상은 각각 모세, 이사야, 다윗, 에스겔이다.
스페인 광장인데 너무 대중적인 곳이라 간단하게 사진만 찍고 지나갔다.
계단위에 삼위일체 성당과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판테온의 외관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비해 아주 투박해보였다.
단순히 중세건물의 오래된 느낌이 아닌 여기저기 뜯겨나간 자국과 땜질 자국 투성이었다.
판테온은 온갖 재난과 풍화를 이겨내고 우뚝선 승리자인 것이다.
원랜 지붕이 청동으로 덮여있었는데 다른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떼어졌다고 한다.
이 곳은 무료입장이 가능했지만 2018년 중반부터 3유로의 입장료를 받았지만 2018년 12월에 기해
다시 입장료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겨울에 로마를 여행할때 단점이 거의 모든 관광지가 일찍 문을 닫는다는건데
판테온은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열려있으니 저녁시간을 활용하기에 매우 좋다🙂
판테온의 천장으로 이 사진이 내 티스토리 계정 프로필 사진이다 ㅋㅋ
판테온에 들어가본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건물 전체에 마력이 뿜어져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건축물이 지닌 고요한 마력은 관람객들을 경외감에 휩싸이게 할 것이다.
트라이야누스 시장은 원랜 이런 모습으로 추정되는데 보존이 아주 잘된 편에 속한다.
트라이아누스 황제 때 건설된 포럼으로 로마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졌다.
산 비탈레 성당으로 라벤나에 있는 산 비탈레 성당과 같은 이름이다.
비탈레 성인의 아들인 제르바시오 성인과 프로타시오 성인에게
헌정된 성당이다.
4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로마건축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특히
복원된 현관은 초기 그리스도교 양식을 따르고 있는 아주 중요한 성당이다.
아침에 본 디아클레티아누스 대욕장이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면서 호스텔에 짐을 맡겨놔서 찾으러갔다.
갔더니 무슨 오전안에 짐을 찾지 않아서 돈을 내야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선 저녁에 찾아도 돈 내라고 하는 경우가 없어서 황당했지만
정책이라면 따를 생각이 있지만 짐맡길때는 고지를 안해줬기 때문에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더니 그냥 짐을 내어줬다.
짐을 찾은뒤 호스텔 근처 식당에서 Gnocchi를 주문해서 먹었다.
밤에 로마에서 밀라노 말펜자 국제공항까지 Flix 버스를 타고 갔는데
16시간의 장거리라 San Benedetto라는 곳의 역앞에서
환승을 위해 새벽 3시에 3시간 50분을 대기했는데 추워서 죽을 뻔 했다.
로마에서부터 같이온 승객은 나폴리에서 왔다는 이탈리아 사람 2명이 있었는데 영어가 전혀 안통해서
서로 바디랭귀지로 소통했다.
역이라도 열려있음 좋았으련만 잠겨있어서 거의 4시간동안 갈데도 없고 앉아서 잠들면 골로갈것같아
동물원의 북극곰처럼 역에서 끝에서부터 끝까지 왔다갔다하며 정형운동을 했다.
북극곰은 우울증걸리면 저런다던데....;
그외 기억에 남는건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내 앞에 오더니 F사운드가 들어간 '포마'라는 말만 했다.
내가 관심을 안보이자 같이있었던 나폴리 사람들한테 포마를 반복했는데 나폴리 사람들이 포마 어쩌고하면서
소리를 지르니까 다른 곳으로 갔다. 이거 뭐지? ㅋㅋㅋㅋㅋㅋ
나폴리사람이 구글번역기에 입력해줬는데 Madness라고 번역되었다 ㅋㅋㅋㅋㅋㅋ
버스가 오기 2시간 전 정도 됐을까? 사진 오른편에 바가 하나 있는데 거의 한 새벽 5시쯤에
가게에 불이 켜졌을때 동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가게를 열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2세인지 어느나라 출신인지도 알수 없지만
너무 씩씩하고 젠틀해보였고 동네사람들이랑 친한것 같았다.
이후에도 이탈리아에서 동양인들을 식당등에서 본적이 있지만 나도 그사람들이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본 적이 없고 공교롭게도 그 사람들도 내가 어디서 왔냐고 묻지 않았다.
요즘은 이민자들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실례이기도하고 이탈리아 사회 자체가 동양인을 봐도
굳이 이상하지 않은 문화같기도 하다.
공항에 도착해서 고맙다는 이야길했다.
짧은 인연이라도 헤어지는 순간은 항상 아쉽다. 그래도 우리가 건강하게 잘 여행하는게 젤 중요한거다.
터키행 페가수스 에어 항공편 수속을 하러 발길을 옮겼다.
자신의 업무시간을 조정하면서까지 가이드를 해준 밀레나에게 너무 고맙다.
언젠가 밀레나가 한국에 오게되면 최선을 다해 보답하고 싶다🙂
드디어 이탈리아 포스팅이 모두 끝났다.
난 올해안에 못끌낼줄 알았는데....;
다음 포스팅부터는 터키 여행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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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바티칸 박물관
피렌체 여행이 끝나고 이제 로마로 이동을 해야한다.
전날에 볼로냐에서 피렌체로 이동할때 기차를 놓치는 삽질을 한 적이 있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피렌체 중앙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보시는 것처럼 플랫폼이 확정되지 않을때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되고 공교롭게도 플랫폼이 변경되서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
집중력을 발휘해서 정상적으로 탑승에 성공했다.
이딸로 기차를 탔는데 와이파이도 되고 고속철도라 빠르고 편하게 갔다.
예약한 숙소인 호스텔 뷰티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미토리로 예약했는데 가보니 도미토리가 꽉 차있는 것이었다.
스태프가 예약안하고 누워있는 사람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못찾아냈다.
아마 숙박객 관리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같다.
갠적으로 이런 상황은 정말 당혹스럽다.
가끔 여행 중에 이런 일이 생기지만 나는 돈 환불해준다고하면 절대 싫다고 한다.
당일날 내가 다른데 숙소를 즉석에서 체크인을 하면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정히 객실이 없으면 1층에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는 한이 있어도 내 의지론 안떠난 다는 원칙이 있다.
안타깝게도 로마에 작년말에 재방문했을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로마랑 나랑 안맞는지 이런 징크스가 생긴다.
해답은 비싼 숙소에 묵으면 숙박객 관리도 잘 될테니 돈을 쓰면 될것 같다😂😂
여러분 억울하면 힐튼갑시다 ㅎㅎ
스태프도 이런 상황에 빡친것같아 보였는데 방법이 없자 3인실에서 혼자 지낼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앗싸~를 외치고 싶었는데 표정관리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ㅋㅋㅋㅋ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바티칸으로 걸어 갔다.
원랜 로마에서 이틀을 있는 걸로 스케줄을 잡았는데 터키행 페가수스 항공편이 취소되서 환불하거나
하루 일찍 터키로 가는걸로 변경하라고해서 울며겨자먹기로 일정을 이틀에서 하루로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날은 교황성하께서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날이어서 이를 보러온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바티칸 박물관을 보러가야하는 목적이 있으니 아쉽지만 자리를 떴다.
여기 들어오는데 30분넘게 기다렸는데 나중에 안 사실인데 Ottaviano역에서 내리면
금방 바티칸이니 미술관 대기줄 외엔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익스프레스 티켓으로 예매해서 빨리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용하지 않았지만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있었다.
근데 '한국어'의 '어'가 꼭 폰트를 다른걸 쓴것 같잖아?
이거 어떻게 된거죠? 라고 하고싶지만 사실 제공되는거 자체로 고마운 일이라 뭐라 하고싶지 않다 ㅠ
사실 이 전시실은 많이들 지나치는 전시실이지만 나는 모자이크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 괜찮았다.
더구나 관람객들도 몇명 되지않아서 너무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카라칼라 대욕장의 공공도서관 바닥에 있던 모자이크이다.
고대 로마시대 운동선수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실존했던 선수들의 얼굴을 모델로 해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아벤티노 언덕에 있던 빌라의 식당 바닥에 있던 모자이크이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진귀한 모자이크 작품으로 연회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표현했다고 한다.
군사원정을 떠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표현한 조각작품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양쪽엔 전쟁의 신인 미네르바와 마르스가 서있고 가장 왼쪽 상단엔
승리의 날개가 위치하고 있다.
얼굴만 바꿔서 철권같은 격투게임 표지로 써도 될 정도로 조각이 역동적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각이 있었다.
티베리우스... 고지식하다는점 빼면 겸손하고 결격사유가 없는 황제였는데
누구도 이 황제가 자기 아들이 독살당한일로 빡돌아서 수많은 귀족들을
도륙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황제에게 브레이크를 걸만한 장인, 친동생까지 각각 병이랑 사고로 죽어버렸으니...
여기서도 모자이크를 발견해서 너무 기뻤다.
아테나와 마르시아스 조각상인데 저분들이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이집트 관인데 나는 이때 이집트 유물을 처음본거라 모든게 놀라웠다.
나중에 토리노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에 가서 한번 더 놀랐지만...
살면서 나중에라도 이집트에 갈 계획이 전혀 없기 때문에 최대한 집중해서 보려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다.
팔각정원
메두사의 머리통을 들고있는 페르세우스 상
지도 갤러리였는데 고대 지도부터 코르시카 섬 지도까지 시대별로 여러 지도가 전시되어 있었다.
5시 방향에 파엔자를 발견했다! ㅋㅋ
아테네 학당 벽화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다들 알듯이 이들은 같은 시대에 활동하지 않았는데 연대에 관계없이 위대한 인물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갑자기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 자켓이 생각났다.
가운데 상단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름이 걸려있다.
사람들이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아껴야 하므로 그럴 시간이 없다...;
바티칸 미술관 정원 분수와 솔방울 조각상
사냥꾼의 상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상으로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헤르메스 조각상이며 4세기에 만들어진 그리스원작의 모사품이다.
우측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석상과 두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바티칸 미술관의 간판인 벨베데레의 토르소
헤라클레스 청동상
클라우디우스 황제상
라파엘로의 명작 '그리스도의 변모'이다.
주세페 모모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중나선계단이다.
근데 저 밑에 있는 사람은 날 보고 브이자를 하고 있는건가?
사진찍는데 집중해서 몰랐는데 알면 손이라도 흔들어 줄걸 그랬다 ;
1590년에 완성된 성 베드로 대성전이다.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위에 지어졌다.
이전에 1000년동안 사용한 같은 이름의 대성전은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오벨리스크는 칼리굴라 황제때 이집트에서 가져와서
네로경기장에서 쓰이다가 158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구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15세기 초부터 1609년까지 천천히 철거되었다고 한다.
천년도 넘게 사용한 탓에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어서 그 당시 기술론 보수작업을 해도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원래 성당은 이와같이 십자가 모양 바실리카 양식이었으며
초기 성당에서 주로 보이는 목조 트러스 구조도 보인다.
보시는 바와 같이 앱스 부분이 우리가 아는 로마시대 성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이 앞뒤로 길이가 길기 때문에 대성전 가까이로 가면 이렇게 돔이 보이지 않는다.
뒤쪽에 오벨리스크 훨씬 뒤로 가야 돔을 찍을 수 있다.
돔 바로 밑에 "TV ES PETRVS(너는 베드로다)"라는 성서구절이 보인다.
너무 큰 규모라 현장에선 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감격스러웠다. 건축감상하고 말고는 나중이고 바티칸에 온 자체가 의미가 있다.
구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평생 바티칸에 못가보는 사람도 있을텐데 내가 신앙심이 강한건 아니지만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완성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돔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사실 바티칸에서 시간을 꽤 많이 쓴건 사실이라 당시엔 로마를 더 볼걸 하는 생각을 안한건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잘 한 결정같다.
천장은 바로크 양식으로 표현되 있었다.
바티칸 위병들은 절대 말을 안하는줄 알았는데 한번은 길도 물어보니 잘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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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풀고 간단히 샤워만 하고 새벽 2시경에 야경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섰다.
나는 가능한한 밤의 모습과 낮의 모습을 다 카메라에 담으려고 한다.



산 로렌초 성당으로 역시 파사드 부분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으로 로마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팔각형 세례당의 디자인을 계승했다.





대충 둘러보고 바로 호스텔로 돌아왔다.
이제 몇시간 눈을 좀 붙이고 다시 아침에 나올 것이다.

내가 묵었던 오타비아니 호스텔 정문이다.
보기엔 평범한데 형광등이 고장나서 밤엔 귀신불같이 번쩍 거려서 심히 기괴했다.
이제 다시 혼자다.

새벽에 야경을 찍었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인데 아침에 보니 종탑이 보수공사 중이었다

내부는 다음과 같이 고딕 양식으로 디자인 되었다.

산 조반니 세례당 천국의 문 위에 있는 조각상인데 천사, 예수, 세례 요한 순이다.


조토의 종탑인데 총 12개의 종이 있다고 한다.

코닥 차양막을 단 기념품 가게에서 한국어 책자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관광지에서 파는 역사관련 서적을 사는 것을 선호하는데 위키피디아에
없는 디테일한 자료가 있어서 좋아하는 역사 관련 주제가 있다면 한번쯤
구입해도 유익할 것 같다.

바르젤로 국립박물관으로 방대한 조각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시뇨리아 광장으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공개처형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예술로 유명한 도시들을 볼때 사람들은 불쌍한 시민들이 착취당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보나롤라가 그 예술을 금지시켰을때 시민들이 반발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예술과 피렌체 시민들은 공생관계 였을거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베키오 궁전으로 영국 드라마 메디치에서 수없이 나온 그 건물이다.
15세기에 지어졌고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거주한 곳으로 유명하다.

피렌체 공작과 토스카나 대공으로 군림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동상이 서있었다.

구찌박물관인데 나는 명품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들어가진 않았다.

우피치 미술관의 야외 전시장이다.

우피치 미술관으로 미리 예약도 안했지만 여길 본다면 하루를 고스란히 다 써도 부족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피렌체의 명물 베키오 다리로 갔다.


베키오 다리 위엔 이렇게 보석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나같은 가난한 여행자한텐 좀 그렇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에 하나인 산타 펠리시타 성당의 역사는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4세기 시리아에서 온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그 당시의 흔적은 돌로 만들어진 비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후 10세기에 로마네스크, 14세기에 고딕교회로 다시 건축되었는데 18세기에 대대적으로 재건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다만 기둥, 카운터 파사드는 10세기, 14세기때부터 보존된 것이다.

현재의 내부 구조는 보시는 바와 같이 바로크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으로 1444년부터 메디치 가문이 소유했으나 가문이 몰락하고
당시 세력가였던 리카르디 가문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박물관은 메디치 가문의 회화를 전시하고 있는데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건물 규모가 커서 놀랐다.
피에로 데 메디치가 샤를 8세한테 닥치고 항복했을때 궁전이 약탈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곳일수록 다시 사들여서 콜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곳들이 많은 것 같다.

13세기에 지어진 성 펠릭스 성당은 2차대전 때 유대인을 6개월간 보호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르시아노 전투와 스카나갈로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여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가 세운 기둥이다.

로마로 오가는 순례자와 여행자들의 숙소와 병원을 제공하던 성당이었다.
몰타 기사단의 후원을 받아 지어졌다고 한다.
이 곳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오가 그린 유명한 성화가 있는데 우피치 미술관으로 옮겨져서 전시 중이라고 한다😂
그래도 나머지 성화들도 한번쯤 둘러볼만한 가치가 있는 듯 하다.
사실 대부분 여행자들은 메이저 바실리카와 마이너 바실리카, 아니면 주교좌 성당을 선호하지만
그외 성당들도 충분히 역사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여행 전에 관심이 있는 성당을 검색해서
스케줄에 적절하게 혼합하는게 좋은 것 같다.

1331년에 지어졌으며 피렌체 성곽 최남단에 지어진 문이다.
'로마의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문이 각각 로마와 비아 로마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미 허물어진 부분도 있으나 보존된 성곽은 아주 잘 관리되고 있었다.
문화재 보존에 있어서 갓탈리아는 우리가 걱정할 입장이 아니시다 ㅋㅋㅋㅋ

발닿는대로 가보니 피렌체 미술전문학교로 가는 길이 나왔다.

나는 미술에 재능이 없지만 만약에 유학을 한다면 피렌체는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관광도시라 체류하기에 돈도 많이 들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로마제국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평범한 소도시가 된 곳,
반면에 유적지는 대부분 소실된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좋겠다.
그런 곳에서 살면서 우연히 로마시대 잔해같은걸 발견하면 그게 행복이 아닐까 싶다 ㅋㅋ


1571년에 건설된 산타 트리니타 다리인데 2차대전 당시 퇴각하는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피렌체의 레푸블리카 광장은 원래 로마 포럼이 있던 장소이다.
내가 방문한지 4개월 후에 이 곳에서 로마 시대 유구가 조사되었다고 한다.

본래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금 레푸블리카 광장 아래 이 건물의 유구들이 잠들어 있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1436년에 완공된 도시의 랜드마크이다.
줄이 길게 늘어서있어 여기 들어가면 피렌체 관광을 여기에만 올인해야 될것 같아
들어가진 않았다.
이탈리아 고딕 건축양식으로 분류되는 건축물인데 고딕 양식에서 높이를 자제하고
이전 시대 이탈리아 반도에서 보여진 고전적인 건축양식 요소를 도입한 경향을 보인다.

내부는 보시는 바와 같이 고딕 양식이다.


내부구조는 르네상스 양식이지만 역시 고전적인 이탈리아 건축문법을 따르고 있다.

산 로렌초 성당으로 메디치 가문에서 자금을 지원해서 건설하여 1470년에 완성된 성당이다.
메디치 가문의 주요 구성원들이 이 곳에 묻혔다.

르네상스 건축물이지만 기둥과 양쪽 통로는 고전적으로 디자인 되었다.

산 로렌초 성당은 입장료를 받아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성당 회랑은 무료라서 간단하게 사진을 찍고 갔다.

이탈리아식 성형요새로 일본 하코다테에 있는 고료카쿠에 갔던 생각이 나서 일부러 들렀다.
16세기에 메디치 가문에 의해 지어진 요새로 14세기에 완성된 요새를 허물고 건축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관광지는 아니고 패션쇼장으로 사용 중이다.

모양은 다음과 같이 오각형의 성형요새 모습을 하고 있다.

혹시나 싶어서 입장을 시도해봤지만 패션쇼 준비 스탭들외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해자 아래 14세기에 지어진 해자의 유구가 묻혀있다.

파엔자 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인데 예전엔 문루였으나 개조되어 지금은 성벽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성벽 중앙에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붙어 있다.
파엔자랑 이어진다는 뜻에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기둥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암만 찾아봐도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

15세기에 지어진 성당으로 현재의 모습은 16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산타 크로체 광장에 있는 안텔라 궁전이라는 곳인데 건물 외벽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1620년에 완성한 것인데 단 20일 만에 작업이 끝났다고 한다.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피렌체를 대표하는 성당중 하나이다.
바실리카 마이너 지위가 부여되었다.

내부는 여러가지 양식이 뒤섞여 있으나 중앙 예배당은 고딕양식이지만
양쪽 갤러리는 고딕양식을 최대한 자제했다고 한다.



피렌체 국립도서관 건물인데 1935년에 완성되었다.

피렌체 성곽의 망루였던 산 니콜로 문루가 보였다.

과거엔 이렇게 피렌체 성곽과 이어져 있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가면 이렇게 피렌체의 풍경이 한 눈에 보인다.
두오모 같은 건물은 밑에선 너무 커서 제대로 안보이는데 멀리서 봐야 이렇게 잘 보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여기선 두오모의 형태를 잘 감상할 수 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기아 소피아와 더불어 서양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시도로스와 안시미오스가 하기아 소피아로, 미마르 시난이 셀리미예 모스크로
각각 최대의 돔을 구현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것처럼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 건축물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돔을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다.


1320년에 지어진 문이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와서 젤라또 가게에 들렀다.

음 역시 맛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식으로 실망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ㅎㅎ

토르나부오니 거리로 고급 부띠끄샵들이 즐비하다.
여기있는 건물들도 전부 14세기와 15세기에 귀족들과 부호들의 저택으로 지어진 곳들이다.
어느덧 어둑어둑 해졌는데 겨울엔 이래서 안 좋다 ㅠ

여행자들이 갈만한 레스토랑에서 저렴한 까르보나라를 시켜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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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도 전날 맥주를 한잔해서 기분좋게 푹 자고 일어났다.
어느덧 이탈리아 북부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산 마리노 공화국은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도시국가들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국가이다.
산 마리노를 알게된건 밀레나와 채팅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였다.
이탈리아 한가운데 이런 작은 나라가 있다는걸 알게된 나는
진짜로 그런 나라가 있냐고 되물었던 것 같다.
산 마리노 공화국의 시초는 2세기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이 곳에
마리노 성인이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나라이며 이 곳의 정치인들은 특권이 없고
본업이 따로 있다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인구대비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이 산 마리노 공화국이라고 한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 13일까지 2.5단계 조치가 1주일 더 연장되었다.
언제 끝날지 감도 안 잡힌다...
난 이제 여행기로 다시 돌아가서 현실도피를 하려고 한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하시기를.....🙂
마지막 날이라 내가 묵었던 에어비앤비 방을 찍어봤다.
너무 편하게 지냈던 곳이었다.
부엌도 찍어봤다. 어제 로마에서 온 친구들과 대화를 했던 곳이다 ㅋㅋ
에어비앤비 근처인데 이 포인트로 3일간 밀레나가 나를 데리러 왔었다 ㅠ
산 마리노 공화국에 도착하니 웅장한 성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첫번째 탑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요새는 산 마리노 공화국에 있는
3개의 요새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티켓을 사서 입장했다.
오른편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산타 바바라 예배당이다.
이름과 같이 바바라 성녀에게 헌정되었다.
1960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초기 화승총 형태같은데 이쪽은 지식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다 ;
오래된 성벽이지만 정말 관리가 잘 되있다.
우리나라 남한산성 성곽 조선시대에 지어진 부분은 완전히 고대 유적지처럼 풍화되었는데....
이탈리아의 문화재 관리능력은 정말 놀라울 따름인데 역사를 존중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성벽위로 올라가면 건너편에 있는 Cesta 요새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잘 봐둬야지...
처음 와보는 곳이니 모든 것을 기억할 순 없지만 최소한 눈으로 정확히 봐야 집에 돌아가서
내가 방문한 곳들의 정보도 찾게되고 그런 것 같다.
산마리노 공화국의 랜드마크인 푸블리코 궁전이다.
의회, 시청,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고 있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1894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시계탑에 있는 모자이크 장식에 표현된 인물은
마리노 성인, 퀴리노 성인, 아가타 성녀 순이다.
마리노 성인의 동상이 서있었다.
동상의 모습이 그의 청빈했던 삶을 표현한 듯 하다.
이 곳에서 마리노 성인이 공동체를 만들었을땐 얼마나 갈지 몰랐을텐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보면 역사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고대 로마의 기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그림이 걸려있었다.
산 마리노 공화국의 정치제도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세라믹 작품으로 시계탑에 장식된 모자이크와 같은 그림이다.
마리노 성인, 퀴리노 성인, 아가타 성녀 셋이 표현되어 있다.
마리노 성인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황제나 정복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남겼다는 것 하나로도 위대한 인물일 것이다.
산 마리노 공화국의 국무국 건물인 Parva Domus는 14세기에 건축된 건물로
아쉽게도 일반인의 입장이 불가능하다.
석궁병의 채석장이라는 뜻을 가진 이 곳은 석궁대회 시합장으로도 쓰이고
도시 건물 보수를 위해 채석장으로도 쓰이던 곳이다.
마리노 성인도 채석장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같은 장소인지는 모르겠다.
석벽위 플레이트에 'Libertas(자유)'라는 단어가 있었다.
산마리노 공화국 국장에도 Libertas라는 단어가 있다.
산 프란체스코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1400년경에 완성된 교회이다.
인접한 산 프란체스코 박물관에는 구에르치노와 라파엘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산 마리노도 이탈리아처럼 키에사 급에 속하는 작은 교회에 들어갔는데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있다던가 그런 경험이 가능하다.
그런 예술작품들을 이론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여행때 방문했던 곳들을 알아갈수도 있는거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었다.
산 마리노 은행 본사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오른편엔 각종 샵들이 즐비한데 여행기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 뭘 사진 않았다.
밀레나가 이야기하길 예전에는 산 마리노 공화국에서 파는 상품들이 면세가 되서 이탈리아보다
저렴했다고 한다.
산 마리노 공화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Cesta 요새이다.
Cesta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시대 라틴어 Cista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는데
신성한 가구를 담기 위한 상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곳은 고대 무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 마리노 공화국의 Prima Torre요새는 티타노 산위에 지어졌다.
밀레나와 레스토랑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여행기간 내내 레스토랑 예약하느라 밀레나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그리고 이 피자의 맛은.... 치즈의 깊은 맛이 엄청났다.
한국에도 이탈리아 치즈가 있지만 신선함이나 조리법에서 상대가 안되는 것이다.
또한 간이 틀리다.
한국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한국인의 입맛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심심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곳의 이탈리안 음식들은 맛이 선명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전체적으로 한국사람들이 이탈리아와서 먹는 음식에 대해 짜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맛있었다.
간혹 한국 여행자들이 소금간을 덜 해달라고 요청하곤 하는데 나는 그냥 드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쉐프들이 평소 가장 자신있는 간에 맞게 요리하는게 훨씬 맛있을거라는 믿음에서다🙂
그러니 여러분... 오리지널 테이스트로 드십시오🙏🙏
이탈리아 북부여행도 어느덧 끝나고 말았다.
즐거운 시간들이 참 빨리 지나간 것 같고 아쉽기만 하다.
밀레나가 없었더라면 이탈리아 북부를 이렇게 잘 여행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고맙고 소중한 친구다.
밀레나와 파엔자역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인 피렌체로 가기위해 볼로냐 역으로 갔다.
시간이 상당히 남아 지난번 여행했던 산 페트로니오 성당 야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간단하게 대충 보고 다시 볼로냐 중앙역으로 왔다.
그런데.... 여기서 난관이 펼쳐지게 된다..
보시는 바와 같이 볼로냐 역은 1번 플랫폼 2번 플랫폼이 있는게 아니고
1번 플랫폼이 있고 1 Est(동쪽)와 1 Ovest(서쪽)가 다 따로 있다.
플랫폼이 다르다는 것을 이 때까진 몰르고 결국 엉뚱한 플랫폼에 가서
기다리다 결국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웃긴건 나말고도 또 한명이 같이 기차를 놓쳤다는 것이다....
늦은 시간에 예약된 기차는 떠나버리고 또 기차가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서
진짜 멘탈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밀레나한테 연락해서 기차를 놓쳤다고 이야길 했는데 이야기하면서도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티켓오피스로 가서 오늘 피렌체에 갈수있는 기차가 있는지 알아봤더니
일반등급인 레지오날레를 섞어서 타면 가능하다고해서 표를 다시 구매해서 예매했다.
밀레나에게 피렌체에 있는 호스텔 번호를 알려주면서 당초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꼭 좀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나마 일반기차라도 타고 피렌체에 가서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차가 끊기기라도 했으면 일단 피렌체 호스텔은 그대로 돈이 결제되고
볼로냐에서 1박을 즉석에서 하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뻘짓끝에 새벽이 되어서야 피렌체에 예약한 숙소 Ottaviani 호스텔에 도착했다.
프론트에서 젠틀한 남자직원분이 환영을 해주었다.
도착하자마자 일단 씻고 그냥 잠들기가 억울해서 야경을 찍으러 나가기로 했다.
다시 프론트로 가서 혹시 밤엔 피렌체가 위험하지 않느냐고 하니 안전하다고 하면서 친절하게
지도를 건너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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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와 헤어지고 파엔자역에서 체세나로 가기위해 레지오날레 기차를 기다렸다.
어제 파엔자를 여행한것처럼 체세나의 야경을 보러 돌아다닐 예정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급인 레지오날레 기차 내부이다.
레지오날레 기차는 이탈리아 거의 모든 곳을 연결한다.
체제나 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었다. 여느 대도시역들의 혼잡함이 없어서 좋았다.
동상의 주인공은 교황 비오 6세(재위 1775~1799)로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 교황이다.
1785년 조선에서 선교사 도움없이 자체적으로 천주교회가 탄생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은화 500냥과 함께 조선의 천주교를 지원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왜 비오 6세의 동상이 여기 있느냐면 이 분이 바로 체세나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1401년에서 1403년에 지어진 건물로 체세나에 있는 공공건물중 가장 큰 건물이다.
1722년에는 체세나의 귀족들을 위한 용도로 쓰여졌으며 1782년엔 교황 비오 6세를 기리기 위해
지금 모습대로 꾸며졌다고 한다.
체세나 대성당은 바실리카 마이너에 올라있다.
외관은 로마네스크의 양식이고 내부는 고딕양식인데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높이 지어진 고딕성당은 본 기억이 없다.
이탈리아의 고딕양식은 첨탑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절제되어있고 대신 고딕첨탑의 요소를
파사드에 반영하는 경향이 인상적인것 같다.
아까 지나갔던 체세나 대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성문으로 들어가면 말레테스티아나 성이 나온다.
말라테스티아나 성은 에밀리아 로마냐주에서 보존상태가 좋은 요새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현존하는 성은 14세기에 완성되었으며 그 전에 2개의 성이 지어졌다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프리드리히 2세가 머물렀다고 한다.
왼쪽 망루가 남성이고 오른쪽 망루가 여성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왼쪽 망루는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중이고 오른쪽 망루는 농업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체사레 보르자의 초청으로 이 곳에 와서 요새를 업그레이드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성을 스케치했을땐 문루가 5개가 있었는데 작년에는 체세나 시의회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망 500주년을 맞아 말라테스티아나 성을 그가 생존할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야간에 경관 조명이 잘 되어있어서 말라네스티아나 성을 촬영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할때 시간을 새벽부터 밤까지 다 쓰는 편이라 밤시간에 방문했을때 불이 꺼져있으면
아쉬움을 느낀다.
말라테스티아나성은 시민광장과 바로 이어져 있다.
일본성의 조카마치(성하마을)같은 개념으로 봐야할까?
1663년에 지어진 교회로 후기 매너리즘 양식을 보여준다.
시민광장 한 가운데에는 Fontana Masini라는 이름의 분수대가 있다.
랜드마크중 하나인 옛 체세나 세관건물로 지금은 비스트로로 이용되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에 성문이 있었던 곳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다시 포를리에 도착해서 숙소로 들어가려는데 야외 술집에서 남성 3명이서 사진찍기 좋은곳 아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다.
집에가는 길이라고 미안하다고 거절했는데 여긴 그야말로 관광객도 없는
로컬이고하니 아마 좋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거 없다.
그냥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 정도로 친절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을 것 같다.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왔는데 로마에서 왔다는 이탈리아사람 두 명이 있어서 내가 사온 맥주를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우선 그 친구들이 궁금해 했던 것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서양사람들이 보기에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거기서 거기 다 같은 사람들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것 같다. 그래서 우선 쓰는 언어와 글자가 다르고 역사적으로 대규모 인적교류가
없었던점을 들었고 다만 팍스 로마나처럼 중국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하면
될것 같다고 설명해줬다.
재밌었던게 두 명중 한명이 아직도 2002년 월드컵때 심판판정에 대해 기억하면서
화가 가라앉지않는 인상이었는데 사전에 다른 이야기로 차단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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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1 Italy - Dozza(도짜) & Brisighella(브리지겔라)
이 날 방문한 곳은 도짜라는 곳과 브리지겔라 라는 곳이다.
두 곳 다 중세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탈리아하면 역시 고대 로마제국의 이미지가 강한데
동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 상실했을때가 1071년이니까 로마제국과 작별하고
지금까지의 역사만 950년이 되는 셈이다.
브리지겔라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도 선정된 적이 있는 곳이다.
추기경만 8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숙소에서 나가기 전에 포를리의 전경을 찍어봤다.
첫번째로 도착한 장소는 Rocca Sforzesca di Dozza로 우리나라말로는 도짜성이라는 곳이다.
역사에선 1126년에 처음 등장했으니 그 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488년 밀라노 공작의 딸인 카테리나 스포르자(Caterina Sforza)가
군사 엔지니어인 조르지오 마르케시(Giorgio Marchesi)에게 성의 개보수를 맡기면서
당시 총기의 출현에 대응하여 새로운 방어체계에 맡게 성을 개조하게 된다.
이후 1500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추기경인 로렌초 캄페지오에게 성을 하사했는데
이때 성은 캄페지오 가문의 저택으로 개조되는데 기존의 도짜성이 요새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때부턴 정치, 외교를 고려한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도짜성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로렌초 캄페지오(Lorenzo Campeggio) 추기경이
개조한 구성을 따른다.
이후 캄페지오 가문의 마지막 장자인 로렌초 캄페지오(추기경과 동명이인)가 사망하면서
도짜의 후작인 마테오 말베치(Matteo Malvezzi)의 아내인
프란체스카 마리아 캄페지오(Francesca Maria Campeggio)에게 성이 상속되게 되는데
남편의 가문인 말베치 가문과 성을 공동소유하게된다.
1960년까지 도짜성은 프란체스카 마리아 캄페지오의 후손들 소유로 남아있다가
도짜 지자체에서 성을 인수하게 되고 지금은 성의 역사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여름에 이 곳에서 중세시대를 테마로 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위의 사진과 같이 전면부는 중세시대 성으로 되어있으며 후면부는 저택으로 되어있다.
성의 해자 부분인데 중세시절 그림엔 물이 있는데 지금은 말라있다.
먼저 부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중세의 부엌을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도짜성의 안쪽 부분 그러니까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저택 부분이다.
성의 일부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벽화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위에서 설명한 마테오 말베치와 프란체스카 마리아 캄페지오의
아들인 에밀리오 말베치이다.
캄페지오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남은 일족인 프란체스카 마리아 캄페지오의
남편 가문인 말베치 가문이 성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를 Malvezzi-Campeggi 시대로 정의하고 있다.
에밀리오 말베치의 아내였던 테레사 사체티(Teresa Sacchetti)의 초상화가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
테레사 사체티는 로마의 귀족이었던 사체티 가문에서 시집을 왔다고 한다.
귀족답게 기품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침실
왼쪽 초상화는 조반니 캄페지(Giovanni Campeggi)라는 인물로 법학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법복을 입고 있는 것 같다.
중세의 플레이트 아머가 전시되어 있었다.
예배당
도짜성의 주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드넓은 농토를 바라봤을까?
도짜성의 지하엔 와인샵이 있었는데 이 지역 최고의 DOC와인을 제공한다고 한다.
이 곳에선 물론 병으로 구매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돈을 내고 여러 종류의 와인을 글라스로 즐길 수 있다.
중세시대 고성에서 와인을 즐기는 특별한 체험이 도짜성에선 가능하다!😊😊
도짜에선 2년에 한번씩 예술축제가 열리는데 그때마다 도시의 벽을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릴 수 있게 빌려준다고 한다.
일본작가의 작품도 있었다.
곳곳에 중세의 흔적이...
점심식사 시간까지 좀 남아서 근처를 걸어다니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들렀다.
내가 폴렌타를 먹어보고 싶다고 밀레나에게 이야기 했었는데
폴렌타를 요리하는 가게로 데려가 주었다.
기다리던 폴렌타가 나왔는데 너무 맛있었다.
우리나라 음식 중에 딱히 비슷한 음식이 없었다.
아주 부드럽고 식감도 좋고 최고였다.
왼편에 보이는 건물이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 성당이다.
파사드는 로마네스크 양식인듯 하지만 돔부분은 초기 비잔틴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1697년에 완성된 건축물로 건립 당시에는 돔부분이 더 높고 웅장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후진과 돔부분이 영락없이 로마시대 스타일을 계승한 성당이다.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한바있는 파엔자의 영주였던 만프레디 가문이 소유했던 성채이다.
1310년에 지어졌으며 역시 중세시대 요새의 모습이 잘 보존된 곳이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엔 이탈리아하면 고대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중세 이탈리아도 컨텐츠가 정말 풍부한 것 같다.
이 곳 브리지겔라같은 경우는 밀레나가 일정에 추가한 곳인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1290년에 완성되어 16세기까지 사용됐으며 1850년에 재건된 시계탑이다.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이 정겹다.
브리지겔라의 상징중 하나인 Via Del Borgo(Via degli Asini로도 알려짐)이다.
위에 사진과 이 사진에서 보이는 아치형 창문이 늘어선 통로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안쪽에는 상점이 있었으며 위층에는 주거공간이었다고 한다.
또한 요새가 있는 언덕으로도 이어진다.
중세의 이탈리아인들이 필요로 했던 모든 목적을 만족시키는 건물이 아니었나 싶다.
중앙에 있는 건물이 Comune으로 브리지겔라의 지자체 건물이다.
작년에 뉴스기사에서 독일출신의 방송인인 다니엘 린데만이 우측에 보이는 레스토랑을
방문해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리지겔라를 떠나기 전에 밀레나와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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