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8 그리스 - 테살로니키: 아라차 이마렛 사원, 비잔틴 목욕탕, 예디쿨레
1484년에 완성된 이슬람 사원으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터키인 여행자들이 도시를 관광할 때 이 곳을 많이 들른다고 한다.
이 곳을 돌아서 정문으로 들어가려하는데 개가 달려들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주인이 제지를 시켰다.
사원 안에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곳은 내가 방문했을땐 입장료가 없이 무료였는데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들어갔다.
들어가니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전시회와 건축물을 감상했다.
나중에 직원분을 볼 수 있었는데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원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직원분이 한국어로 작성된 이 포스팅을 볼리 없겠지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
원랜 이슬람사원에 칠해져 있었을 아랍어 서예와 문양이 많이 훼손되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훼손이 심각해 보이지만 얼마남지 않는 부분도 아름다웠다.
참고로 그리스의 무슬림들과 터키인들, 터키의 민족주의 정당 MHP는 이 곳을 다시 이슬람사원으로 복원할 것을 그리스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터키 정부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기아 소피아마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는데 말이다...
메카가 위치한 방향을 알려주는 미흐랍도 남아있었다.
이스탄불에 있던 카렌데르하네 모스크(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성당)에 갔을때 딱 이 정도 남아있는 성당시절 프레스코 화를 보기위해 일부러 방문했던게 떠올랐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거 하나 보려고 한참을 걸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뭔가 특별하게 좋아하는게 있는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래된 오스만 양식 주택이다.
그리스에서 이런 집들이 많이 없어졌다지만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다.
많은 비잔티움식 목욕탕이 도시에 지어졌지만 남아있는건 이 곳 뿐이다.
1940년까지 목욕탕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가끔 역사 유적은 퍼즐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1000년 전엔 로마제국 어느 도시에나 목욕탕이 있고 원형 극장이 있고 했겠지만 지금은 목욕탕은 이 곳 테살로니키에 그리고 원형 극장은 또 다른 도시에 있는걸 참고해야 하나의 온전한 도시의 모습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는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오스만식 분수대가 있었다. 아랍어 부조가 선명한데 보존 상태가 좋아보인다.
도시를 굽어보는 비잔티움 요새에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탑이다.
문위의 팀파눔엔 아랍어로 된 동판이 붙어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일몰이 지난뒤라 이 곳으로 야경을 찍으러 오면서 나름 경계를 하면서 왔는데 다행히 아주 안전했다.
테살로니키 비잔티움 성벽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다.
로톤다 영묘를 중심으로 해안까지 길이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다.
도시의 형태가 똑같은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터키의 이즈미르(원래 이름은 스미르나)를 갔을때 도시의 분위기가
테살로니키가 많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같은 민족이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
테살로니키에도 콘스탄티노플처럼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롬이 있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나보나 광장이 되었다면 이 곳은 차도가 되었다.
이 도로가 옛 히포드롬의 형태를 따라 만들어진 곳이다.
로마, 이스탄불, 테살로니키 모두 히포드롬 경기장은 사라졌지만 유구의 일부를 보존하고 그 곳에 원래 히포드롬이 있었다는 사실이 잊혀지지 않도록 기념한다.
갑자기 서울에 있던 동대문 야구장이 생각난다. 만들어진지 100년 가까이 된 경기장이었는데 하다못해 야구장 구획만이라도 남겨놨어야 하는데 아쉽다...
테살로니키 성벽으로 그 역사가 3세기까지 올라가며 5,6 세기 야만인들의 습격과 10세기 사라센인들의 점령, 13세기의 재건등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거듭한 요새이다.
원랜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처럼 2중 성벽으로 되있었고 성벽 간 거리가 10미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한겹만 남아있다. 그리스도 터키처럼 도시계획을 위해 성벽의 일부를 제거했다고 한다.
한때는 성문이 여러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이 곳 북문만이 현존한다.
이 곳을 걷다가 5유로를 주었다. 어두운 밤길에 누가 떨어뜨렸나보다.
엡타피르지오 요새로 중앙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터키어로 예디 쿨레라고 불렸다.
뒤에 있는 성벽은 이곳에 자리했던 아크로폴리스의 일부였고 왼쪽의 성벽은 동로마제국 시대에 추가된 성벽이다.
위에서 찍은 야경이 이 성채 위에 올라가서 촬영한 것이다.
요새 북문 근처에 비잔티오라는 카페가 있었다.
잠시 들러서 프라도 에스프레소라도 있으면 마시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으면 호스텔의 다른 투숙객들에게 폐가 될것 같아서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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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그리스 - 파나기아 찰케온 성당, 로만 아고라,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
4세기에 지어진 분수대의 유구로 고대 로마제국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지어진 것이다.
오스만 제국때도 그대로 사용되었고 그리스 독립 후에도 196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그리스 독립후엔 'Phoenix bath'라는 이름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지나가는데 하맘 정문 앞에서 롬인(집시) 소년이 오줌을 싸고 있었다.
한때는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들이 이 곳을 만들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스프레이를 뿌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곳이 되버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관리소홀일수도 있고 그냥 방치해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문화재를 조리돌림하면서 욕을 보이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이러한 방치상태가 그리스라는 나라의 문화적인 격에 맞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그 정돈 아니겠지만 우리 한국사람들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철거할때 일본에게 한방 먹였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사실 그리스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이, 그리스의 오스만 제국 건축물들이, 그리고 터키의 비잔틴 시대 건축물들이 각 나라의 정부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억의 장소로서 활용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파나기아 찰케온' 성당으로 1028년에 지어진 성당이다.
서쪽 입구의 비문에 새겨져 있는대로 이 곳은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 본래 이교도(로마 다신교)들의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었다.
성당이 동로마 시대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진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스만 제국 시대엔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어 카잔질라 자미(Kazancilar Camii)로 불렸는데 구리 대장장이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현재 이름인 파나기아 찰케온(구리 대장장이의 성모교회)도 이슬람사원일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3개의 돔이 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지어진 성당들과 동일한 구조를 보여준다.
나르텍스 팀파눔에 동로마 제국 시대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지금은 비어있었는데 과거의 공구용품점 같았다.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아크릴 간판의 모습이 향수를 불러왔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아고라 유적이다.
원래 있었던 아고라 구역보다 축소된 부분만이 남아있다.
동쪽엔 조폐국과 도서관, 극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로마제국이 자랑했던 선진문명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겠고 말이다.
솔직히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그리스가 역사의 전면에서 활약했던 황금기와 비교해서 몰락했다는 느낌보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모습에서 왜 그리스의 문화가 서양과 중근동까지 퍼져 나갔는지 잘 느낄 수 있었다.
남쪽엔 상점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으로 고대 로마시대 목욕탕이 자리했던 곳으로 디미트리오스 성인이 순교한 곳이다.
이후 5세기에 성당이 지어졌고 전소되었지만 원형을 살려 7세기에 재건된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뒤로 1493년에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는데 이때 바뀐 이름이 '카시미예 자미(Kasimiye Camii)'다. 카시미예는 디미트리오스 성인의 이슬람식 이름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존경받았던 성인이라고 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나서도 기독교도들이 디미트리오스의 무덤에서 참배하는 것이 허용됐다고 한다.
1912년 도시가 그리스령이 된후 카시미예 자미는 다시 성당으로 복원된다.
1917년 대화재로 인해 성당의 상층부가 대부분 전소되게 된다.
대화재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원래 불이 기독교인 마을인 동쪽으로 옮겨붙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으로 불이 옮겨붙어 몇시간동안 타게 된다.
그런데 성당이 전소되면서 불은 기독교인 마을 방향이 아닌 바다 쪽인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사람들은 디미트리오스 성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희생해 기독교인들을 구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 후 복원작업에서 1층과 2층의 일부, 그리고 남아있는 건축부재들을 최대한 보존해서 복원해서 현재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재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회반죽으로 덮여있었던 모자이크가 드러나게 됐다고 한다.
현재 모습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7세기에 지어진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구 동로마 제국령, 그리고 현대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들은 몇몇 경우를 빼면 그 원형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교회 자체가 성당을 개조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신중하고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성당들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할 때에도 미나렛을 새로 추가하는 것을 제외하면 건물의 구조 자체를 없애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개조될때 내부에 있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예외적인 몇몇 곳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해지지 않는 편이다.)
성당 지하에는 고대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과 카타콤베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땐 운영시간이 끝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대화재로 전소된 성당의 모습이다.
로마의 산파올로 푸오리 데 무라 대성전도 화마를 입었을때 이렇게 열주와 앱스만 남고 전소됐었다...
성당 앞 광장의 바닥은 본래 유대인 묘지의 석재로 지은 것이다.
한때는 유대인 인구가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동안 95%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때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묘지를 파괴하고 그 곳에 있던 비석들을 반출해서 망자들의 이름을 지우고 사용한 것이다.
현재의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가 위치한 자리에 유대인 묘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인 묘지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때문에 유대인들도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조상들의 묘비 위를 걸으면서 말이다.
성당의 서쪽 측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성당의 후면부로 여기도 다른 고대 성당들처럼 플라잉 버트레스 역할을 하는 버팀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정말 교과서적인 정통 바실리카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17년 대화재의 흔적을 알 수 있는데 1층의 아치가 군데 군데 빠져있고 2층 기둥은 새로 교체된 것이다.
일부러 새로 지은 부분은 누구나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증축을 치적삼아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고 하기보다 초기 성당의 원형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사제들에 의해 오늘날 사람들은 1500년전에 지어진 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당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테살로니키의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있던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에 있던 아치와 열주이다.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겠지만 꼭 방문해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앱스에서 테오토코스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었다.
천사들이 성모님과 아기 예수를 축복하고 있다.
하얀색으로 회칠한 부분이 전소되고 새로 지은 부분이다.
그 아랫부분에 정교하게 원형의 아치가 결합돼있는데 복원작업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복원작업이 1917년에서 1949년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는데 얼마나 신중하게 복원이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성 디미트리오스의 유해라고 한다.
많진 않지만 성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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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그리스 - 테살로니키: 로톤다, 성 판텔레이몬 성당, 아야 소피아 성당
얼마 전 유럽 입국시에 2주격리가 해제됐다고 한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 72시간내 PCR 테스트 영문 증명서를 준비하려면 하루가 걸리는 점,
그리고 귀국시에도 해외에서 PCR 테스트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국으로 격리없는 입국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틀의 시간이 깨진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갈지말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 하다.
갈레리우스 황제의 영묘로 조성됐다가 다신교 신전으로 쓰였던 로톤다를 볼 수 있었다.
고대 테살로니키의 도시계획은 이 곳 로톤다를 심장부로 계획됐다.
로톤다 왼편엔 이슬람 사원 당시의 뿔모양의 지붕이 제거된 미나렛이 남아있다.
아쉽지만 입장시간이 지나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테살로니키에서 하루가 아니라 이틀로 스케줄을 잡을걸 후회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아쉬움이 남는게 다시 방문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여행 추진력 하난 확실하니까 꼭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 거다.
반원형의 앱스엔 예수 승천이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제거되어 있는데 성당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됐을때 자주 일어나던 조치로 이슬람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교리에 근거한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있지만 그래도 꽤 많은 모자이크가 남아있다.
성 판텔레이몬 성당으로 정교회의 건축양식이 자리잡힌 이후에 지어진 성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같다.
돔이 올려져 있지만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친근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스만 제국 시대엔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어 '이샤키예 자미(Ishakiye Camii)'로 불렸는데 이사악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이 성당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성당들과 차이가 없다.
왼쪽에 사진이 짤렸지만 굴뚝같이 생긴 부분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을때 첨탑인 미나렛이 있던 기단이다.
내부는 보시는 바와 같이 성화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성당에서 몇 안되는 비잔티움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훼손이 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구 오스만제국령에서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성화 자체가 남아있지 않고 멸실된 사례가 많아 이 정도는 오히려 보존이 잘 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최소한 성화 인물들의 형태는 남아있으니 말이다.
아요스 아타나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이다.
성당 외부 모습에서 비잔티움적인 특징이 없어서 오스만 제국 때 지어진 성당인 것으로 추측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딱 봐서 정교회 성당인데 돔이 없고 규모가 작으며 교회 종탑이 빈약하게 서있다면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곳일 확률이 높다.
아야 소피아 성당 정문인데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었다가 다시 성당으로 원복됐을때 새로 지어진 문이다.
783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테살로니키를 대표하는 곳이다.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고대 로마시대 건물과 초기 기독교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492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카시미예 자미(Kasimiye Camii)라고 불리게 된다.
정교회 아이덴티티의 뿌리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에 각별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이전의 포스팅에도 언급했지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성당이라면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라테라노 대성당이 있겠지만
그리스를 대표하는 성당은 없다.
과거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었지만 오래 전에 그 곳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기 때문이다.
2019년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을때 항의시위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같은 날 그리스 전역에 있는 성당들이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을 애도하는 종소리를 울렸다.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의 사진이다.
위에 사진과 반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이다.
앱스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와 같이 테오토코스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11세기에 만들어졌는데 19세기 오스만 제국 시대에 아랍어 비문과 물감으로 덮여졌는데 이때 모자이크가 큰 손상을 입었고 1907년에 빗물로 재차 훼손되게 된다.
위쪽의 십자가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모자이크도 훼손된 부분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다만 보수한 부분이 비잔티움 시대에 만든 원본보다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성모님 얼굴 곳곳에 위화감과 부자연스러움이 보인다.
성당 종탑의 모습인데 하층부에 이슬람사원일때 새겨진 연꽃모양의 오지 아치가 남아있다.
기실 이 부분을 빼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을때의 흔적은 특별히 신경쓰고 관찰하지 않는 한 알아차리기 힘들다.
성당의 우측엔 미나렛도 있었는데 성당으로 원복되면서 철거되었다.
터키인들은 미나렛을 제거한 것에 대해 상당한 유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을때 종탑은 지붕모양이 현재와 달랐는데 이때 사용된 지붕은 성당 안뜰에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종탑에 있던 지붕이다.
이 안뜰때문에 테살로니키 대화재때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곳도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됐었기 때문에 훼손이 심하다.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가 비기독교 문명에 의해 훼손되지 않아 완벽한 보존상태를 자랑하고
이스탄불의 모자이크가 현재 남아있는 부분만 살린 느낌이라면 테살로니키의 성화들은 그 중간정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꼭 복원해야할 부분들은 모자이크를 채워넣지만 사라진 부분에 상상으로 모자이크를 복원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돔위에서 12사도들과 성모님, 천사들이 지상의 교회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을때 모습인데 훼손이 심각한 모습이다.
또한 이슬람 사원일 때 장식이 현재엔 전부 제거되고 지워졌음을 알 수 있다.
테살로니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은 구형은 아니고 이전의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아래엔 성모님과 천사들이 있고 양쪽에 12사도가 모자이크로 표현돼 있다.
천장의 그리스 비문은 사도행전 1장 11절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중략)"가 인용돼 있다.
돔의 모자이크를 보는 이들이 잠시 갈릴리 사람이 되는 셈이니 재미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이다.
판토크라토르가 아닌 예수 승천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 부분이 손상됐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복원을 거쳐 완벽한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테살로니키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전시돼있는 14세기에 만들어진 예수 그리스도 이콘으로 본래 이 곳 아야 소피아 대성당에 있던 것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8세기에 지어졌지만 이 곳에 있는 고대 그리스식 기둥들은 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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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그리스 - 테살로니키: 갈레리우스 궁전 유적, 갈레리우스 개선문
비잔티움 성벽의 기단을 피해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성벽의 원형복원과 개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갈레리우스 궁전의 일부였던 앱스형의 홀 유적이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유적들이 쇠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기서 더 무너지지 않게 치밀한 보존처리가 돼있다.
부분적으로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이는데 고대 유적에 대한 복원 사항을 다룬 베니스 헌장에 가장 충실한 복원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주요 사항으로는 가설에 근거한 재건은 피하고 개입은 최소화 할것, 유적의 틈새는 복원되야 함, 이전에 있었던 개입에 대해 비판적일 것 등이다.
지금 보시는 사진도 그냥 남아있는 부분을 대충 정비해놓은게 아니고 남아있는 부분이 더 풍화, 훼손되지 않게 같은 재료로 위쪽을 마감해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보존을 위해 같은 재료로 마감해놓은 부분은 추후 있을지도 모르는 복원을 위해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곳은 갈레리우스 궁전의 목욕탕이 있던 곳이다.
여긴 목욕탕의 응접실이 자리하던 지점이다.
원래 모습은 이러했다고 한다.
따뜻한 물 공급을 위해 아궁이에서 불을 떼서 파이프를 통해 벽과 바닥, 욕조를 데웠다고 한다.
나는 이런 복원도를 보면 주로 하는 상상이 4세기에 이 곳에서 목욕을 하던 사람이 현대로 와서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실망할지 아니면 이렇게나마 남아있는 것에 기뻐할지 궁금하다.
내 생각엔 그 당시에도 지진이나 화재가 빈번했으니 후자일 것 같다.
'구세주 성당'이란 이름을 가진 작은 성당이다.
도시에 있던 거의 모든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지만 이 성당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개조당하지 않았는데 이스탄불에 소재한 몽골의 성모마리아 성당처럼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 정도 예외로 봐준 것이다.
그리스 독립 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성당들은 모두 정교회 성당으로 원복되었다.
성당이 건축된 1350년은 부활한 동로마 제국이 빠르게 몰락하던 시기이다.
돔엔 예수 승천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세월로 인해 천사들의 형상이 희미해져 윤곽만 보일 뿐이다.
3세기 페르시아 사산제국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갈레리우스 개선문이다.
한때는 기둥만 8개로 지금보다 더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현재는 동문만이 남아있다.
원래 모습의 추정도이다.
좌우로 늘어서 있던 수 많은 열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고대에 지어진 성당을 구성하는 열주에 해답이 있다.
성당건축에 있어서 언제나 석재가 풍부한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의 이교도 신전이나 공공건물에 사용되던 기둥을 성당 건축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구 그리스 로마 세계의 성당에 있는 고대 그리스식 열주를 볼때면 그것이 특정 종교의 건축물이라기보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엔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처럼 그려졌지만 로마제국이 망할때까지 두 문화가 동시에 사랑받았다.
고대 그리스 신앙이 주류 종교는 더이상 아니었지만 천년 동안의 믿음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민간에선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마치 개신교나 천주교 신앙을 가진 한국인들도 오래된 불교 사찰을 방문하면 경건함을 느끼는 것같이 말이다.
3세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조가 풍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위에서 2번째 패널이 사산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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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 모양을 한 배가 바로 운영되고 있는데 칵테일을 마시면서 바다를 한바퀴 운항한다고 한다.
이런 배들이 테살로니키에 3척이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장기여행이라 금전적으로 이런데서 돈이 조금씩 소진되는게 부담도 되고 시간도 부족해서 과감히 패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상이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내 블로그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건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존재했던 그리스계 도시국가나 섬에 존재했던 문명의 역사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가장 사랑받는건 이 동상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활약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역사다. 여기저기 모래알처럼 분열돼있던 그리스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리스 지역과 동방 지역의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비록 돈과 시간이 한정돼있어서 가지 못했지만 다음 번 여행 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 도시인 그리스의 페라 지역을 꼭 가보고 싶다. 그리스가 많은 섬들, 영토가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영토 크기보다 실제 여행을 하는건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스 사람들은 죽기 전에 그리스 지역을 모두 여행하는게 꿈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관광객들에겐 '산토리니국'이라고 불려야 할 정도로 산토리니와 아테네에 편중돼 있지만 알아보면 알아볼 수록 저평가된 도시가 참 많다.
물론 모든 그리스 도시가 유적지가 채일정도로 많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대도시들도 경제성장기에 난개발이 심각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만으로도 한번쯤은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들이다. 비록 역사에서의 존재감보다 초라해서 실망할지라도 그것도 여행의 한 부분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배워가는게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화이트 타워라고 불리는 건축물로 그리스어로 레프코스 피르고스라고 불린다. 1535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축된 탑으로 같은 위치에 동로마제국시대인 12세기에 건축됐던 탑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 역사학자 프란츠 바빙거는 이 곳이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설계했다고 추측했다.
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부탁했더니 "No"라고 해서 "뭐지? 이 싸가지는..."하고
그 여성과 같이 온 일행인 다른 여자한테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고맙다고 하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니까 아르메니아에서 왔다고 했다.
얘기 끝내고 내 갈길을 가려고 하는데 아까 사진찍어주는걸 거부한 여자가 오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영어를 잘 못해서 내가 자기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뜻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경쓰지 말라고하고 자리를 떴다.
역사적인 사건으로나 접하던 아르메니아 인들과의 첫 조우라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닥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솔직하게 사과하는 모습에 근본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래 나는 전망대에 큰 흥미는 없어서 일본여행갈때 천수각 빼면 잘 안가는 편인데 화이트 타워는 꼭 한번 들러보고 싶었기에 티켓을 사서 들어갔다. 혹시 내가 잘 모를 거라고 염려했는지 입구에 있던 직원분이 이 곳은 도시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기념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럴땐 그냥 들어야지 예를 들어 서울에 온 미국 관광객이 가이드가 설명을 하는데 "네... 저 4대궁 다 알아요... 경희궁은 복원이 되면 좋을텐데 아쉬워요" 이러면 좀 웃기잖아? ㅎㅎㅎ
계단이 완만하게 지어져있어서 올라가는게 그리 힘들지 않다.
테살로니키에서 출토된 도자기가 전시돼있었다.
바닥재로 쓰이던 모자이크가 전시돼 있었다.
도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품들이 설치돼 있었는데 주로 오스만 제국 시대가 많았다.
그리스에서 오스만제국 시대의 역사에 대해선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는 이즈미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스미르나가 그리스인들에게 아직도 크나큰 향수로 남아있는 것처럼 셀라닉(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시대 이름) 이라는 이름만으로 많은 터키인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리스에 오기전 이스탄불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셀라닉으로 간다고할때 좋은 도시라고 하면서 그가 보였던 반응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약간의 상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서 일본식 가옥을 찾고 터키에서 비잔틴 제국의 흔적을 찾고 반대로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잔재를 찾는다.
이런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막상 방문을 했을땐 그 아우라가 어슴푸레하게 남아있을 뿐이어서 상상력과 주의력을 동원해야 겨우 알아차릴 만한 유적들이 많았다. 심지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고해도 말이다.
이 곳도 오스만 제국이 만든 건축물이지만 투르크인들이 떠났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대 피의탑이라고 불리던 서슬퍼런 분위기는 남아있지 않다.
탑의 최상층인데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어서 기념엽서를 2장 샀다.
이 중에 한 장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평소 잘가는 카페 사장님께 드렸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사실 제 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이 없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그건 내가 다른 나라의 교통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서 일 것이다. 나는 도시에 지하철이 없으면 비록 우리나라라도 왠만하면 걸어다니려고 한다. 이유는 실수로 버스를 탈때 방향을 반대로 타면 안타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ㅎㅎ
저 앞엔 망망대해로 펼쳐지는 것같이 보이지만 저기도 드넓은 에게해의 한쪽 귀퉁이일 뿐이다.
마케도니아 조선소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테살로니키는 고대 때부터 배를 만들던 도시라고 한다.
이 곳의 조선회사들은 큰 대기업보다 중소규모의 가족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국립 북부그리스 극장이다.
건물외관을 대리석으로 장식한게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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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티니에서 테살로니키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렸다.
3시간이면 꽤 먼거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유럽여행에서 했던 장거리 이동에 비하면 가까운 것이었다.
비잔틴 문화 애호가인 필자에게 가장 가볼만한 도시 3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스탄불, 라벤나, 테살로니키를 꼽고 싶다.
오늘 포스팅할 테살로니키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내내 쇠락한 적이 없는 역사적인 도시로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살로니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15곳의 초기 기독교 성당과 비잔티움 유적이 위치해있다.
이 곳이 동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의 제 2 도시로서 번영했던 이유는 바로 구 로마(로마)와 신 로마(콘스탄티노플) 중간에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과 마찬가지로 이 곳 테살로니키도 황제를 위한 궁전과 요새, 공회당, 성당, 도서관, 각종 편의시설 등 당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만들어졌다.
이 곳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목욕탕인 야후디 하맘이다.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 시대 제2의 도시로 '셀라닉(Selanik)'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큰 번영을 누렸다.
현재는 전시회 공간으로 비정기적으로 사용 중인데 도시에 남은 오스만 제국 시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홍보도 안하고 이런식으로 비정기적으로 운영할 경우 더더욱 알길이 없게된다.
나야 소수의 특이한 관광객이니까 인터넷을 찾아서도 가겠지만...
단편적인 인상으론 그리스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이런 곳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홍보까진 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규물지네(코모티니의 터키어 명칭), 데데아치(알렉산드로폴리스의 터키어 명칭)는 트라키아지역 역사에 딱히 관심이 없으면 터키 젊은 세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터키인들이 셀라닉이라는 도시에 갖는 향수는 어마어마하다.
가령 여행에서 만난 터키인들에게 테살로니키 이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셀라닉이라는 이름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함자 베이 자미'라는 이름이었던 옛 이슬람사원 이었던 곳이다.
그리스 독립 이후 극장으로 개조되어 '알카자'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468년에 지어진 것으로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고 있는 옛 비잔티움 성당들을 표기할때 현재 사원 이름을 쓰고 그 다음 원래 이름을 표기했는데 그리스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해서 현재 쓰이는 이름인 '알카자 테살로니키(함자 베이 자미)'라고 표기했다.
아쉽게도 복원공사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숙소를 언덕위에 있는 호스텔로 잡았는데 도시 중앙에서 빨리걸어서 30분이고 버스타기도 애매하고 은근히 빡세다.
이럴거면 그냥 짐이 무겁더라도 백팩메고 하나라도 저녁에 체크인을 할 걸 그랬다.
그래도 이런 것도 경험이니까....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오스만식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테살로니키엔 이런 분수대가 자주 보였다.
그중엔 지금도 분수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이 도시에 터키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수대위엔 아랍어로 장식된 동판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언덕 왼편에 성 테오도레스 성당이 보인다.
1990년에 지어진 성당인데 이탈리아의 성당들이 바실리카→비잔티움→로마네스크→르네상스 양식(고딕, 바로크, 고딕 양식 혼용)으로 발전했다면 그리스는 바실리카에서 비잔티움 양식으로의 발전은 이탈리아와 동일하지만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시대로 발전할때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게 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샤리아 법에 따라 새로 짓는 성당의 규모는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지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동네 강당 정도로 퇴보하는 양상으로 이뤄졌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그리스의 종교건축은 다른 양식으로 변화하기보다 그 동안 금지됐던 동로마제국 시절의 비잔티움 양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다만 현대에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대체됐고 성화의 표현에 있어서 헬레니즘적인 감정표현이 강화됐다. 하지만 이런 비잔티움 회귀 성향과 러시아에서 유행한 네오 비잔티움 스타일 건축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비잔티움 양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기존 구조에서 변화를 꽤해 돔을 극대화시키거나 바로크 양식, 신고전주의 등을 도입하는 특징이 있지만 그리스의 네오 비잔티움 양식은 기존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돔에 빨간색이 칠해진 것도 이 곳이 오스만 제국이나 터키가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만약 그랬다면 하맘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음식점으로 개조해서 사용 중인데 겨울엔 클럽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건물 내부 사진을 보면 하맘의 기본 구조는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 끝에 이슬람식 오지 아치가 있었다.
이런 형태가 오지 아치로 기독교식 건축물과는 구분된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태어난 집으로 대부분의 터키인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태어났을땐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1933년에 터키 공화국의 10주년을 기념하여 그리스 정부가 아타투르크 대통령에게 이 집을
선물했고 나중에 터키 영사관으로 소유권이 이전되게 된다.
터키 메르신 지방에 있는 타슈주라는 도시와 수도인 앙카라에 이 생가의 복제품이 있다.
생가로 들어서니 그리스인 직원과 터키인 직원 2명이 나를 맞아주었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직원분들이 놀라기도 한것 같은데 아주 친절하게 환영해주었다.
앞뜰에서 삼각대로 사진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박물관 구역 모든 곳에서 삼각대 촬영을 금지하여 사진은 찍지 못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사진이 전시돼있었다.
내부는 이렇게 전시실처럼 꾸며져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살았던 때처럼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다.
10년 정도 전엔 이 곳이 전시실이 아니라 박물관 전체가 가정집처럼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부 터키인들은 지금은 너무 박물관같다고 예전 모습을 그리워 하는 것 같다.
침실이 있던 1층 모형이다.
2층의 모형이다.
10대 시절의 아타투르크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타투르크의 모친은 아타투르크가 어린시절 이슬람 교육을 받길 원해서 이슬람 학교로 보냈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세속주의 성향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아타투르크의 모친인 주베이데 하님의 모습이 밀랍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주베이데는 이름이고 하님은 투르크 계열 유목민족 사이에서 지체높은 여성들을 호칭할때 사용되던 단어로
남성의 '칸'과 비슷한 명칭이다.
아타투르크의 금발벽안은 모친에게서 유전된 것이다.
밀랍으로 만든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형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밀랍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마치 살아있는듯 했다.
이 당시의 모습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1920년대 말~ 1930년대 초반)의 아타투르크 대통령을 표현한 것 같다.
테살로니키는 동로마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 말기엔 유대인, 투르크인에 이어 3번째 인구 비율로 떨어지게 된다. 이는 다른 지방으로부터 투르크인들의 이주와 더불어 기존의 그리스인 정교회 교도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테살로니키가 현재 그리스령이기 때문에 아타투르크가 그리스어를 구사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그리스어를 구사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단지 그리스어로 된 노래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당시 다민족 사회였던 셀라닉(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제국시대 공식명칭)에서 간단한 그리스어 정돈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는 정도다.
그리스인들 중에선 자신들과 전쟁을 한 지도자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리스에 대해 그가 한말을 옮겨본다.
"내가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이 5세기 동안 함께 형제처럼 살아온 테살로니키의 아들이자 루멜리아의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이 피를 흘렸던 전쟁에 참전한 것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불행히도 그걸 운명, 필연 아니면 역사라고 부르든지간에 나는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그리스인들과 더 많이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양측이 (그리스와 터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는데 실패한 것은 나에게 평생 가슴아픈 일입니다."
박물관엔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은 옷을 잘 입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니 옷뿐만이 아닌 당대에 유행했던 모든 문화에 능했다.
전시된 구두를 보면 요즘 유행하는 구두보다도 선이 날렵하고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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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래간만의 포스팅이다.
이 날은 카발라를 갈까하다가 알렉산드로폴리스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후자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역시 교육의 도시라 그런지 버스를 기다리는 대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 곳엔 동양인은 나혼자 있었는데 대학생들이라 그런지 무심한 눈빛보다는 외국인도 포용할 수 있는
우호적인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도시들이 외국인들에게 관광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지역박물관만해도 콜렉션의 깊이가 대단하다.
한마디로 괜히 그리스가 아니시다.
사실 나에게 돈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결정적으로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그리스를 자세히 여행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
버스로 내리자마자 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민속박물관이 문이 닫혀 있어서 방문하지 못했다.
오래 전에 의과대학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그렇겠지만 알렉산드로폴리스의 이름을 들었을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게
알렉산더대왕이었는데 사실은 그리스왕국의 국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1세의 방문을 기념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트라키아 민족 박물관으로 문은 여는 날이었지만 내가 갔을땐 10분넘게 문이 닫혀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곳으로 갈때 이 곳의 직원인 것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 박물관으로 원래는 고등학교였다고 한다.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이 곳의 소장품들은 평가가 좋다.
같은 색으로 채색된 건물이 성당 건물과 통일성을 갖게 한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정교회의 성호는 가톨릭과 반대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교회의 성호 긋는 방향을 몰랐고
가톨릭식으로 성호를 긋고 들어갔다.
성당으로 들어서니 천장의 펜던티브 돔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빛으로 인해 돔이 하늘에 떠있는 효과를 의도했다.
성당내부는 그리스 십자가 모양으로 디자인되었으며 비잔틴적인 요소는 다른 정교회 성당과 같다.
작지만 아름다운 영화관이었다.
이 영화관은 원래 담배창고로 문을 열었지만 1927년에 영화관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2012년에 문을 닫았었지만 리모델링을 거쳐서 다시 운영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광진구의 동부극장이 생각났다.
과거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최근에 서울극장이 올 8월을 마지막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서브컬쳐 관련 오프라인 매장이 모두 사라졌지만 지금은 영화같은 대중매체까지
잠식하고 있다.
1년전에 포터블 빔프로젝터를 샀지만 막상 가동시킨건 몇번 되지 않는다.
영화의 감동을 전해주기엔 역부족이고 극장에서 영화를 볼땐 이야기속에 몰입된 느낌이라면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볼땐 그냥 내 방이네 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다가구 주택이다.
그리스 사람에게 이런 다가구 주택이 많은 것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건물을 지어대다간 땅이 남아있지 않을걸?
이라는 대답이었다😂
철길이 나있었는데 한적하고 좋았다.
세계 1차대전때 군사 기차역으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낙서가 있지만 100년이 넘은 건물치고는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철도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때는 지금은 사라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지선이 이 곳 알렉산드로폴리스를 지나갔다.
성 넥타리오스 성당이라는 곳인데 성당 앞 광장에 노인분들이 많이 있었다.
유럽에서 성당은 종교건물이지만 지역 커뮤니티 역할도 담당한다.
사실 그리스라고 노인들이 갈 곳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당에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시간보내고 이런 풍경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성당에 들어가려는데 신부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에 갈때마다 이런 친절함을 자주 경험했다.
대학 교양수업에서 알게되었던 단편적인 정보로 접한 정교회가 아닌 내가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고 그리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된 정교회는 차이가 정말 컸다.
천장의 판토크라토르 성화의 예수 그리스도는 감정이 나타나있지 않는데 이는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베드로 성인의 이콘이 있었다.
흔히 가톨릭교회는 베드로 성인이 상징이고 정교회는 안드레아 성인이 상징이지만
정교회에서도 흔히 베드로 성인의 이콘을 쉽게 볼 수 있다.
정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가 베드로 성인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진 않지만
초기 사도들중의 한명으로서 그 의미는 가볍지 않다고 한다.
동로마제국과 정교회를 상징하는 쌍독수리이다.
자주색 염료는 한때 황실의 일원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코노시스타스가 인상적이었다.
성유물로서의 이콘은 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라틴 문화권에선 종교 예술이 변화도 많았고 표현이 자유롭다.
하지만 비잔티움 예술은 엄격한 규칙을 통해 정립된 형식만을 표현한다.
가톨릭이 좋든 나쁘든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했다면 정교회는 전통을 고수했다.
그런 역사적인 근거로 나는 정교회가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다.
뭐하는 건물인지 정말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물이었다.
버려진 건물같아서 아무도 없을 줄알고 들어가봤다.
폐허 매니아다보니 이런 곳에 오면 항상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경을 하게 된다.
이 사진을 찍고난 직후 5명정도의 청소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롬인(흔히 집시라고 불림)들이었는데 적대적인 어조로 알수없는 언어로 이야기했다.
아마 자기들이 살고있는 곳이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는것 같았다.
상대는 여러명이니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될것같아서 웃으면서 끄덕끄덕하고
장소를 빠져나왔다.
이 쪽으로 쭉가면 비잔틴 요새 유적이 남아있다고해서 가보려했는데 가는 도중에 들개들이
짖으면서 달려들어서 크게 다칠것같아 다시 왔던길로 돌아왔다.
이때 황급히 길건너편으로 걸어가자 개가 쫓아오려고 했는데 다행히 트럭이 개 앞을
휙 지나가줘서 개도 쫄아서 몇 초를 허비하면서 꽤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보니 걸어서 갈 거리가 아니었고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구글링해서 퍼온 사진인데 이 곳이 원래 가려고 했던 아반타스 성채라는 곳으로
12세기 동로마제국 시대에 지어진 곳이다.
이 깃발은 마케도니아 지역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깃발에 있는 문양은 베르기나의 태양으로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을 상징한다.
내가 그리스를 방문했을 당시엔 북마케도니아 공화국(통칭 FYROM)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FYROM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역사가
도둑질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하다.
북마케도니아라는 이름으로 타협을 봤다지만 역시 이에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인들도 많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이름도 결국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면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인들이 발해라는 이름의 나라를 건국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나도 그리스 역사를 알기전에는 마케도니아하면 찬란한 역사를 지닌 대제국이 아닌
발칸반도에 붙어있는 소국을 연상했다.
부두에 정박중인 페리선을 볼 수 있었는데 에게해를 내해로 쓰는 그리스답게 수많은 노선을 운행한다.
1880년 프랑스 회사에의해 지어진 등대로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이 곳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는데 앞에서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있었는데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서 한국에서 왔다고하니 알렉산드로폴리스의 주민이라고 했다.
카페에 들어가서 그릭커피를 시켜서 마시는데 웨이터가 나에게 오더니
"저 사람들이 커피를 계산했다." 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웨이터의 손은 아까 카페 입구에서 이야기한 사람들을 가르키고 있었다.
예상치못한 호의에 그들의 테이블로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카페 입구에선 짤막하게 이야길 했지만 자세히 그 친구들의 직업이나 사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알게되어 너무 즐거웠고 이번 여행에서 보석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인스타그램을 교환했는데 꼭 다시 만나게 되길 소망한다.
Odos Basileos Alexandrou(알렉산더왕 거리)는 알렉산드로폴리스 행정의 중심지로 공공건물이
늘어서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신고전주의 건축물로 2014년에 새로 지어졌다.
색감도 아름답고 요소요소 반영된 그리스의 건축양식이 눈을 기쁘게 한다.
원래 자리에 있던 건축물로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이다.
새로 지은 건물은 이 건물이 연상되도록 지어졌다고하는데 그전엔 몰랐지만 이 사진을보니
상당히 닮아보인다.
위의 건물이 여러번 개조를 거친 모습이다.
한국에 있는 일본식 건물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아직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꽤 많지만
개조를 많이 거친 탓에 원래의 모습을 잃은 경우도 많다.
작은 성당이 보인다.
멀리서봐도 정교회 성당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은행의 알렉산드로폴리스 지점이다.
알렉산드로폴리스 우체국으로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
갈매기가 사색에 빠진것같이 보인다.
사실은 내가 사색에 빠진 것인가!?
아쉽지만 알렉산드로폴리스 여행은 여기까지 끝을 맺게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달려 코모티니로 돌아오게 되었다.
코모티니에서 머물때 이 곳에서 간식거리, 생필품등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유럽은 대도시에서도 이정도 2층짜리 마트를 찾기도 쉽지 않다.
슈퍼마켓에 올리브유와 기타 식용유만 이렇게 많다.
크레타섬의 올리브유가 가장 품질이 좋다는데 한국에 수입되는 그리스 올리브유는 가격이 아주 비싸다.
글리코사의 포키가 유럽에선 미카도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미카도의 존재를 알게된건 이탈리아인 친구 밀레나에게 빼빼로 사진을 보여줬을때
그거 미카도 아니냐고 했을 때였다ㅋㅋㅋ
코모티니에서 마지막 날을 만끽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그리스 사람들이 트라키아를 여행하는 나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한국에서도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가 아닌 곳의 사찰 같은 곳에 외국인들이 방문할 때가
생각보다 많다. 그럴땐 부정적인 인상보다 의아함과 즐거움을 느끼는게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가끔 호기심이 많거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볼 것이고 말이다.
그리스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다.
밤이 되자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다.
새벽에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던 코모티니..
그런 코모티니에서의 시간도 저물어 간다.
다음날 일어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테살로니키에 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걸어갔다.
오른쪽에 있는 알파뱅크는 유로가 떨어지면 이 곳 ATM기에서 돈을 뽑아썼다.
알파뱅크를 지나면 오른쪽에 기로스 가게가 하나 있었다.
기로스 가게엔 영국에서 꽤 오래 살았다는 그래서 영어를 아주 잘하는
그리스 청년이 나를 반겨주었는데 나에게 몇마디의 그리스어 문장을 가르쳐주었다.
짧은 여행이지만 이렇게 작은 인연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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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한글로는 크산티(Xanthi)로 표현하는것 같지만 실제 발음은 산씨(띠와 씨의 중간)라고 부르는데
크산티로 표현하면 마치 내가 가지않은 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영 어색하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근처에 있는 이 곳을 발견했다.
담배창고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트라키아 지방의 담배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이 지역에서
생산된 담배는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3번째로 큰 농구장이다.
성 라파엘, 니콜라스, 이레네 성당(그리스어로는 라파일, 니콜라우, 이리니)이라는 곳이다.
멀리서보니 미쳐 다 지어지지않은 성당이 아우라가 굉장해서 찾아갔다.
원래 들어오면 안되는 것 같았는데 어떤 중년의 그리스 여성분이 들어가길래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서 성당을 둘러보고 있는데 정교회 신부님께서 오더니 짧은 영어로 친절하게 환영해줬다.
내가 구경하고 있을땐 신부님이 불편한 눈치를 주거나 빨리 나가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나중에 나갈때 보니 신부님이 대문을 잠궜는데 원랜 공사중이라 개방을 안하는 것 같다.
이런 경험은 그리스에 있는 다른 곳에서도 경험했는데 혼자서 지키는 소규모 전시관 같은 경우
내가 마지막 입장시간을 약간 넘겨서 들어왔을때 굳이 불편하게 안하고 살짝살짝 지켜보다가
관람을 다 마치고 나가면 잘가라고하고 문을 닫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식 친절이라는건가...
(물론 이건 예외적인 경우니 독자분들은 그리스를 여행할때 꼭 입장시간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린다.)
사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신부님들이 대부분 너무 친절했다.
이탈리아에선 관광지를 주로 다녀서 그런지 신부님들과는 이야기할 일이 없었는데
그리스에선 신부님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그리스의 성당도 속전속결로 짓지않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짓는다고 한다.
정교회 성당 앞엔 이렇게 그리스 국기와 정교회 깃발(원랜 동로마 제국의 깃발이었다.)이
걸려져 있다.
이것은 그리스가 오스만령이었을때 정교회가 사라진 비잔틴 제국 대신 구심점으로서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인데 그리스에서 정교회의 위치는 민족종교로서의 성격도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 남부에서 한번씩 볼수 있었던 양식인 것 같다.
건축물은 세월을 머금을수록 아름답다.
테라스가 보기좋게 꾸며져 있었다.
성 12사도 성당이라는 곳이다.
특이하게도 펜던티브 돔양식이 아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정교회 성당이다.
190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1954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포스팅을 하면서 느끼지만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은 대부분이 국내 웹사이트는 물론이고
위키피디아나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혹시 몰라서 여행중에 성당 이름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찍은게 도움이 되었다.
파사드의 모자이크는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왼쪽과 오른쪽엔
각각 베드로 성인과 사도 바울이 표현되어 있다.
성당에 들어가니 봉사하시는 아주머니가 반겨주셨다.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가면 신부님이나 직원분들이 반겨주는 경우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유의미하게 아주 많았다.
그것은 정교회가 우월하다는 의식이 아닌 진심으로 정교회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친절함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개신교회를 내가 근처에도 가지 않는 이유가 너무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너무들 쉽게 개종권유를 하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서울 아현동에 있는 정교회인 성니콜라스 대성당의 성화와
비슷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 성당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
사실 내 블로그에선 성당장식중에선 모자이크 작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도 중요한 요소이다.
모자이크와 마찬가지로 스테인드 글라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성서'라고
불릴 정도로 문맹이었던 사람들에게 성서를 대신해서 신앙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도 단순히 아름답고 멋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모자이크처럼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돼있다.
사진처럼 성모님이 입고있는 옷의 색깔인 파란색은 하늘, 희망, 성실, 경건을 상징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입고있는 옷색깔인 하얀색은 주로 신을 위해 표현하는 것으로
순결, 순수함을 의미한다.
'간구' 성화는 주로 모자이크에만 봤는데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건 처음이었다.
왼쪽에 있는 깃발이 정교회를 상징하는 쌍독수리 깃발이고 오른쪽이 그리스 국기이다.
사실 국기가 성당에 걸려있는게 일반적인 모습은 아닌데 이런 예외적인 특징이
나타난 이유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 통치하에 있을때 정교회를 구심점으로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했고 그리스의 독립에도 정교회가 일익을 담당했다.
쌍독수리 깃발은 후기 동로마 제국을 상징했던 쌍독수리 문양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당시 쌍독수리 문양이 깃발로 사용된 적은 없고 옷에 자수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곳은 '디모티키 아고라' 라는 곳으로 육류와 수산물, 과일 등을 파는 전통시장이다.
1935~4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았다고 하는데 도시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잃었다고 슬퍼하는듯 하다.
한국같은 경우는 보존을 위해서는 건물을 성격을 바꾸기도 하는데 여긴 건축물이
원래 용도로 사용되게끔 하려는 의식이 있는 것 같다.
건물 내부에도 흑백사진으로 시장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현대 건축물이지만 반복되는 아치의 모습이 인상깊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치 양식이 처음 도입된 곳은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된 로도스섬의 인도교라고 한다.
크산티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다.
성당의 디자인이 코모티니에 있는 성모희보 대성당을 연상하게 했다.
전통성과 현대의 기술이 만난 완벽한 디자인이고 더 빼고 더할 것도 없다.
그냥 그대로 이 자리에 있으면 충분한 아름다움을 준다.
돔양식은 기독교 건축에서 발견되는 최고의 성취가 아닐까?
판토크라토르는 그리스어로 만물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세계의 왕들처럼 왕관을 쓰거나 왕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돔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눈은 인간의 영혼을 직접 들여다 본다.
사전지식없이도 판토크라토르와 마주했을때 신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가톨릭의 성화는 본래 정교회랑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많은
발전이 있었다.
정교회 미술도 변화는 있었지만 급격한 변화보단 비잔틴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비잔틴 성화를 보다가 근세 서유럽 성화를 보면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곳은 크산티의 랜드마크인 시계탑으로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것이다.
1972년 크산티현청에 의해 철거될 뻔했다.
이유는 이 시계탑이 도시 한가운데에서 시민들에게 오스만제국 시대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 소수인종단체를 고려하여 시계탑은 보존하는 쪽으로 선회하되
시계탑에 붙어있던 대리석 초생달 장식과 아랍어 장식은 제거되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보다 더 험악하다.
지난 일들은 다 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기엔 과거의 끔찍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성 블라시우스 성당으로 1838년에 지어진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옛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진 저택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크산티도 다른 트라키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그리스 영토가 된 곳이다.
여기도 이렇게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다.
그리스도 한때 난개발이 심하게 이뤄졌지만 현재는 오래된 건물들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재개발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구의 2동, 객관적으로 봐서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푸근하고 정감이 갔던 그 동네가 지금은 구역 자체가 사라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
마치 전쟁에서 미사일을 투하해서 마을 하나가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에클레시아 아기오 게오르기우스 우리말론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이다.
1842년에 지어졌으며 이 성당을 보자마자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것임을 확신했는데
오스만 시대 말기까진 돔형 성당을 짓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교회 종탑에 다소 소심한
인상을 줄 정도로 작게 표현된 돔의 모습이 그 것이다.
오스만 제국 때 지어진 정교회 건축물들을 보면 외관이 최대한 교회스럽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정도로 종탑이 없으면 교회인지 그냥 집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관은 수수했지만 내부는 그래도 측랑도 있고 의자들도 세월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보통 돔이 있는 곳에 판토크라토르 성화가 있는데 이 곳은 돔은 없지만 천장에 판토크라토르 성화를
설치함으로서 돔의 부재를 보완하려 했다.
성당을 버티고 있는 코린토스 열주를 보면 정교회가 단순히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고
그리스 로마 문화의 타임캡슐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종교의 보수적인 면을 봤을때 돌을 던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보수성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과 그리스 로마 유산이 지켜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정교회를 온전히 지켜주던 모체가 사라졌을때 그리스 문화도 함께 잊혀져 갔다.
신부님이 크리스챤이냐고 물어서 가톨릭이라고 하니까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한때 원수였던 점, 그리고 대부분의 원인이 가톨릭왕국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상기하면 내가 머나먼 동아시아에서 오긴 했지만 그렇게 따뜻하게
환영해주신 것에 대해 존경심이 일었다.
또한 이 곳엔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와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는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메흐메트 파샤 빌딩이라는 곳인데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건물이다.
크산티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크산티하면 이 실루엣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터키식 가옥이 눈에 띄었다. 보존상태도 좋고 잘지은 집이다.
이 가옥은 현재 시립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나 전시가 비정기적이기 때문에 닫혀있을때가
많다고 한다.
이 곳은 크산티 민속역사 박물관이다.
원래는 담배를 취급하던 거상이었던 Vassilis Kougioumtzoglou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말기는 크산티가 도시로서 가장 번영하던 시기였다.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가보자.
트라키아 지역 전통 복장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전형적인 그리스 복장과 많이 다르다.
그리스하면 연상되면 헬레니즘적인 복장이 아닌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스도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지역별로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전통복식도 다 다르다.
다이닝룸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시대 그리스 부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오스만 제국 말기에 등장한 그리스인 거상들은 향후 그리스 독립에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박물관 내부는 정성스럽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호화로운 저택이지만 당시 모든 그리스인들이 이런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스만 제국 말기 법적으로 이교도 신민들의 처우가 다소 나아졌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개종하지 않고도 외교관, 상인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았던건
사실이지만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인 파이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유한 그리스인들은 한정적으로 존재했다.
그런 부유한 그리스인들의 삶을 이 저택에서 느낄 수 있다.
관람을 거의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리스인 할아버지가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해서
남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젊은 시절에 1960년대때 한국에서 해외자원봉사단체를 통해
한국에 계신적이 있었다고 한국 도시들의 지명을 이야기해주셨다.
할아버지도 일행이 있으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다.
언어의 차이로 인해 서로 생각하는 바를 전부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한국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시려는걸 느낄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헤어질때도 못내 아쉬웠다.
한국엽서나 조그마한 기념품이라도 있으면 드렸을텐데 아쉽게도 가지고 있는게 없었다 ;;
이때 교훈으로 여행을 할땐 한국 관련 기념품들을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1839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도시에서 오래된 성당 중 한 곳이다.
이 성당앞에 작은 광장이 있는데(사진에 일부가 보인다)
벤치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묻더니 한국이라고 하니까
북한 김정은 얘기를 하며 폭탄이 터지는 흉내를 입으로 내며 김정은을 조심하라고 했다ㅋㅋ
유쾌한 아저씨였다.
1934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이곳에는 원래 작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크산티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물음표가 인상적이었다.
이걸보니 꼭 뭔가 질문을 해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는데 아무말 대잔치같이 질문을
해보자면 서트리키아와 동트라키아는 달라?라는 것이다.
아마 원랜 같았으나 지금은 다르다는 대답이 어울릴 것이다.
갈라진 두 지역에 사는 민족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지역이 나눠져도 괜찮아?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이 세상의 지도엔 너무 많은 모순이 있으니
지금 현실에 순응하고 최대한 더 나쁜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곳에선 히잡쓴 사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곳이다.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코모티니로 다시 돌아왔다.
여긴 공원인데 숙소에서 이 곳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겨울만 아니었다면 앉아서 여유를 만끽했을텐데 아쉽다.
옷이 더러워져서 무인빨래방으로 왔는데 그리스어를 읽지못해서 세탁기 조작에 어려움을 겪다가
친절한 현지인 남성의 도움으로 세탁을 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또한 티비에 그리스팝 방송을 틀어놔서 몇곡을 스마트폰으로 인식해서 나중에 따로
찾아서 들어보았다.
숙소로 와서 스파르탄 맥주를 먹었는데 고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 부대의 공격처럼
시원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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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4~0205 그리스 - 코모티니: 성모희보 대성당, 비잔틴 요새
결국 몇일간 컨디션이 안좋더니 몸살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그리스 입국 첫날에 새벽에 돌아다닌게 탈이 난 것 같다.
몸에 열이 나고 기운이 빠져서 오전 시간은 제끼고 누워서 잠을 잤다.
오후엔 상태가 좀 나아져서 밖으로 나왔다.
비올레타가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가이드를 해줬다.
이 요새는 14세기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지어졌다.
20세기 초만해도 보존상태가 양호했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그리고 그리스 공화국 모두 책임이 있다고 한다.
십수년 전만해도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었는데 몇년전에 보수공사를 마친 상태라고 한다.
20세기초 비잔틴 성벽의 모습이다.
망루의 모습이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곳은 코모티니에서 유명한 카페로 오래된 신고전주의 건물을 복원했다고 한다.
내부도 아주 고풍스럽다.
트라키아 출신 그리스인 거상이었던 Nestor Tsanaklis가 후원하여 1907년에 설립된 학교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의 흉상이 있었다.
코모티니는 지역대학이 있기 때문에 교육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거리를 지나다닐 때에도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도시가 젊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된 담배창고라고 한다.
한때 코모티니는 담배관련산업으로 번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무리하지 않기로 해서 여기까지 보고 숙소로 들어가서 쉬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몸살기운에서 회복되서 일찌감치 숙소에서 나왔다.
이 곳은 코모티니 번화가로 새벽에 이 곳에서 버스가 하차한 곳이다.
그땐 새벽 6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은근히 가게에서 삼삼오오 모여있었는데
깜깜해서 아무도 없는 풍경보다 오히려 안심이 되고 좋았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위험해보이거나 시비거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너무 편안했다.
저 앞엔 그리스의 유명 카페 프랜차이즈인 '커피 아일랜드'가 보인다.
그리스에 갈때마다 꼭 들리는...
그리스 사람들은 더 좋은 곳을 많이 알고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일단 유명 프랜차이즈를
알아두면 어느정도의 맛은 충분히 보장된다.
유럽의 소도시들은 문을 일찍 닫는 가게들이 많은데 이 곳 코모티니는 새벽까지도 문을 여는 곳들이
많아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에 나와보면 다양한 업종의 가게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임대료가 비싸지면서 최소 150~200만원의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어렸을때 동네에 있었던 NBA카드를 팔던 가게가 생각난다.
서부 트라키아 지역은 흔히 산토리니로 대표되는 우리가 아는 풍광좋고 따뜻한 그리스와는
거리가 있다. 겨울날씨는 한국과 비슷할 정도다.
1608년에 건축된 Eski Mosque라는 곳으로 '옛 사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도시에 있는 Yeni Mosque(새 사원)보다 이후에 건축되었는데 저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 전에 존재했던 사원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Yeni Mosque라는 이름은 마치 정교회의 수많은 Ἁγία Σοφία(아야 소피아)처럼
아나톨리아에서 흔하게 사원에 붙는 이름이다.
1910년 불가리아 인들은 사원을 성당으로 바꾸고 미나렛을 파괴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미나렛은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왜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통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아에 있는
쉴레이마니에 자미나 술탄아흐멧 자미 같은 거대한 사원이 없는 걸까?
혹시 있었다가 파괴되었는지 조사해봤지만 그런 사원은 검색되지 않았다.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지역 중에 그리스 지역은 상대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코모티니에 사는 무슬림들에 대한 대우는 어떠냐고?
그리스의 무슬림 커뮤니티들은 자유롭게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이 곳은 유럽이고 다른 문화권에 비하면
소수자가 법적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에서 무슬림들을 공식적으로 '터키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꺼리고 있다.
무슬림들이 전부 터키인들은 아니거니와 이들이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이 곳은 트라키아 음악학교로 공연도 자주 열린다고 한다.
그리스 사람들 이미지는 산토리니에 있는 아름다운 단독주택에서만 살 것 같은 이미지인데
도시에서 사는 그리스 사람들은 아파트나 연립주택에 많이 산다.
왜냐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있고 인구는 몰려들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터키식 이슬람 사원이라 표기는 자미(Camii)라고 하고 싶지만 그리스에서 터키식 사원을
따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 정책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모스크로 표기했다.
이런 집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어서 내겐 용산의 오래된 집들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유럽에 대해 전혀 모를때는 유럽하면 다른 나라를 먼저 떠올렸는데 막상 가보고 생각이 바꼈다.
근세시대 넘치던 부로 분칠을 한다고해도 넘을 수 없는 찬란한 문명의 흔적이 그리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곳 그리스를 포함한 이탈리아, 터키에 매력을 느낀다.
남아있는 첨탑은 사원의 미나렛으로 쓰이던 것이다.
그리스에 남아있는 구 오스만 제국 이슬람 사원들의 첨탑을 보면 하나같이 고깔모양이
제거돼있는데 이게 어떤 원칙인지 궁금하다.
90년대에 한국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첨탑을 제거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가 독립하고 수백개의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뿌리깊은 미움에서 그랬을 것이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만 해도 패전한 일본인들이 돌아가고 나서 분노한 백성들이 일본신사나 절들에
대신 화풀이를 하지 않았는가?
그리스인들이 알아서 할일이지만 내 개인적인 바램으론 철거하는 것보단 보존해서
다른 용도로 썼으면 좋겠다.
비잔틴 성벽은 군데군데 끊겨있는데 원래 있었던 면적의 60%정도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뭔가 동아시아 전통건물 느낌이 났다.
작은 예배당이 있는 종탑이었다.
지난번 저녁에 찾았던 올드 마켓이다.
코모티니에 있는 모스크만 10개가 넘는다.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에서 로마자를 쓰지 않는 나라는 그리스가 처음이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물이라고 한다.
1967년에 건립되었다.
기념물에 장식된 검의 길이는 코모티니의 해발 높이와 일치한다고 한다.
성모희보 대성당이다.
산씨에 있는 아야 소피아 대성당과 디자인이 흡사하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새벽에 여기서 시간을 좀 때웠는데 벤치에 앉아있다가 얼어죽을 뻔한 곳이
이 곳이다.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정교회의 위대한 전통에 따라 지어진 성당이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성당이 뭐냐고 물어보면 성베드로 대성전이나
라테라노 성당을 이야기 할 것이고 프랑스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노틀담 대성당을 이야기 할것이다.
그리스인에게 물어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있는데 그리스를 대표하는 성당이 어디인지에 대해
물어보면 다 다른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 밖에 있는 곳을 이야기하기도 한다.(예: 하기아 소피아)
즉 지역을 대표하는 성당은 있어도 그리스 전체를 대표하는 성당은 없다.
대신 그리스의 많은 성당들이 하기아 소피아와 전성기 비잔틴 성당들이 가졌을 화려함을
재현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사실 가수들의 베스트앨범이 의도적으로 히트곡이 한두개씩 빠져있듯이 비잔틴 문화도
한군데만 가서는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초기 비잔틴 문화를 보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를 가야되고
콘스탄티노플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는 터키의 이스탄불로 가야되고
전례와 온전한 형태로의 복원을 보기 위해선 그리스로 가야한다.
따지자면야 시리아에도 있고 불가리아에도 있겠지만 대략적으론 세 지역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면 비잔틴 퍼즐이 맞춰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당의 입구에 Deesis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었다.
현대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들은 이처럼 입구에 모자이크가 장식된 경우가 많고
성당내부는 주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성모님
세례 요한
성당내부는 외부에서와 같이 비잔틴 스타일이었다.
양쪽의 측랑과 후진, 돔구조까지 완벽한 비잔틴 스타일이다.
비록 현대에 지어진 성당이지만 이 완벽한 디자인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성당의 바닥은 천국의 완전성에 대응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고급 대리석이나 목재로 바닥을 장식한다.
이런 특징은 보편교회와 정통교회 두 군데서 모두 발견된다.
사진의 원형 샹들리에는 정교회에서 '호로스(Horos)'라고 불린다.
정교회에서 흔들리는 호로스는 신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교회의 특징은 첨탑대신 돔을 건축한다는 것이다.
원랜 정교회와 가톨릭 둘 다 돔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로 정교회 건축의
특징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도시에 하나씩은 볼 수 있는 큰 성당 정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온전한 판토크라토르 성화를 보고 경외심을 느꼈다.
내 존재는 한없이 작은 존재로 느껴졌다.
대성당앞에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간혹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라는데 지나가다 찍어봤다.
1884년 오스만제국 술탄 압뒬 하미트 시대에 지어진 시계탑이다.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오스만 제국 근대화 시기에 지어졌다.
새로운 사원이라는 뜻의 Yeni Mosque로 1600년을 전후해서 건축되었다.
코모티니에 위치한 모스크 중에선 가장 오스만 제국의 느낌이 난다.
사원의 내부는 아나톨리아 이즈닉에서 제작된 타일들로 장식되었다.
무슬림 이야길 더 해볼까 한다.
그리스와 터키간 인구교환때 그리스 땅에서 터키 땅으로 이동한 무슬림들은
터키인뿐만 아니고 그리스인 무슬림도 포함되었다.
사실 모호함 투성이었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 사람들은 수많은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어를 하는 터키인 무슬림, 터키어를 하는 그리스 정교회교도, 극히 소수였지만
그리스어를 하는 터키인 정교도 까지...
이들 모두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자신들의 존재 그대로 양국가에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슬람을 믿는 그리스인 무슬림들이 터키와 그리스 중에 어느 편에 써서 싸웠을지를
생각하면 이 시대를 간단히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혼자 돌아다니다가 출출해서 사람들이 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기로스를 주문했는데
다 그리스어로 되있어서 내가 이해를 잘 못하니까 점원분이 영어로 설명을 해줬다.
그리스도 참 친절한 나라다....
첫날에 갔던 카페에 다시 가서 그리스 커피를 즐겼다.
여긴 가게 규모도 아담한데 동네 아재들이 들르는 정겨운 곳이다.
번화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니 많은 빈집들이 보였다.
도시의 분위기는 우중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보이는 아름다운 날씨가
이 곳이 그리스임을 일깨워 준다.
이 곳은 버려진 집들이 꽤 눈에 띄었는데 이런 집을 고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현실적으론 말도 안되는 망상이지만...
이 집은 아마 철거할 것 같아 보인다.
다소 관리가 잘 안돼보였지만 아름다운 집이다.
불가리아도 이 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데 비잔틴 유적이 어느정도 남아있다고 한다.
나중에 터키에 갔을때 불가리아도 가보려고 했지만 다시 지옥의 버스여행이 될 것 같아
그냥 비행기타고 아테네에 박물관 투어를 하러 갔었다.
비올레타와 Sultan Tepe라는 터키 음식점에서 케밥을 먹었는데 터키에서 먹던거랑
별로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가격은 당연히 터키보다 비쌌다.
요거트 먹어봤는데 우리나라랑 달리 단맛이 적었다.
그리스에 왔으니 그리스 맥주를 샀다.
알파라는 이름의 밀맥주인데 부드럽고 맛있었다.
맥주로는 그리스가 아시아에선 유명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맥주도 잘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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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정도 자다가 일어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1달간 겨울에 밖에 싸돌아 다니고 무박버스여행도 여러번 했으니 탈이 날만도 했다.
그리스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생각이 복잡하다.
근데 이번여행에서 하루도 쉬지않고 달려왔으니 이제 좀 쉬는 것도 좋겠다.
한국사람들보면 여행도 일하는것 처럼 한다고 하지 않나..
사실 일정을 널널하게 잡은게 다행이다.
만약 여기서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이나 이탈리아 콜로세움같이 시간이 정해진
입장권을 예약했다면 어쩔수없이 봐야했기에 힘든 여행이 됐을 것이다.
숙소는 Orpheus Hotel이라는 곳에 묵었다.
간만에 호텔에서 묵게되서 편하게 잘 지냈던 것 같다.
직원들도 내가 들어올 때마다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리스 친구인 비올레타를 만나 카페로 갔다.
그릭커피 한잔을 마시니 몸이 좀 풀리는 듯했다.
숙소로 가서 다시 잠들었다.
전날에 일찍 잠이 들어서 그런지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그리스의 명물 프레도 에스프레소를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사장님이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동계올림픽이야기를 했다.
나는 외국여행을 오면 굳이 상대방이 물어보지 않아도 항상 내가 한국인임을 어필하는 편이다.
이런 비관광도시에 올때는 로컬주민들이 나를 보면 약간 놀라는 사람도 보인다.
그게 싫어서 보는 시선은 아니고 그야말로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시선이다.
가게가 마음에 들어서 몇번 방문했는데 2번째 방문할때 카페 사장님이 바로 알아봤다.
하긴 동양인은 여기 나 하나 뿐이니 기억하지 쉽지 하하!
빵도 주문해서 먹어봤는데 괜찮았다.
터키에서 보던 아이란이 여기에서도 있었다.
아이란은 요거트+물+소금의 혼합물이다.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는 이처럼 돔부분이 루프타일로 덮혀있었다.
모스크도 비슷하게 루프타일로 덮혀있었는데 터키에 있는 종교건물들은
돔이 매끈하게 금속으로 마감되 있었는데 이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독립 이후에 그리스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들을 보면 비잔틴 양식을 계승한
성당들이 많이 보인다.
반면에 오스만 제국 시대 이스탄불에 지어진 현존하는 정교회 성당들은
탄지마트 개혁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비잔틴적인 특징을 배제하거나
건물사이에 숨어있어서 저게 성당인지도 모르게 생긴 경우도 꽤 있다.
이는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는 정교회 성당 본당에 돔을 건축하는게
1839년 탄지마트 개혁까지 금지됐었기 때문이다.
개혁 이후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비잔틴적인
특징들이 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부분에선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돔의 마감이 다르다는
특징들로 인해 두 국가가 다른 국가라는걸 실감할 수 있다.
코모티니는 14세기 동로마 제국 시대에 코무치나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인근에 있던 모시노폴리스에서 이주한 그리스인들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다고 한다.
1361년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한 코무치나는 소아시아에서 많은 터키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외에 포마크인(불가리아 무슬림), 유대인, 롬인(집시)들까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코모우치나는 터키어인 '규뮬지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20년 로잔조약체결 전까지 도시의 무슬림 인구가 정교회 인구보다 많은 도시였다.
인구교환때도 서트라키아 지역의 터키인들은 교환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에 도시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터키 양국간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상당수는 아나톨리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지금도 코모티니의 무슬림 인구는 도시의 전체인구 중에서 10%정도나 된다.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이 이스탄불 포그롬으로 대거 그리스로 이주한 것에 비하면
조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엔 위의 사진처럼 모스크도 꽤 남아있고(아마도 사라진 모스크도 있겠지만!)
터키 은행인 할크은행지점도 찾아볼 수 있고 터키음식점도 찾기 어렵지 않다.
숙소 근처에 있던 우체국이다.
그리스 공화국이 신생국가임에도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띈다.
도시가 국가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이다.
서울은 궁궐을 제외하면 전쟁과 재개발로 여러번 갈아엎었기 때문에 오래된 도시라는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동네를 좀 둘러보다가 다시 숙소로 가서 쉬었다.
이틀동안 거의 쉬었기 때문에 한게 별로 없어서 분량이 너무 짧기 때문에
나중에 알게된 코모티니 명소를 소개해볼까 한다.
코모티니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져있는 곳에 있는 비잔틴(동로마) 시대에 지어진
모시노폴리스 유적으로 일반인들의 입장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모시노폴리스는 역사에 4세기부터 등장하는데 13세기에 불가리아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초기 기독교 성당이라고 하는데 유적을 둘러싼 농지아래엔 다른 유적들도
묻혀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성당유적을 보존하고 홍보하는데 드는 비용이 30억원정도 된다고 한다.
숭례문 복원하는 비용보다 거의 9분의 1 비용이다.
비올레타가 저녁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서 코모니티 중심지역을 구경시켜줬다.
여긴 코모티니의 명소중 하나인 올드마켓이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많은 가게들이 닫혀있었다.
인테리어가 멋있는 바였는데 여기서 우조를 한잔했다.
투명한 우조 원액에 물을 타면 저렇게 우유색깔로 바뀐다.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지 술이 센건지 먹으니 졸립고 헤롱헤롱했다.
일단 숙소로 가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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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1 터키 - 이스탄불: 부콜레온 궁전, 예레바탄 사르니지,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일찌 일어나서 우선 부콜레온 궁전 유적, 예레바탄 사르니지 등을 둘러보고 탁심으로 가서
자난을 만나기로 했다.
큐축 아야소피아 사원이다. 영어로 리틀 하기아 소피아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한때 정교회 성당이었던 이 곳은 하기아 소피아를 지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에 의해 536년에 건축된 곳이다.
비잔틴 초기 팔각형의 돔은 아직 원형돔으로 발전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자이크나 성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기둥이나 석조부조는 남아있다.
2014년에 큐축 아야소피아 사원을 방문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 성하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께선 개조된 사원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 많은 종교가 화합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바르톨로메오 1세의 말씀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는데 내 종교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는데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슬람 사원이지만 그리스어로 장식된 부조는 지금도 남아있다.
처음 이스탄불에 가면 대체로 하기아 소피아와 술탄아흐멧 자미를 둘러보고 좀더 시간이 있으면
예레바탄 사르니지,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등을 둘러본다.
좀더 시간이 있으면 이처럼 비잔틴 시대 성당에서 개조된 사원을 둘러보면서 원래 구조에서 무엇이
남았는지 찾아보는 과정이 역사의 보물찾기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시간이 있다면 오스만 제국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덜 알려진 자미들을 둘러보면
이스탄불을 좀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나도 아직 이스탄불을 잘 모른다.
자난은 나보단 이스탄불을 훨씬 잘 알지만 역시 아직 가보지 못한 유적지가 많다고 한다.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콜레온 궁전이다.
부콜레온 궁전은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도 꽤 보존이 잘 되있었는데 특히 중앙 파사드부분은
150년 전까지도 건재했다.
그러나 1850년~1870년 사이에 기차 선로를 만들면서 궁전의 일부가 파괴됐고
도굴꾼들에 의해 석조 장식들이 도난당해 지금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자신들의 문화인 모스크(모스크로 개조된 구 비잔틴 교회포함), 궁전, 기타 기념물과 달리
선주민들이 세운 유적(고대 그리스, 비잔틴)들이 가치가 있다는 인식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발굴단이 유적을 뜯어가든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고대 이집트 유산에 대해 자신들의 문화라는 인식도 없었기 때문에 쿨하게 외국에 마음껏 팔아넘겼고
어떤때는 타국에 고대 이집트 사원 하나를 통째로 선물로 주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고대 유적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거나 훼손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알짜배기는 독일에 빼앗겨서 반쪽짜리 유적이 된 베르가마(페르가몬) 유적이고
파르테논 대리석군이 없는 아테네의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다.
서유럽은 이미 고대 유적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터키 공화국은 예전보다 고대 문화유산 보존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터키정부는 이 곳을 야외 박물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리석 표면이 청소되고 풍화 및 마모된 부분은 보수작업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철로건설로 나머지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은 훼손된 파사드만 겨우 남아있다.
부콜레온 궁전의 원래 모습을 표현한 다른 일러스트다.
1850년에 촬영된 부콜레온 궁전 파사드의 모습인데 의외로 중앙 파사드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양쪽에 있는 사자상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이관되어 보존중이다.
궁전에서 떨어져나온 석조부조들이 모여있었다.
몇년전부터 철제펜스가 설치됐지만 예전엔 그냥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후기 동로마 제국이 블라헤르네 궁전을 사용하면서 부콜레온 궁전은 그대로 방치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메흐메트 2세가 이 곳에 왔을때 궁전은 거미줄로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같은 폐허상태는 아니었고 그냥 버려진 상태정도로 추정된다.
황제의 문 측면에 있는 아치가 위태롭게 남아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제1 건축물 하면 하기아 소피아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만 그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궁전 유적이 남아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치상태를 약간 벗어난 수준이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제국의 두 번째 수도에
남아있는 유의미한 궁전 유적이라는 것이 지금도 역사적 가치는 충분한 곳이다.
팍스 로마나라는 명칭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제국의 신민들은 로마인이라는 보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제국도 정복과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이 약해지면서 서양은 더한 정복과 폭력의 시대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유럽역사에서 이민족에 대한 대량학살과 잔인한 통치는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오스만 제국도 결국 신민들을 하나로 묶는데 실패하고
몰락하면서 로마라는 보편제국은 결국 역사에 후계를 남기지 못했다.
바로 위에 올린 황제의 문의 원래 모습이다.
원래 궁전 앞에는 바다가 있었는데 매립되서 지금은 도로가 나있다.
창문의 대리석 프레임이 건재하게 서있다.
기둥이 위태롭게 상층부를 떠받치고 있다.
이 곳은 궁전의 망루였던 곳이다.
궁전의 석벽은 모르타르로 채워진 내부를 석회암 벽돌이 감싸고 있는 구조다.
예전에는 테라스 였을 곳들이 지금은 저렇게 구멍만 남아있다.
구글링으로 가져온 사진으로 원래는 궁전의 작은 예배당이 있었던 곳이다.
원랜 버려진 상태였고 쓰레기 더미에 방치된 곳이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관리는 되는 듯 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오래된 가옥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도 위치는 그닥 좋지않기 때문에 출퇴근시간에 공항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숙박을 말리고 싶다 ;;
Duvares 카페 레스토랑 왼편에 있는 건물이 동로마 제국 대궁전의 일부이다.
궁전의 내부분은 남아있지 않고 아주 극히 일부만 저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원랜 위에 부콜레온 궁전처럼 심하게 풍화가 된 상태였지만 보수작업을 거쳐 말끔한 상태이다.
현존하는 부분은 본래 대궁전의 램프타워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원래 모습으로 지금의 술탄아흐멧 사원과 그 일대가
대궁전 권역이었다.
때문에 술탄아흐멧 사원 아래에 유구가 묻혀있을텐데 모스크이기 때문에 발굴작업이
불가하다고 한다.
먼 미래엔 사원을 훼손하지 않고도 유구를 조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아주 오래된 하맘(터키식 목욕탕)이 남아있었다.
1482년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그랜드 비지어였던 이샥 파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지금은 폐허상태로 남아있는데 소유주가 600만 달러에 건물을 내놨는데 팔리지 않아
원래 가격의 절반인 300만 달러에 내놨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건축된 예레바탄 사르니지에 도착했다.
연대기로 치면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영어로는 바실리카 시스턴이라고 불리지만 가급적 현지 명칭을 부르는게 내 원칙이라
예레바탄 사르니지(지하 저수조라는 뜻)로 표기했다.
이 곳은 예레바탄 사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지하궁전'이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단순히 저수시설을 넘어 로마시대 궁전이 지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도 그럴것이 옛 신전에서 쓰이던 기둥과 건축부재들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탑은 한 때 저수조의 일부로 기능했다고 한다.
화질이 좋지 않은 이유는 삼각대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장할때 직원이 삼각대를 검사해서 퇴장할때까지 보관한다.
이 곳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여러번 배경으로 등장한 곳인데 최근엔 영화 인페르노로
유명해진 곳이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에서도 등장한다.
일부 기둥은 휘어져있었는데 좀 불안해 보였다.
기둥의 부조를 보면 저수조로 쓰이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지하궁전이라는 이 곳의 또 하나의 별명이 과장이 아니다.
현재의 예레바탄 사르니지는 관람을 위해 물의 수위를 낮게 조절한 상태인데
예전엔 인간의 머리높이넘게 물이 차올랐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건 역시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점이다.
워낙 잘만든 인프라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계속 보수공사를 해서 사용했다.
아쉽게도 이 곳도 위기에 놓인 건축물인데 오스만 제국 때부터 터키 공화국까지
4번의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석조기둥들의 균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더 이상 기둥만으로 저수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위에 사진처럼 금속막대로
기둥과 기둥사이에서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속막대가 작년 말 조사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서 현재 복원작업이 시급하다고 한다.
기둥끝에 메두사 머리가 있었다.
머리가 거꾸로 되어있는 이유는 정면으로 메두사를 보면 돌로 굳어버린다는 이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장 독특한 분위기의 여행지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만 역술인들이 기가 강하다고 이야기하는 장소에 부합할 만한 곳이다.
특유의 마술적인 분위기에 상당히 압도될만하다.
베식타쉬 경기장인 보다폰 파크인데 바다앞에 있어서 스타디움으로 쓰기에 최고의 입지였다.
자난을 만나서 터키 군사박물관에 왔다.
터키의 역사는 전쟁없이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터키 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제 1군 사령부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한 돌마바흐체 궁전을 디자인한 가라벳 발얀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다.
1841년에 지어졌으니 이 건물 자체도 역사인 셈이다.
다르다넬레스 전투에서 주포가 고장나자 Seyit Çabuk이라는 군인이 275kg의 포탄을 직접 옮겼다는
일화를 재현한 것이다.
재미있는건 전투가 끝나고 같은 상황을 재현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들어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Seyit Çabuk 상병은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들어올리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많은 추락사고로 인해 과부제조기로 알려진 F-104이다.
1071년에 셀주크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있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전으로 동로마 제국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는 것이 터키측의 평가이고
생각보다 사상자 피해가 적었다는게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다.
반대로 레판토 해전이 오스만 제국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게 서유럽의 평가였지만
실제론 오스만 제국은 별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역사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니....
나 개인적으론 아나톨리아 중부를 상실한게 단순한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선 그리스+아나톨리아(전통적인 아나톨리아 영역)+크레타섬 3곳은 무조건 사수해야하는데
일단 그리스는 경제력과 수확하기에 최적의 조건이고(단점은 이리저리 흩어져있어서 각개격파 당하기 좋음)
아나톨리아는 그야말로 본진이고 크레타는 에게해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나톨리아 중부를 털린건 나중에 수복을 했다하더라도 해프닝으로 치부할 일은 아닌 것이다.
가운데 있는 생도가 무스타파 케말이다.
이땐 아타투르크라는 이름을 쓰기 전인데 이땐 무스타파(아랍식) 케말(터키식 아랍이름)이라는
이름을 썼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나선 자신의 이름을 K.Ataturk라고 표기하는데 세속주의자로서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거북선 모형이 있었는데 터키의 26대 참모총장이었던 일케르 바쉬부그가 기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참전용사가 기증한 훈장이라고 한다.
제일 아래 가운데 있는 메달은 한국전쟁 터키군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때
감사의 선물로 받은 기념메달이라고 한다.
나머지 전시품은 한국전쟁때 터키군에서 군법무관을 했던 세이피 에르크멘씨가 기증한
군번줄, 팔찌, 태극기 등이다.
한국전쟁때 터키군의 군복이다.
터키병사들은 총알이 떨어지면 총검술로 싸웠다는데 차낙칼레(갈리폴리) 전투에 기록된
오스만 제국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다.
이분들이 목숨걸고 싸웠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은 사실 상투적이지만
사실임에 틀림없다.
이 여행에서 에미노누 근처에 있던 마트에서 계산을 할때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좋아하던
점원이 생각난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6.25 전쟁이 당시 참전국가들의 현 세대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터키사람들은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파병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당시 한반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발발과정과 터키군이 참전한 주요 전투를 다루고 있었다.
군우리 전투, 금양장리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의 설명이 전시되고 있었다.
한국전쟁때 사용됐던 터키군의 깃발이다.
한국에 파병된 터키 군인들을 위해 학생들이 피로 지장을 찍어만든 깃발이라고 한다.
'아일라'로 알려진 한국전쟁때 전쟁고아였던 김은자씨와 터키 병사들이 찍은 사진이다.
한가지 오해를 바로잡을까 하는데 한국전쟁때 터키군이 대부분 쿠르드족으로 구성됐었다는
루머가 정설인것 같이 여겨지고 있는데 당시 터키군의 대부분은 앙카라와 서부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희박한 이야기이다.
당시 터키의 쿠르드족 인구비율로 따져보면 15%정도가 될 것이다.
루머의 소스도 쿠르드인 참전용사에게서만 나온 것이라서 근거가 부족하다.
키프로스 전쟁 중에 그리스계 민병대에게서 노획된 군기라고 한다.
현대 키프로스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1960년에 키프로스는 대략 그리스계 인구 78% 터키계 인구 18%로 영국에게서 독립했지만
그리스계 인구가 터키계 인구를 일방적으로 배제, 차별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민족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운동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리스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그리스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Enosis 운동을 지지했고
터키의 지원을 받는 터키계 키프로스 인들이 키프로스의 분단을 주장하는 Taksim 운동을 지지했다.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터키군이 직접 키프로스에 상륙해서 영토의 37%를 장악하고 9년뒤 분리독립을 선언했고 40여년이 흘러 지금에 이른다.
현재 상황은 그리스계가 이끄는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3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통일에 소극적인 상태이다.
터키계가 이끄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은 터키 이외에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제금수조치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탈피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대체로 여론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24%가 통일에 찬성하고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65%가
통일에 찬성한다.
통일 논의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에서는 2국가체제를 원하고 있는데
이는 섬의 영구적인 분할을 의미한다.
남키프로스 입장에서는 1/4밖에 안되는 북키프로스 인구가 영토의 37%를 차지하는것에
불만이 많고 분리독립 이후에 북키프로스 지역으로 이주한 아나톨리아 터키인과
팔레스타인 등에서 이주한 아랍인들에 대해 키프로스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양쪽이 납득할만한 재조정이 없는한 2국가 체제는 힘들어 보인다.
(남키프로스에선 분단 이전의 터키계 키프로스인과 그 자손들에 대해서만 키프로스인으로 인정한다.)
북키프로스 입장에선 40%에 가까운 땅이 비록 무력침공이지만 아버지 세대의 피값으로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포기할리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키프로스를 국가로 인정할 경우 탄압받는 소수민족은 얼마든지 무장투쟁을 통하여
분리독립을 해도 좋다는 안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을 얘기해보면 그리스계의 쿠데타 시도는 잘못되었고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물론 터키계도 나중에 그리스계를 살해한게 사실이지만 처음엔 그리스계가 가해자의 위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터키군의 쿠데타 진압은 진압으로 끝냈어야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이유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섬의 미래를 위해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
이 깃발은 그리스 독립전쟁때도 쓰였던 깃발인데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병대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전시실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유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이끌던 터키 공화국은 세계에서 손꼽힐정도로 법과 제도가 앞서간 국가였다.
지금의 터키는 중우정치로 전락한듯하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터키군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모형이 있었다.
한국 전쟁기념관이 기증한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냥 모형일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터키인들이 한국에 이런 기념비가 있는지 모를텐데
우리의 존중을 잘 알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100년의 터키와 한국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최근 터키가 반미노선으로 갈아타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터키 경제제재가 있었다.
현재 터키에선 반미정서가 상당한데 미국이 세속주의 터키를 '온건 이슬람' 국가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영향력이 약했던 터키에 대해 굳이 종교를 강화해서 온건 이슬람 국가로 가공하고 싶어했다.
우선 세속주의자들 입장에선 미국이 온건 이슬람 국가로 터키를 변화시키려고 하는게 세속주의에 대한
파괴로 받아들였는데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절대 온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슬람주의자들 입장에선 미국의 계획이 이슬람주의자들을 길들이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저 이슬람이 있을뿐 온건 이슬람이란 것은 없다고 언급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미국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온건 이슬람'을 표방하는 페툴라흐 귤렌(이하 FETO) 세력을
지원하는 실책으로 이어졌다.(실제론 귤렌 세력은 전혀 온건 이슬람이 아니라는게 세속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FETO 세력은 터키의 군, 경찰조직내에서 세속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터키와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언젠가는 한국도 몇년전 이란의 경우처럼 선택을 강요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런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난이 예전에 자주갔다는 Tıkıntı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다.
포르투갈식 치킨이라는 뜻인 Portekiz Usulü Piliç을 먹었는데 역시 너무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이랑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잔했는데 일이 있어 자난은 먼저 가고
나는 좀 더 시간을 때우다가 밖으로 나왔다.
몇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터키라는 나라와 정이 들은것 같다.
내가 이 곳 베식타쉬를 좋아하는게 도시가 젊은 느낌이 들고 이름도 베식타쉬할때
공기가 새는 느낌이 세련되게 느껴지고 좋았다.
그리고 몇일전 자난과 베식타쉬의 골목을 지날때 카페 웨이터가 한국사람맞냐고 하면서
한국사람들이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떠나기전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부조를 보기위해 술탄아흐멧 광장에 들렀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궁정을 묘사한 부조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서 그런지 부조에 새겨진 로마인들의 모습이 서글퍼보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승전을 기념한 부조이다.
아래쪽 쐐기자국은 오벨리스크를 옮길때 생긴 흔적이다.
부조를 보면 신기한 것이 한쪽은 라틴어로 돼있고 한쪽은 이렇게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제국의 공식언어로서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둘 다 사용됐던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돌로만 쌓은 성들을 보면 몇십년 관리안하면 우수수 무너져버리는데 몰타르로 만든 로마의 건축물은
천재지변과 변덕스러운 기후 앞에서도 천년이 넘게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술탄아흐멧 광장은 여기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숙소로 가서 매니저인 라마잔씨랑 작별의 인사를 했는데
한국과 터키는 매우 특별한 관계라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지 아니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고 물어보길래
Selanik(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제국 시대 이름)으로 간다고 했더니 좋은 곳에 간다고 나를 부러워했다.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시대 제2의 도시로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터키인들에게는 많은 향수가 어린 곳이다.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때 돌아온 사람들이 거의 테살로니키나 크레타 출신이 많다.
사실 어떤 터키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면 아직도 영토수복을 꿈꾸는줄 알고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어떤 그리스인들은 터키사람들이 테살로니키를 셀라닉이라고 부르면
아직도 오스만제국인줄 아냐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베야지트 사원으로 아쉽게도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화질이 좋지 않다.
1년뒤 베야지트 사원에 방문했을땐 복원중이라 입장이 불가하고 작은 기도실에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 곳도 나와 인연이 없나보다 ㅠ
이때 트램을 타고 악사라이 역으로 가려고했는데 퇴근시간이라 전동차가 만차라 배낭을 메고
도저히 탈수가 없었다.
시간이 그래도 넉넉해서 포기하고 베야지트 사원에서 악사라이 역까지 걸어갔는데
출퇴근 시간에 술탄아흐멧에서 공항이나 터미널로 가는 분들은 일찍 나오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1783년에 건축된 라렐리 사원이다.
이 모스크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서유럽의 문화가 오스만 제국으로 조금씩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보다 훨씬 서양의 기술을 먼저 받아들인 오스만 제국도 결국 무너졌는데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는게 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 사원의 유지를 위해 상인들을 위한 캐러밴도 같이 건설했다고 한다.
버스터미널로 가야할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매순간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ㅋㅋ
이 곳은 후기 오스만제국때 지어진 사원으로 이슬람사원으로서는 드물게
고딕양식을 도입한 곳이다.
무라트 파샤 자미로 1471년에 완성된 이슬람 사원이다.
이 사원의 건축을 의뢰한 하스 무라드 파샤는 본래 동로마 제국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의 아들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 함락후에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가 황위를
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이 곳을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자난은 일주일동안 일도 못하고 나를 가이드 해주려고 연차를 내서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서 참 좋지만 한가지 아쉬운게 자난이랑 닭갈비를 못먹은 것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한국인 레스토랑을 가봤지만 닭갈비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꼭 닭갈비를 같이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버스터미널인 오토가르로 가서 그리스 코모티니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이스탄불에서 코모티니까진 7시간 정도가 걸렸고 가격은 280리라였다.
혹시 몰라서 미리 예매했다.
위의 사진은 중간에 들렀던 휴게소인데 작고 아담했다.
육로로 유럽에 입국했던 것은 처음인데 우선 터키에서 출국할때 탑승객의 여권을
버스 승무원이 전부 걷었다가 나중에 돌려준다.
터키에서 출국할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리스에 입국심사할때 분위기가 정말 가관이었다.
웃긴게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모든 탑승객이 바깥에서 일렬로 늘어서서 출입국 심사를 받았는데
부스를 통과해서 심사를 받는것이 아니고 심사관이 한명한명 취조하듯이 여러가질 물어봤다.
나에게는 호텔바우처를 보여달라고하는데 하필 후불로 내는 곳이라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몰아세우면서 주소가 어디냐고 쏘아붙여서 다운받아둔 예약 확인번호를 보여주고 필요하면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했다.
그외에 제일 태클이 많이 걸린 사람들이 동유럽에서 온 걸로 보이는 젊은 여자 3명이었는데
입국심사관은 그 여성들을 거의 성매매취업하러 온 윤락녀 취급을 했다.
그만큼 불법이민자 문제가 심각하다는건 알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렇게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하고 다시 터키에 재방문해서 그리스에 갈때는 일부러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로 왔다갔다하니 시비도 안걸더만....
아무튼 그리스 코모티니에 도착하니 시간이 5시정도가 됐다.
호텔에 체크인 시간이 되려면 멀어서 일단 짐부터 맡겼다.
사실 잠도 제대로 못자서 그냥 로비 쇼파에서 잠을 청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새벽에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력이 최악인게 이때 무리를 해서 그 다음날 몸살에 걸리게 된다😓
그리스 코모니티에 있던 무슨 공원에 왔는데 겨울이라 분수대는 당연히 작동하지 않았다.
번화가로 갔더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편안했다.
추워서 카페에 갔더니 다 영업이 끝났다고 해서 이번엔 근처에 있던 성당으로 갔는데
체력이 고갈된 상태라 잠깐이라도 앉아있었으면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처럼 성당에서
죽을뻔했다.
2시간정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이번엔 기차역으로 가봤다.
기차역을 서성거리는데 역무원인지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그리스어로 이야길하는데
당연히 나는 하나도 못알아들었다.
그랬더니 더 열심히 그리스어로 이야길 하는 것이었다 ;;;;;;;
아마 내가 예매를 하려는줄 잘못 알고 도와주려고 하시는것 같았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역에서 찍은 사진인데 시간도 다 바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올려본다.
코모티니에서 테살로니키까지 대략 5시간 좀 넘게 걸리는듯한데 버스가 나은것 같다.
기진맥진해서 9시정도에 호텔로 돌아갔는데 프론트 직원이 친절하게도 체크인을 시켜주겠다고했다.
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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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터키 - 이스탄불: 뷔위카다
이렇게 아침에 하기아 소피아를 볼 수 있다는게 지금 생각하면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이 건축물의 규모가 이 곳이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현대 터키의 이스탄불 서쪽과 동트라키아 지방은 지역적으론 유럽에 속해있지만
터키민족이 아시아에서 왔다는 점과 종교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유럽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다.
이스탄불에는 이렇게 동로마 시대 지어진 유적들이 수도없이 많다.
특별한 보존작업이 없음에도 이런 잔해가 남아있다는 것이 대단할 뿐이다.
에미노누에서 배를 타기 전에 시미트를 샀다.
아침에 막 만든 시미트가 더 맛있는 것 같다.
이스탄불이 바다로 나뉘어져있다보니 있다보니 그로인해 도시가 어느 도시보다도
입체적으로 다가오는것 같다.
페리는 헤이벨리아다 섬을 지나쳐갔다.
헤이벨리아다섬은 정교회 계열인 할키 신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할키 신학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신학교였지만 1971년에 터키 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회의장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할키 신학교를 다시 열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미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터키에게 미국의 요구가 오히려 역효과가 되는건 아닌가 싶다.
미국이 역으로 할키 신학교를 영원히 폐쇄할 것을 에르도안에게 강력하게 요청하면 어떨까?ㅋㅋ
헤이벨리아다섬을 지나서 뷔위카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은 고대 그리스 시대엔 왕자를 뜻하는 Prinkipos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엔 권력에서 밀려난 황족들의 유배지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자동차가 없는 섬으로도 유명한데 마차랑 자전거만이 교통수단으로 이용가능하다.
뷔위카다섬을 일정에 포함한건 자난의 결정이었는데 처음엔 생소했는데 여행하고나선
자난의 선택이 옳았다는걸 깨달았다🙂
1908년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이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1858년에 지어진 아르메니아 가톨릭 성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은 무기한 폐쇄상태인 상황이다.
자난이 이야기하길 지금도 섬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빈 건물들은 매물로 올라와서 나중에 리모델링해서 개발할
사업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보건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런 저택들은 프랑스에서 본 양식과 비슷한 점이 보인다.
오스만제국의 근대화때 프랑스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독일식 저택도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곳은 그리스인 부자였던 키르바코 하코풀로스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1층부터 3층까지 23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키르바코 하코풀로스가 터키를 떠난뒤 호텔로 사용되다가 1927년부터 관공서로 사용중이다.
Con Paşa Köşkü(John Pasha Pavilion)이라고 불리는 이 목조저택은 1880년에 지어졌으며
베네치아 출신인 이탈리아인 존 파샤(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가 소유했던 건물이다.
존 파샤의 사망 후엔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살았지만 1차대전때 소식이 끊긴뒤
그리스인 건축가인 Achilles Politsis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뷔윅카다섬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저택 중 하나다.
오스만 제국 시대말기 부자들의 삶은 당시 유럽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로인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시기였다.
이 근처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해와서 살던 집의 폐허가 남아있는데 아쉽게도
당시엔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 곳이 트로츠키가 살던 저택으로 지금은 잔해만 남아있다.
스탈린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트로츠키는 이 곳에서 1929년부터 4년간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터키 공화국이 트로츠키의 망명을 받아주는 조건은 소련이 암살시도를 하지않을것을 요구했고
트로츠키에게는 터키 국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이 뷔위카다섬으로 갈수있는 교통수단은 페리뿐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웹서핑을 통해 레온 트로츠키가 뷔위카다 섬에서의 망명생활 당시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트로츠키는 망명지로 터키를 원하지 않았고 터키 문화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고
아타투르크의 반공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 알려진 바로는 트로츠키는 뷔위카다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항상 보안을 유지하고
저택내의 가구배치를 정기적으로 바꾸는등 꽤나 긴장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안 좋은 생활만은 아니었는지 가끔 그리스인 어부랑 낚시를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것 같았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중병에 걸린 트로츠키를 치료하려 의사가 왕진을 와서 청진기를
꺼내려는데 이를 의심한 트로츠키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 생각은 트로츠키에게 경호인력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제 2인자였던 사람이
저런 무례한 행동까지 했을 것 같진 않다.
어쨌든 뷔윅카다에서 체류하던 당시의 트로츠키는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 이 뷔윅카다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념적 공백상태인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연속혁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너무 어렵다.
뷔위카다 섬에서 가장 큰 저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장식때문에 목조저택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인다.
오르한 파묵이 왜 그리 옛 이스탄불의 목조저택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간다.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낀건데 자동차가 없으니까 공기가 너무 맑았다.
지나가는데 젖소가 들판에 누워있길래 가까이 가봤다.
별로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는듯 했다 하하!
963년 동로마제국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는데 악명높은 4차 십자군에 소속된
라틴 해적들에 의해 파괴됐고 오스만 제국 시대인 1751년에 재건됐는데
현재 남아있는 종탑이 그때 지어진 것이다.
종탑옆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은 1884년에 지어졌고 예배당 건물은 1905년에 지어졌다.
성당에 터키 국기가 걸려있는게 인상깊었다.
마치 이 성당이 외세에 의해 지어진 성당이 아니며 터키의 일부로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여기도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고 노출이 심한 복장은 금지되어 있다.
자난이 성당직원한테 정교회냐고 물어봤다.
성당 앞에 있는 나무에 끈을 묶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끈을 묶진 않았다.
이미 유럽온거 자체로 나는 소원을 이뤘다구 ㅎㅎㅎ
성당내부는 촬영금지여서 대신 사진을 퍼왔다.
사실 터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이 사진촬영을 금지하는건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역사적으로 증오의 타겟이 된 적이 있다보니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 같다.
왜냐면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도 오래된 성화가 많은데 플래쉬만 터뜨리지
않으면 딱히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4월 23일 성 조지의 날에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성당에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이 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해서 무슬림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렇지만 터키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당들이 많이 있다.
다만 터키의 경우는 무슬림이 주류인 국가이기 때문에 잊혀진 성당들이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이 있던 건물이다.
성당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자난과 터키쉬 커피를 한잔했다.
이 커피는 터키에선 터키쉬 커피라고 불리고 그리스에선 그릭커피,
키프로스에선 씨프리옷 커피라고 불린다.
주의해야 할게 터키 커피숍에서 그릭커피를 달라고 하거나 그리스에 있는 커피숍에서
터키쉬커피를 달라고하는건 금기시된다.
예전에 국내 여행 블로그 글을 읽는데 남키프로스에 있는 카페에서 터키쉬 커피를 달라고하자
카페주인이 '우리에게 터키쉬커피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나 씨프리옷 커피라고 할때까지
주문을 안받아줬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기억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세데프 섬을 볼 수 있었다.
여기도 비어있었는데 참 잘 지은 건물이다.
저택의 파사드 부분이 그리스 신전처럼 생겨서 발걸음을 멈췄던 건물이다.
무려 저택의 입구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저택의 첫번째 소유주는 알레포에서 온 Yorgi Sabuncakis라고 한다.
설계도 아테네 대학 건축 교수인 Fotiadis가 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엔 아주 화려했을 것같은 집이다.
뷔위카다섬에선 마차와 자전거가 주요이동수단이다.
오래된 집들이 아름답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있었다.
군산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래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칠을 하지 못한 외벽의 모습도 그런대로 좋아보인다.
방문은 하지 않았지만 소개하고 싶은 건물이 있어 올려본다.
바로 뷔윅카다에 있는 버려진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프랑스인 건축가 Alexandre Vallaury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날씬한 실루엣의 오스만-터키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1898년에 지어졌을땐 호텔과 카지노로 사용할 계획이었는데 오스만 제국 압뒬 하미트 2세가
도덕성 타락을 이유로 이를 무산시켰고 건물은 부유한 그리스인에게 팔렸고 이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기부했다고 한다.
1903년에 고아원 개관식에는 황제 압뒬 하미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요아힘 3세가 참석했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의 쉼터가 된 이 건물은 난방을 위해 러시아인들이 건물의 목재 외벽을
떼어서 땔감으로 쓰면서 건물의 손상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전쟁동안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현재는 이렇게 버려진 상태다.
복원을 위해서는 4천만 유로(현재환율로 한화 537억원)가 든다고 한다.
이게 어느정도 돈이냐면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운영했을 때 1년 입장수입의
반 정도 되는 금액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은 위험한 상태에 놓인 7대 세계유산에도 뽑혔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85년부터 관리인이 있는데 허가를 받은후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건물에서 5미터이상 떨어져있어야 한다.
1999년 이스탄불 지진으로 건물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바람으로부터 이 건물을 막아줄 지붕도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상태다...
100년전 이 섬의 고아들이 보호를 받아야했던 것처럼 이 건물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관리인의 말을 전하면 이 곳에서 자랐다는 그리스에서 온 노인이 와서 관리인과 내부를
둘러본뒤 "왜 우리집이 이렇게 됐나요?"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찍은 사진인데 9시 방향에 있는 건물이 바로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바다 건너편엔 이스탄불 아시아 지구가 보이는데 아마 저쪽엔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겠지만 여기 뷔위카다는 모든게 느리고 평화롭다.
섬을 떠나기 전에 발릭에크멕을 먹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게 너무 좋았다.
자난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은 다시 집으로 가고 나는 유럽지구로 돌아갔다.
시간은 한정돼있는데 가보지 못한 곳은 너무 많기에 나는 이 날 밤도 돌아다니기로 했다.
보드럼 사원으로 본래는 10세기에 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진 곳이다.
나에게 의미가 남다른 곳인데 나중에 이 곳에 다시 왔을때 사원의 젊은 이맘인 모하메드씨가
나를 환대해줬던 곳이다.
다만 이때는 아직 그를 몰랐을 때였다.
몰라 페나리 이사 사원으로 원래는 10세기에 지어진 정교회 수녀원과 성당이었다.
사원 명칭 중에 '이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정교회 성당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지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이 곳과 나는 인연이 없는지 이때 방문했을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두 번째 방문했을때는 복원작업 때문인지 아예 문이 닫혀있었다.
1550년에 만들어졌다는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을 발견했다.
사실 술탄아흐멧에 있는 하맘은 너무 비싼데 이 곳은 관광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저렴할 것 같다.
이 곳에 대한 소문이 몇가지가 있는데 바로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미마르 시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있다.
이땐 하맘을 체험하기 전이었는데 나중에 카파도키아에서 하맘을 즐길 수 있었다.
이 하맘이 만들어질 당시 서유럽에선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인 이유때문에
목욕을 기피했는데 동로마인들과 오스만인들은 계속해서 목욕을 했다.
터키의 국기를 보면 Red 보단 Crimson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것 같다.
마르마라 대학건물이다.
가끔 악몽을 꾸는데 대표적인 악몽이 대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그 악몽엔 18학점을 들어야한다 20학점을 들어야 한다 이런 말이 나와서
날 괴롭게 한다.
당시 집에서 먼 학교를 다녀서 지각을 했을때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수업을 포기하고
PC방으로 가거나 도서관으로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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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나 혼자 파티흐구를 돌아보다가 우스크다르에서 자난과 만나기로 했다.
이 날 여행은 이른 아침부터 자정까지 엄청난 활동량을 보였던 날로 기억한다.
1분 1초도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가려고 했던 일정, 그 숨가쁜 일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볼까 한다.
베야지트 트램역 근처에 있던 케밥가게에서 Döner 케밥을 사서 먹었다.
뭐가 한국어로 표준인진 모르겠다만 한국 매체에선 Döner를 '되네르'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발음인줄알고 터키에서 '되네르'라고 하니까 대부분 못알아 들었다.
'도나르'라고 해야된다.
아무튼 한국에도 도나르 케밥을 파는 곳이 많이 있지만 저 뻣뻣하고 질긴 특유의 빵은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터키에 다녀온 뒤로 저런 빵을 무척 좋아하게됐다.
11세기에 완성된 성당으로 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복되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붙여진 성당이다.
이후 13세기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에 의해 재수복 된후 프로토스트라토르였던
미카엘 두카스 글라바스 타르차나이오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수되게 된다.
그가 사망한뒤엔 미망인인 마리아가 수녀가 되면서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성당의 소예배당을 추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성 사도 성당에 이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성당으로 1456년부터 1587년까지
사용된 곳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성당의 역사는 성사도 성당→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 성당
→성 요르고스 성당 순이다)
1587년 성당은 오스만제국의 황제 무라드3세의 아제르바이잔 정복을 기념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게 되는데 이때 '페티예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꼈다.
즉 현재의 이름인 페티예 박물관이라는 명칭이 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이스탄불에서 하기아 소피아, 코라 수도원 다음으로 비잔틴 모자이크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기실 건물의 많은 부분이 개조되고 추가됐지만 후기 비잔틴 건축양식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본관은 이슬람사원으로 쓰이고 있고 부속 예배당만이 박물관으로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페티예 박물관 앞에는 버려진 동로마 시대 기둥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곳이 천년동안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그냥 동네 공원에
로마시대 돌기둥이 나뒹굴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인류가 고대 유적에 관심을 가진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에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나르텍스엔 아무것도 없는 벽만이 노출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으론 인류를 축복하고 있고 오른손으론 성서를 들고 있다.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스어 비문은 수녀 마르타가 그녀의 남편을 기리기 위해 이 예배당을
구원의 서약으로 바친다고 쓰여있다.
계몽자 성 그레고리오다.
아르메니아가 세계에서 첫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한 성인이다.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관계가 극도로 안 좋아진 상황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성모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을 청하는 간구 모자이크.
대천사 미카엘의 모자이크이다.
이렇게 훼손된 모자이크를 보면 언제 저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천사 우리엘의 모자이크이다.
구원을 청하는 세례요한.
대천사 라파엘
얼굴이 너무 선하게 디자인 되었다.
자난이 저 선모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축복을 뜻하는
표시라고 한다.
성 카리톤의 눈이 파여져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
루넷에 남아있는 이 모자이크는 페티예 박물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서 장면이다.
예수 그리스도 왼쪽은 세례 요한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둘기는 성령을 표현했다.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세례당에도 이와 비슷한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 아래 위치한 프리즈는 상감 기법으로 장식돼있다.
페티예 박물관에도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인물들은 구약의 예언자로 12시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사야, 모세, 예레미야, 스바니야, 미카, 요엘, 즈카르야, 오바드야, 하바쿡, 요나, 말라키, 에제키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밑에 예언자들은 하늘과 땅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른손으로는 인류를 축복하고 있다.
왼쪽은 성 사바, 오른쪽은 성 요한 클리마쿠스이다.
예전에 쓰여졌을 기둥들이 무심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 지어진 미나렛이다.
퍼온 사진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보다시피 많이 개조되었고
사원으로서도 미술적 측면에선 특별하지 않은 것 같다.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들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 성당처럼 작은 돔으로 지어진 동로마 후기 건축물에선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페네르 지역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인들이 모여살았던 곳이다.
오스만 제국 말기 이스탄불 인구 중에서 20%가 그리스인이었다.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때도 이스탄불은 교환 지역에서 면제됐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그리스인들이 대거 이스탄불을 떠나게 된 사건이 1955년에 일어난 이스탄불 폭동이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아타투르크의 생가가 폭파되었다는 가짜뉴스때문에 촉발된 폭동은
그리스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으로 번지고 말았다.
(물론 부가적으로 키프로스의 터키인 학살사건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시에서 이교도들을 벌하자는 외침이 골목골목마다 울려퍼졌다.
그리스인들이 평생을 일궈온 집과 점포들, 교회들, 묘지들이 파괴됐다.
사실 당시 세속주의 터키에서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집단증오에 선동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도 만보산 사건같은 반 중국인 폭동을 겪었기 때문에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탄불 폭동과 만보산 사건의 기록사진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스탄불 폭동을 끝으로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멸종된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100년 뒤에 페네르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예전에 홋카이도를 여행했을때 하코다테에 있는 북방민족 자료관의 전시사진 속에 있던
아이누족의 사진처럼 저들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이 텅비어있는 목조주택을 보니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옛 이스탄불의 모습이 연상된다.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정겹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을 봤다.
골목 한복판에서 고양이가 누워있는데 그 곳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운전자가 이를 보고
다시 후진을 해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었다.
광경이 너무 재밌어서 자난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Çeşmesi라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에 공공수도로 설치됐다고 한다.
현대에 와선 집집마다 수도가 공급되기 때문에 그냥 모뉴먼트로만 남아있는 곳이 많다.
관광지에 있는 Çeşmesi같은 경우 역사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나오게끔 해놓은 곳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터키와의 친선으로 서울 어린이대공원역 근처에 있는 공원에
터키식 수도가 있으니 구경해봐도 좋을 것 같다.
이스탄불엔 이런 동로마 시대 폐허들이 길가다가도 자주 보인다.
이런 유적 하나하나가 굉장히 유서깊은 역사의 흔적이지만 이런 유적을 완벽하게 보존 관리하는
프로젝트는 국가 하나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울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만 해도 포로 로마노를 둘러싼 고대 로마 유적들은 잘 보존했지만 콜로세움 건너편에
있는 목욕탕 유적은 발굴만 하고 일단은 펜스쳐놓고 보류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페네르 정교회 신학교이다.
페네르 정교회 신학교의 역사는 14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렇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듬해이다.
이 신학교를 졸업한 그리스인들중에선 오스만제국의 장관까지 역임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터키역사도 프로파간다 영향이 강해서 어느정도 걸러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인들이 나중에 오스만 제국에서 고위직에 임명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연봉의
실권없는 직책에 많이 등용됐다.
현존하는 학교건물은 1881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스 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스탄불 폭동 이후로 많은 학생이 떠나고 현재는 학생이
50여명만 남아있다.
어쩌면 지금 이 포스팅을 할때는 더 줄어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에 6명의 신입생이 등록했다고 한다.
페네르 지역은 그리스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번화가보다 보수적이고 아랍인들에 가까운 옷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라거나 폭력적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니
불필요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벽에 One Way Islam이라는 낙서가 적혀있었다.
가슴 한켠이 답답해졌다.
1281년에 지어진 곳으로 '몽골의 성모마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정교회 성당이다.
동로마 황제 미카엘 8세의 서녀였던 마리아 팔레올로기나가 정략결혼한 일칸국의 아바카 칸이
사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설립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동로마 제국시대부터 한번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적이 없는 성당이다.
그마저도 메흐메트2세가 이 성당의 보호를 약속하는 칙서가 있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유일하게 개조되지 않은 정교회 성당이 동로마시대에 지어진 성당 중에 가장 작은
성당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교회 조직이 세월의 풍랑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곳도 이스탄불 폭동때 내부가 파괴되는 참화를 겪었다.
아쉽게도 시간상 방문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사실 내부는 옛 느낌이 별로 없다.)
성당의 정문이다.
성당 앞에 차가 세워져있었는데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강경에 꽤 크고 오래된 일본식 창고 건물이 있는데 두 번 갈때 전부 차들이 창고를 가로막고
있어서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오스만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터키 프로파간다에선 제국의 일원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았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고
2등 신민으로서 쉴레이만같은 성군치세엔 그럭저럭 잘 지내기도 했지만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킬때는 가혹한 처분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때 그리스인들의 반란이 100번정도 된다고 알려졌으니 이들에 대한
대응은 상당히 변덕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건축양식이 신고전주의 양식이라 나중에 찾아봤는데 그리스인 초등학교였다.
성 요르고스 대성당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 성당이다.
오래전에 자난과 했던 약속이 유적지 명칭을 표기할 때 비잔틴 시대 유적이라고 해도
현재 사용되는 터키식 이름을 먼저 붙이고 그리스식 명칭을 병기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터키인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이 건축물들을 잘 보존했으면 하는 바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가를 쓰고 내 여행을 도와주었던 자난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이 곳만큼은 현존하는 건물이니 만큼 예외적으로 그리스식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항상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하기아 소피아에서의 퇴거로부터 3번째 쫓겨간 곳이 이 곳이다.
이 곳은 1600년에 지어졌지만 몇번의 화재를 거듭해 지금 남아있는 성당은 19세기 중반에
재건된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신 고전주의로 지어져 비잔틴 양식과 연속성을 찾아볼 수 없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하기아 소피아에 비하면 작은 성당인데 이는 당시 이슬람의
딤미법에 근거해서 기독교 건물이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짓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도 안드레아가 만든 정교회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고
세계 정교회 신자 3억인의 영적 고향이다.
나는 가톨릭이지만 오래 전 동서교회 분열의 역사를 알고 나선 정교회가 가톨릭보다
조금도 못할것이 없고 상호동등한 정통교회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성당에 입장할때 입구에서 보안검사를 받아야하는데 이 곳은 90년대까지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됐던 곳이고 지금도 테러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카톨릭에서 바티칸과 같은 곳. 하지만 그 규모는 너무나도 작고 수수하다.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경건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멀리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신 바오톨로메오스 1세를 볼 수 있었다.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런건 아니지만 일부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바로 그리스 독립전쟁 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반란으로 정의하고 규탄했기
때문인데 당연히 총대주교는 도시에 남아있는 그리스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사제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벽 중간에 있는 페디먼트는 예전 성당에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불가리아 성당으로 강철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겨우겨우 버스를 타서 에미노누로 돌아왔다.
이제 페리를 타고 우스크다르로 갈 것이다.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려면 꽤 비싼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이 곳은 운송수단으로 쓰이고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뱃놀이를 할 수 있다.
안에서 터키쉬 커피를 파니 커피 한잔을 하면서 마르마라해를 즐겨보자.
건너편에 어제 방문한 돌마바흐체 궁전이 보였다.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시대의 전설을 지닌 크즈 쿨레시(처녀의 탑)다.
현존하는 탑은 오스만 제국 시대인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
탑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스크다르에 도착해서 자난을 만났다.
자난이 루트를 다 알려주긴했지만 그래도 실수없이 도착했다는 것에 스스로 너무 대견했다.
위의 사진은 미리마 술탄 사원으로 슐레이만 1세의 딸인 미리마 술탄이 후원해서 지어진 곳이다.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작품으로 그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건축물만 300여개가 된다고 한다.
속설에는 미마르 시난이 미리마 술탄에 대한 사랑을 이 모스크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게 흔한 야사인지 정말 사실이었는진 알 수 없지만 이 모스크는 미리마 술탄을 고려한듯
유려한 디자인으로 표현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원의 차양막과 본 건물의 조화가 마치 치마를 입은 여성이 연상된다고들 한다.
배를 타고 우스크다르에 도착했다.
우스크다르는 6.25 전쟁 당시 터키군이 불러서 유명해진 [Üsküdar'a Gider İken]라는
노래제목에 나오는 지명이다.
사원에 들어가려는데 히잡을 쓰고 있는 한 여성이 누가 신발을 훔쳐갈 수 있으니
잘 챙기라고 이야기했다.(자난이 통역해줌)
히잡을 쓴 여성들을 외국에서 봤을 때 보수적이고 대화라도 하면 큰일날 것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 친절하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터키가 아닌 다른 무슬림이 주류 인구인 나라에서 모스크에 들어갈 때 나에대한 불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터키에서는 가장 편안한 곳이 모스크였다.
걸어가다 힘들면 넓은 모스크에서 앉아서 쉬어도 나같은 이교도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오스만 제국 전역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다.
시난도, 미리마 술탄의 어머니인 휴렘 술탄도, 미리마 술탄의 남편이었던 뤼스템 파샤도
원래는 투르크인이 아니었다. 전부 비 투르크 기독교인 이었다.
역사에 기억되는 오스만 제국의 재상들 중에 순혈 투르크인은 많지 않다.
이 점은 투르크인이 잘나거나 못나서가 아니고 능력있는 비주류를 등용 했을 때 그들의
고군분투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한 때 오스만 제국 전역에 지어졌던 이슬람 사원들은 민족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터키 밖의 나라들에선 대부분이 사라졌다.
배가 정박하기 직전에 베일러베이 궁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정박하면 이 출구를 통해 나오게 된다.
바다의 문이라고 불린 문이다.
돌마바흐체의 황제의 문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문장이 아직도 제국이 건재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 파빌리온엔 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궁전 외벽의 일부는 복원공사 중이었다.
베일러베이 궁전은 1860년대에 황제의 여름별장으로 지어진 궁전이다.
원랜 동로마 제국 시절 이 곳에 큰 십자가가 설치된 정원이 있어서 십자가 정원이라 불렸다고 한다.
궁전을 지은 건축가는 아르메니아인인 사르키스 발얀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은 건축가인
가라베트 아미라 발얀의 아들이다.
규모는 돌마바흐체 궁전보단 작지만 내부 공간은 돌마바흐체 궁전 뺨칠정도로
화려하고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역시 돌마바흐체 궁전처럼 내부는 촬영불가다.
퍼온 사진인데 내부 모습은 이러하다.
앞에 배치된 일본 아리타 도자기가 인상깊었다.
이 곳은 압둘라지즈 황제 때 건설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공존한다.
압둘하미트 2세가 폐위되고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한데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발칸 민속축제가 이 곳에서 열려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베일러베이 궁전 관람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라마춘을 먹었는데 역시 맛은 최고였다.
카디쿄이 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탔는데 로템 제작년도가 프린팅된 플레이트가 있어서 신기해서 찍어봤다.
사진을 찍는데 승객들이 '저걸 왜 찍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ㅋㅋ
서울에서 다니는 전동차가 이스탄불에서도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들뜨게 한다.
대구가 여기서 왜 나와? ㅋㅋ 예상치못한 광고판이 너무 반가웠다.
폐차된 전동차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보인다.
하기아 에페미아 성당으로 1694년에 지어진 곳이다.
에페미아 성당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던 동명의 성당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원래 있던 하기아 에페미아 성당은 일부 유적이 전해진다.
지금 있는 성당에도 동로마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워서 내부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자난이 안들어가려고해서 난 모스크에 갔는데 왜 넌
성당에 안들어가냐고 하니까 같이 들어갔다 ㅋㅋㅋ
카디쿄이 지구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한 곳이다.
당시 여행을 위해 구입했던 작은 백팩 가방끈 한쪽이 다 뜯겨져서 가방가게에 가서
새로운 백팩을 구입했다.
가격은 역시 저렴하고 품질도 괜찮았다.
가게 사장님이 아주 친절했고 한국을 여행하고 싶다고해서 기분이 좋았다.
여기서 샀던 백팩은 이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1년동안 출퇴근때 매고 다녔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스탄불에서 느꼈던 행복한 기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가방을 멜때 나는 이스탄불에 대해 한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었고 자유로웠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었다.
자난과 펍에가서 나는 맥주 한잔을 주문하고 자난은 커피를 주문했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자난은 집으로 가고 나는 일단 에미노누로 가기위해 배를 탔다.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 기차역인 하이다르파샤 역으로 1908년에 완성된 기차역이다.
독일인 건축가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2010년 지붕의 화재로 아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작년에 이 곳에서 플랫폼 리뉴얼 공사 중에 고대 칼케돈 유적과 동로마제국 시대 유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발견된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세기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관광지로 조성된다면 정말 굉장할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스카이 라인이다.
148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건축된 사원으로 미마르 시난의 작품이다.
다른 오스만 제국의 사원들처럼 하기아 소피아의 중앙식 돔에서 영향받은 디자인이다.
관광객들은 거의 지나쳐가는 것 같다. 나도 그랬고....
이탈리아 로마도 메이져 바실리카 말고도 더 오래되고 좋은 성당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런건 재방문을 할때라야 더 감명 깊은 것 같다.
차이집이 보였는데 사이버펑크스러워서 찍어봤다.
쉴레이마니예 사원을 가기위해 언덕을 올라가는데 손자로 보이는 어린 소년의 손을 잡은
히잡은 쓴 장년여성이 나에게 "제팬??" 이라고 물어봐서 웃으면서 "코렐리임"이라고
대답했다🙂
이들도 쉴레이마니예 사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두운 언덕을 올라가고 있으니
어렸을때 시골에서 밤에 찬송가를 부르며 개신교회를 갈때가 생각났다.
이미 관광객 입장시간은 지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사원 앞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양에선 장엄제라고 불렸던 쉴레이만 대제의 이름이 붙은 사원답게 높은 위치에서
다른 사원들을 굽어보고 있다. 지존의 위치인 것이다.
터키 드라마 '위대한 세기'로 유명해진 쉴레이만 대제의 황비였던 휴렘술탄의 영묘이다.
슐레이마니예 사원 앞에있는 루프탑 카페인 미마르시난 카페에 왔다.
사실 더 좋은 루프탑 카페도 있다고 하는데 난 관광객이니까 일단 FM대로 간다...
명소라서 그런지 겨울인데도 옥상에 사람이 꽤 많았다.
터키쉬 커피를 시켰는데 일반 카페보단 가격이 비싸다.
경치를 즐길 수 있으니 당연한 거지만...
테라스 카페답게 쉴레이마니예 사원 뷰가 너무 멋있었다.
쉴레이만 1세 시대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였는데 상대적으로 이교도 신민들에게
너그러웠던 시기도 이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문제는 군대만을 제국의 기반으로 했다는데 있는데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의 인프라를 개발하기보다 자치권을 줘서 세금이나 바치게하고
이어서 다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반복했는데 비엔나 포위가 실패한뒤 그러한 방식에
제동이 걸리면서 제국은 점차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야경 사진을 찍는데 가죽 라이더 자켓을 입은 젊은 남성이 삼각대를 잠시 빌릴 수 있냐고 물어왔다.
괜찮다고 하고 어디서 왔냐고 하니까 시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터키에서 시리아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경계는 했지만
무리한 요구를 하지않고 깔끔하게 삼각대를 돌려주는 모습에 이 시리아 청년은 좋은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물론 술탄아흐멧 광장에서 사기를 치려한 시리아 사람들도 있지만 안 좋은 것은 잊어버려야지😂)
헤어지면서 시리아가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건너편에 있던 루프탑 카페이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고 있었는데 모스크 앞에서 이런 음악을 트는게 아이러니했다.
그게 터키고 이런 특이함을 터키를 여행하면서 많이 느낄 수 있다.
전 포스팅에서 올렸던 보즈도간 케메리(발렌스 수도교)이다.
같은 건축물이라도 낮과 밤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이었던 곳이다.
복원을 거친 것인데 측면 외벽의 복원 수준은 나를 실망시켰다.
테라코타의 아름다운 무늬가 안보이고 그냥 미장공사만 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붕괴위험까지 갔던 건물이기 때문에 복원자체에 의의를 두고 싶다.
위키피디아에는 이 곳이 밤에 위험하다고 했는데 죽기나 하겠냐라는 생각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사람만 없었지 조용했다.
다행히 전면부는 크게 손을 대지않아 비잔틴 예술의 품격이 살아있었다.
사원 앞에는 큰 카페가 있는데 내가 갔을땐 카페앞을 천막으로 다 가려놓은 상태라서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다. 물론 다 문을 닫은 시간이었겠지만...
카페에서 보는 제이렉 사원은 정말 멋있다. 하기아 소피아 바로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같은 성벽이라도 유럽과 터키의 분위기는 사뭇다르다.
로마의 성벽이 낭만과 생동감을 준다면 터키나 그리스에 남아있는 동로마제국 시대 성벽은
쓸쓸함과 허무의 정서가 강한 것 같다.
어쩌다보니 나도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갈라타 다리로 위에는 많은 낚시꾼 아재들이 고기를 낚고 아래엔 맛있는 Balik Ekmek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Balik Ekmek은 한국에선 '고등어 케밥'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난에게 발릭 에크멕이
고등어 케밥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정말 이상하다고 하면서
Balik Ekmek은 케밥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했다.
꽤 큰 체스메시가 있었다.
터키인들이 그리스 사람들을 놀리려고 만든 노래라고 한다.
동로마제국 시대 기념물인 쳄벨리타쉬가 보였다.
330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반암으로 만들어졌다.
원랜 위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이 있었으나 12세기 초에 태풍으로
동상과 상층부가 무너졌다고 한다.
그 후 십자가로 대체했지만 오스만 제국 정복후에 제거되었다.
18세기에 하층부 기단이 화재로 불에타버려 보수한게 지금의 모습이다.
미친 스케줄의 하루가 또 이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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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포스팅할 톱카프 궁전은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된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경복궁과 창덕궁을 합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경의의 문으로 제국시대엔 이 문부터 백성들의 출입이 제한됐다고 한다.
톱카프궁 앞에선 큰 개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대부분의 개들은 누워서 자고 있는데 일부는 관광객들 옆에 붙어서 어슬렁대기도 하는데
자신들이 관광객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라고 한다😂
입구에서 자난을 만났다.
왼쪽 건물이 '부엌궁전'이라는 곳으로 황실주방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곳엔 중국,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도자기가 전시되있다.
청조시대 중국도자기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중국인 단체관광객 중 어떤 아저씨가
도자기를 보고 큰소리로 "중궈다!"라고 외쳐서 깜짝 놀랐다.
무슨 큰일이라고 소리를 그렇게 질르나...
참고로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있다.
구중궁궐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옛 콘스탄티노플 구역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톱카프궁에서는 시내를 조망할 수 없었다.
아흐멧 3세 도서관이다.
도서관 내부에 있는 장식이다.
황제 알현실이다.
톱카프궁전 사원인데 규모가 아담했다.
보안요원 아저씨가 벽에 등을 기댄채로 너무 편안하게 풍경을 즐기고 있어서 평화를 깨기 싫어
조용히 구경하고 사원에서 나왔다.
궁궐의 반대편은 바다쪽이었는데 성벽으로 막혀있었다.
이즈닉에서 제작된 타일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타일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타일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칠기 기술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 파빌리온은 황제가 라마단 기간에 이프타르를 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또한 여름낮엔 그늘을 즐기는 용도로 여름밤엔 달빛을 즐겼다고 한다.
여러 개의 타일이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있다.
몇몇개는 색깔이 달라 나중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아랍어가 쓰여진 타일이다.
터키 문화재 건축물에서 아랍글자가 써있는걸 보면 마치 한국의 고궁에서 중국 한자가 연상된다.
과거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참고로 나는 한자를 잘 몰라 궁궐현판에 있는 간단한 한자도 엉뚱하게 이야기해서 친구한테
혼나곤 한다.
할례실의 입구 전체가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지속적으로 교류했기 때문에 톱카프 궁전도 서양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사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 경복궁처럼 19세기에 혁신없이 중세건축 그대로 지어진 건축물보단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편이 더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제국 의회 입구로 들어가는 문이다.
제국 회의실 내부인데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게 장식되 있다.
하렘에서 일하는 내관들이 담배를 피웠던 흡연실이라고 한다.
장대같이 긴게 바로 파이프다.
여기서부터 하렘이다.
하렘은 제국의회 건물과 바로 옆에 있는데 궁전 전체로 보면 중앙에 위치해있다.
궁전의 뒤쪽에 위치한 다른 궁전의 하렘과는 다르다.
하렘의 여인들은 하렘밖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지만 소리로 뜻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하렘의 여인들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법원건물에 있는
황제의 자리 바로 뒤가 하렘이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재판 내용을 들을 수 있었고
의사결정 과정에도 황제를 통해 참여할 수 있었다.
자난이 톱카프 궁전이 돌마바흐체 궁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관리상태가 좋지 않다고 얘기했다.
사실 그러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정말 지금 사용하고 있는 궁전을 방문한 느낌이라면 톱카프 궁전은
황제나 황실가족이 아주 오래전에 살았다가 떠나버린 느낌이 들어서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서깊은 궁전이니 난 너무 좋았다.
명나라, 청나라 궁녀들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의 하렘은
후궁들만 아니면 외부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황태후의 방에 있던 벽화인데 서양식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무라트 3세때 지어진 황제의 방이다.
1585년에 제국의 수석 건축가인 Davut Aga에 의해 지어졌다.
Davut Aga는 미마르 시난의 제자로 이스탄불에 있는 예니 사원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방은 톱카프 궁전의 다른 어떤 공간보다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황제의 방에 있는 이 돔이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큰 돔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이 아랍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비잔틴 양식에서
영향받은 돔구조이다.
돔이 금박으로 둘러쌓여있다.
황제의 개인실로 1579년 무라트 3세의 지시로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다.
왕자의 궁에 있던 스테인드 글라스인데 너무 아름다웠다.
스테인드 글라스하면 보통 유럽에 있는 성당을 떠올리는데 이곳도 너무 아름답다.
하렘에서 후궁들의 아파트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자주 거닐었던 마당이기도 하다.
아흐멧 3세 도서관 후면이다.
정의의 탑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이다.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래엔 위에서 설명한 제국회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곳에선 기독교와 이슬람과 관련된 성유물을 전시 중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을 깜빡해 인터넷에 있는 사진으로 대신한다.
내부 성유물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있다.
두 번째 일정인 하기아 이레네 성당으로 향했다. 톱카프 궁전 구역 내에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기인 337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보존된 성당은 740년에 지진에서 재건된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하기아 소피아랑 바로 옆에 있는데 이 두 성당은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만들면서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이었다.
325년에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978년부터 2014년까지 클래식 공연장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내부는 별다른게 없어서 자난은 밖에서 기다리고 나만 보고 나오기로 했다.
성당의 나르텍스 부분이다.
기록에 의하면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는데
앱스의 세미돔에 있는 십자가 빼고는 모든 모자이크가 사라져있다.
740년 재건때 성상파괴운동이 한창이었으니 그때 사라졌을수도 있고
오스만 제국때 없어졌을수도 있고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이 날 하기아 이레네를 방문한 이유가 바로 이 십자가를 보기위해서 였다.
하기아 이레네의 십자가는 성상파괴운동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쉽게 말해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거나 인간 동물 구분없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성화나 성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는 사상이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 재건된 740년엔 성상파괴운동이 한창 벌어졌던 시기였다.
이후 동서교회 모두에게 성상파괴운동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는데
보편교회(카톨릭)은 성상파괴운동 이전과 같이 성상과 성화를 모두 사용하게 했고
정통교회(정교회)는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배려하고자 성화만 사용하게 했으니
현재 두 교회의 풍습의 차이가 여기서 기인한다.
성당의 보존상태는 심각해 보였는데 천장에서 돌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져내려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늦기 전에 보수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기둥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런걸보면 이런 것들을 없애지않고 몇 백년동안 관리했던 오스만 제국 군인들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도 간혹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집에서 현재 살고 있는 주인들이 원래 있던
장식같은걸 없애지 않고 손님들에게 자랑하곤 했는데 그런 심리일까?
일부가 떨어져나간 이런 십자가를 봐도 궁금해진다.
내부장식이 전부 떨어져나간 것을 보면 앙상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성당의 아치형태를 보니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산타 코스탄자 영묘가 떠올랐다.
기독교 건축물은 석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파괴된 건물을 재건할때 완전히 새로 짓지 않고
기존에 멀쩡한 부분은 남겨놓는다거나 부재를 재활용한다거나 하는일이 많다.
창문 아래 배치된 신트로논(계단형 사제석)은 이스탄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로마시대
사제석이다.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힌 골고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왼편엔 그리스어로 성서 구절이 인용되 있다.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음직할 돔도 일체의 장식이 사라져있다.
지하철을 타고 탁심역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은 지하철이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탁심광장에 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동상이다.
대통령 시절이 묘사되었는데 조력자였던 이스메트 이노누, 페브지 차크마크 등의 인물도
표현되있다.
바로 다른면에 있는 동상으로 아타투르크의 터키 독립전쟁 사령관시절 모습을 표현했다.
탁심 이스티크랄 거리를 횡단하는 열차다.
치첵 파사주라는 곳인데 유럽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 정문이다.
흡사 궁전의 문에 쓰일 정도로 웅장하다.
아브루파 파사주라는 상점가이다.
Galata Konak Cafe 라는 곳에 들렀다.
갈라타 타워가 보이는 곳이다.
과거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으로 유명한 시르케지역이다.
한때는 이곳에서 유럽까지 철도로 이어져 있었다.
이때는 아쉽게도 보수공사 중이어서 일부가 가려져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니 이 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엄넘치는 외부와 달리 내부 인테리어는 정말 편안하다.
기차를 기다리지 않을때 플랫폼에 서면 그냥 운치있고 좋지만 막상 외국에서 기차를
타려고할때는 항상 조마조마하고 가슴을 졸인다.
자난과 시르케지역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셨다.
이 날도 정말 많은 곳을 걸어다녔다.
자난은 집에가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근처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이스탄불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인것 같다.
지형자체의 장점이 이 곳이 어떤 건축물로 채워져도 무한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게 만든다.
그래서 한때는 많은 세력들의 타겟이었고 지금도 관광객들을 매혹시키고 있는것이 아닐까?
석양과 예니사원 그리고 주야에 관계없이 드리워진 낚시대들이 인상깊다.
이 곳은 구 프랑스인 감옥으로 1850에서 190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당시 프랑스인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여기에 수감했다고 한다.
숙소에서 찍은 술탄아흐멧 사원이다.
어제 돌마바흐체 궁전 기념품점에서 산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프린트되있는 수첩이다.
숙소에서 에페스 맥주를 마셨다.
숙소내 룰이 음식은 방에서 먹어도 되지만 맥주는 베란다에서 먹어야 한다고해서
떨면서 마셨다. 그래도 여행 중에는 한번씩 맥주를 마셔줘야 마무리가 되는 것 같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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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일디즈 궁전을 가기위해 트램을 타고 버스를 갈아탔다.
가는 도중에 내려서 몰라첼레비 사원을 사진에 담았다.
1584년에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다.
일디즈 궁전을 방문했지만 군인들이 제지를 했다.
아쉽게도 복원을 위해 무기한 폐쇄상태였다.
구글에서도 폐쇄라는 표시가 없었는데 이런 일은 외국을 여행하다가 자주 벌어진다.
자난에서 연락을 해서 일디즈 궁전이 폐쇄중이라고하고 베식타쉬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디즈 궁전에 가는 길에 있는 일디즈 하미디예 사원이다.
술탄 메흐멧 2세의 동상이 있었다.
자난을 만나서 해군 박물관으로 갔다.
이건 자난이 계획해서 방문한 곳인데 아주 유익한 곳이었다.
이스탄불 해군 박물관의 역사는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4척의 황실 카이크선과
터키 공화국 초기에 사용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3척의 배가 보존되어 있다.
후기 오스만 제국 문화의 화려함을 느끼려면 근처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과 함께
이 곳을 방문하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초입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사진과
그가 쓰던 작은 선박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배는 이따 말미에 다룰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현대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인물이다.
아타투르크라는 이름은 '터키인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의 이미지는 대체로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쓰러져가는 오스만제국의 장군으로 유럽의 군대를 격퇴하고 아나톨리아를 사수한 전쟁영웅의
이미지일것이고 두 번째는 서구화와 세속주의 정착을 성공시킨 개혁가 일것이다.
안타깝게도 권위주의 이슬람 정당(AKP)이 집권하면서 첫 번째 이미지만이 강조되고 있다.
가령 AKP를 지지하는 터키인들은 집이나 가게에 아타투르크의 군인시절 초상화를 더 선호한다.
오스만 황실의 카이크선으로 주로 황실 이벤트나 황제의 일일여행에 사용됐다고 한다.
선미에 장식된 음각이 너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곳의 배들은 열, 습도, 빛에 매우 민감하다고 한다.
100년의 수명이 넘은 이 배들이 뒤틀리거나 망가짐없이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와 복원사들의 노력했을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압둘메지트 황제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카이크선이다.
독일의 빌헬름 2세와 황후가 1889년 이스탄불에 상륙할 때 이 배를 이용하여 해안가에 내렸다고 한다.
셀주크 스타일에 영향받은 기하학적 형태의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대형 선체의 경우 이렇게 따로 분리하여 보존하였다.
박물관은 마르마라해 바로 앞에 지어졌는데 해군 박물관으로서 최고의 위치임에 틀림없다.
오스만 제국의 해군 문장이 전시되 있었다.
보존을 너무 잘해놔서 지금도 바다에서 사용이 가능할 것 같다.
황제의 키오스크가 카이크선 위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화려함 때문에 배 자체가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궁전 같았다.
키오스크에 있는 황제의 옥좌이다.
압둘아지즈 황제가 사용했던 카리크 선이다.
오스만 제국의 문장이 키오스크 중앙에 장식되어 있다.
선미에는 독수리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동로마 제국의 상징도 독수리상이어서 흥미로웠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거나 제국 편제에서 동로마 제국을 참고했는데
그럼 당시 아나톨리아 밖의 아랍 민족들에게 이 제국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하다.
정통 칼리파 국가들처럼 보였을지 아니면 종교적으로 느슨한 유럽의 제국처럼 보였을지 궁금해진다.
해군 박물관엔 14척의 황실 선박이 있는데 최적의 환경에서 보존하기 위해 2009년에
지금의 위치에 박물관을 새로 지었고 기존의 콜렉션도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배가 만들어진 시대인 19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약해지는데 반해
예술적인 측면에선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당시 공예품을 비교하면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문화적인 역량은
대단했다.
위에서 언급한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사용했던 요트였던 MV Savarona의 구명선으로 쓰이던
보트가 전시되어 있었다.
MV Savarona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건조한 대형 요트로 원래 소유자는 다른 사람이었으나
말년의 병이 든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바다공기가 건강회복에 좋다는 주치의의 조언을 듣고
1938년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의 바램과 달리 요트는 두 달도 채 사용되지 못하고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소유자도 바뀌고
여러 용도로 전용되다 지금에 이른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플로리아(미국 플로리다 아님)의 여름별장에서 사용한 보트라고 한다.
마호가니 목재로 건조되었다.
베식타쉬에 가서 도너 케밥을 먹었는데 서울 이태원에서 먹던 케밥보다 훨씬 맛있다.
Sebil Cafe라는 곳으로 오스만 제국 시대 유서깊은 건축물을 카페로 개조한 곳이었다.
오늘 방문할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입장료는 90리라(한화 13000원)로 상당히 비싸다.
하지만 한국어 오디오가이드가 제공되고 정말 완벽한 상태로 관리되고 있으니 방문하시길 권하고 싶다.
안가면 후회해서 나중에 또 이스탄불에 와야할 수도 있다...
정원의 배치가 정말 아름답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1856년에 지어진 서양식 궁전으로 로코코,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까지
여러 서양 건축양식이 절충되었다.
건축가는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건축가인 가라벳 발얀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시간이 흘러 1915년엔 터키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적대하게 되고 끔찍한 참극으로 이어지지만 어쨌든 이 시대는 그랬다.
돌마바흐체 궁전도 바다 앞에 지어졌다.
때문에 압둘 하미트 2세는 적성국가들의 해상공격을 염려하여 육지쪽에 있는 일디즈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정적 탄압은 잘하던 사람이 외적은 또 무서웠나보다;;;
이후 돌마바흐체 궁전은 33년 동안 국가행사 용도로 1년에 한 두번 사용됐다고 한다.
터키공화국이 건국된 후엔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하렘에 있는 방 하나를 침실로 쓰게 된다.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는 사진촬영이 일절 금지돼있다.
이후 내부사진은 전부 퍼온사진으로 대체한다.
실내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오스만제국 황제가 부활한다면 이 곳을 보고 "오랜만에 와보니까 원래보다 약간 낡았네?"
라고 할만한 컨디션 이었다.
그만큼 관리도 매우 엄격하다.
오디오 가이드로 거의 모든 방에 대해 해설을 들을 수 있으며 관람시간도 꽤 오래 걸린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이 있다고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에 있는 하맘(목욕탕)인데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다.
이 정교한 조각을 보라!
돌마바흐체 궁전의 하렘 건물이다.
하렘은 입장료를 별도로 받는데 역시 방문안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으니 가보길 권하고 싶다.
아무래도 술탄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이니 세람르크에 비해 인테리어도 컬러풀하고 아름답다.
내부촬영이 불가한 관계로 이 사진도 퍼왔다.
하렘은 옛날 서양에서 가지고 있던 자유분방한 환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공적인 공간이었다고 한다.
세람르크도 마찬가지지만 여기도 정말 실밥 하나도 허술하게 관리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
제국의 역량을 쏟아부어 만든 훌륭한 건축물이지만 그냥 방치된다면 3년도 안되서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실제론 주기적으로 채색도 다시 해주고 아주 정교한 보수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 같은 관광객들은
그런 머리아픈 작업들에 대해 잊고 건축됐을 당시로 타임슬립한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
하렘에선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사용한 방을 볼 수 있었다.
이 방은 본래 오스만 제국 압둘메지드 황제의 겨울 침실로 사용된 곳이었고
터키 공화국 건국 후엔 앞서 언급했듯이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침실로 사용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요트에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용태가 악화되고 이 곳으로 돌아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57세의 나이로 서거한 곳이다.
이 방의 시계는 그가 사망한 시간인 9시 5분에 멈춰져있다.
내 옆에는 히잡을 쓴 나이지긋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슬픈 표정으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침대를 보면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세속화 정책으로 히잡을 쓴 여성은
터키 사회내에서 소수가 되었는데(이슬람주의 정권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반대가 됨)
이 아주머니는 아타투르크 대통령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의 마음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의 표정을 떠올리면 그 세대의 터키인들은 그런 것을 초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여행을 할때도 즐거웠지만 요즘같은 때서야 더욱 느낀다.
나는 정말 행복했음을...
자난과 다시 베식타쉬로 가서 카페에 들렀다.
사진에 보이는건 내 카메라가 아니라 자난의 카메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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