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31 터키 - 이스탄불: 뷔위카다
이렇게 아침에 하기아 소피아를 볼 수 있다는게 지금 생각하면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이 건축물의 규모가 이 곳이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현대 터키의 이스탄불 서쪽과 동트라키아 지방은 지역적으론 유럽에 속해있지만
터키민족이 아시아에서 왔다는 점과 종교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유럽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다.
이스탄불에는 이렇게 동로마 시대 지어진 유적들이 수도없이 많다.
특별한 보존작업이 없음에도 이런 잔해가 남아있다는 것이 대단할 뿐이다.
에미노누에서 배를 타기 전에 시미트를 샀다.
아침에 막 만든 시미트가 더 맛있는 것 같다.
이스탄불이 바다로 나뉘어져있다보니 있다보니 그로인해 도시가 어느 도시보다도
입체적으로 다가오는것 같다.
페리는 헤이벨리아다 섬을 지나쳐갔다.
헤이벨리아다섬은 정교회 계열인 할키 신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할키 신학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신학교였지만 1971년에 터키 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회의장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할키 신학교를 다시 열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미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터키에게 미국의 요구가 오히려 역효과가 되는건 아닌가 싶다.
미국이 역으로 할키 신학교를 영원히 폐쇄할 것을 에르도안에게 강력하게 요청하면 어떨까?ㅋㅋ
헤이벨리아다섬을 지나서 뷔위카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은 고대 그리스 시대엔 왕자를 뜻하는 Prinkipos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엔 권력에서 밀려난 황족들의 유배지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자동차가 없는 섬으로도 유명한데 마차랑 자전거만이 교통수단으로 이용가능하다.
뷔위카다섬을 일정에 포함한건 자난의 결정이었는데 처음엔 생소했는데 여행하고나선
자난의 선택이 옳았다는걸 깨달았다🙂
1908년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이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1858년에 지어진 아르메니아 가톨릭 성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은 무기한 폐쇄상태인 상황이다.
자난이 이야기하길 지금도 섬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빈 건물들은 매물로 올라와서 나중에 리모델링해서 개발할
사업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보건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런 저택들은 프랑스에서 본 양식과 비슷한 점이 보인다.
오스만제국의 근대화때 프랑스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독일식 저택도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곳은 그리스인 부자였던 키르바코 하코풀로스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1층부터 3층까지 23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키르바코 하코풀로스가 터키를 떠난뒤 호텔로 사용되다가 1927년부터 관공서로 사용중이다.
Con Paşa Köşkü(John Pasha Pavilion)이라고 불리는 이 목조저택은 1880년에 지어졌으며
베네치아 출신인 이탈리아인 존 파샤(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가 소유했던 건물이다.
존 파샤의 사망 후엔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살았지만 1차대전때 소식이 끊긴뒤
그리스인 건축가인 Achilles Politsis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뷔윅카다섬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저택 중 하나다.
오스만 제국 시대말기 부자들의 삶은 당시 유럽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로인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시기였다.
이 근처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해와서 살던 집의 폐허가 남아있는데 아쉽게도
당시엔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 곳이 트로츠키가 살던 저택으로 지금은 잔해만 남아있다.
스탈린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트로츠키는 이 곳에서 1929년부터 4년간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터키 공화국이 트로츠키의 망명을 받아주는 조건은 소련이 암살시도를 하지않을것을 요구했고
트로츠키에게는 터키 국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이 뷔위카다섬으로 갈수있는 교통수단은 페리뿐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웹서핑을 통해 레온 트로츠키가 뷔위카다 섬에서의 망명생활 당시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트로츠키는 망명지로 터키를 원하지 않았고 터키 문화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고
아타투르크의 반공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 알려진 바로는 트로츠키는 뷔위카다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항상 보안을 유지하고
저택내의 가구배치를 정기적으로 바꾸는등 꽤나 긴장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안 좋은 생활만은 아니었는지 가끔 그리스인 어부랑 낚시를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것 같았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중병에 걸린 트로츠키를 치료하려 의사가 왕진을 와서 청진기를
꺼내려는데 이를 의심한 트로츠키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 생각은 트로츠키에게 경호인력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제 2인자였던 사람이
저런 무례한 행동까지 했을 것 같진 않다.
어쨌든 뷔윅카다에서 체류하던 당시의 트로츠키는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 이 뷔윅카다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념적 공백상태인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연속혁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너무 어렵다.
뷔위카다 섬에서 가장 큰 저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장식때문에 목조저택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인다.
오르한 파묵이 왜 그리 옛 이스탄불의 목조저택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간다.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낀건데 자동차가 없으니까 공기가 너무 맑았다.
지나가는데 젖소가 들판에 누워있길래 가까이 가봤다.
별로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는듯 했다 하하!
963년 동로마제국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는데 악명높은 4차 십자군에 소속된
라틴 해적들에 의해 파괴됐고 오스만 제국 시대인 1751년에 재건됐는데
현재 남아있는 종탑이 그때 지어진 것이다.
종탑옆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은 1884년에 지어졌고 예배당 건물은 1905년에 지어졌다.
성당에 터키 국기가 걸려있는게 인상깊었다.
마치 이 성당이 외세에 의해 지어진 성당이 아니며 터키의 일부로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여기도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고 노출이 심한 복장은 금지되어 있다.
자난이 성당직원한테 정교회냐고 물어봤다.
성당 앞에 있는 나무에 끈을 묶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끈을 묶진 않았다.
이미 유럽온거 자체로 나는 소원을 이뤘다구 ㅎㅎㅎ
성당내부는 촬영금지여서 대신 사진을 퍼왔다.
사실 터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이 사진촬영을 금지하는건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역사적으로 증오의 타겟이 된 적이 있다보니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 같다.
왜냐면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도 오래된 성화가 많은데 플래쉬만 터뜨리지
않으면 딱히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4월 23일 성 조지의 날에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성당에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이 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해서 무슬림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렇지만 터키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당들이 많이 있다.
다만 터키의 경우는 무슬림이 주류인 국가이기 때문에 잊혀진 성당들이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이 있던 건물이다.
성당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자난과 터키쉬 커피를 한잔했다.
이 커피는 터키에선 터키쉬 커피라고 불리고 그리스에선 그릭커피,
키프로스에선 씨프리옷 커피라고 불린다.
주의해야 할게 터키 커피숍에서 그릭커피를 달라고 하거나 그리스에 있는 커피숍에서
터키쉬커피를 달라고하는건 금기시된다.
예전에 국내 여행 블로그 글을 읽는데 남키프로스에 있는 카페에서 터키쉬 커피를 달라고하자
카페주인이 '우리에게 터키쉬커피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나 씨프리옷 커피라고 할때까지
주문을 안받아줬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기억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세데프 섬을 볼 수 있었다.
여기도 비어있었는데 참 잘 지은 건물이다.
저택의 파사드 부분이 그리스 신전처럼 생겨서 발걸음을 멈췄던 건물이다.
무려 저택의 입구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저택의 첫번째 소유주는 알레포에서 온 Yorgi Sabuncakis라고 한다.
설계도 아테네 대학 건축 교수인 Fotiadis가 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엔 아주 화려했을 것같은 집이다.
뷔위카다섬에선 마차와 자전거가 주요이동수단이다.
오래된 집들이 아름답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있었다.
군산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래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칠을 하지 못한 외벽의 모습도 그런대로 좋아보인다.
방문은 하지 않았지만 소개하고 싶은 건물이 있어 올려본다.
바로 뷔윅카다에 있는 버려진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프랑스인 건축가 Alexandre Vallaury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날씬한 실루엣의 오스만-터키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1898년에 지어졌을땐 호텔과 카지노로 사용할 계획이었는데 오스만 제국 압뒬 하미트 2세가
도덕성 타락을 이유로 이를 무산시켰고 건물은 부유한 그리스인에게 팔렸고 이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기부했다고 한다.
1903년에 고아원 개관식에는 황제 압뒬 하미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요아힘 3세가 참석했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의 쉼터가 된 이 건물은 난방을 위해 러시아인들이 건물의 목재 외벽을
떼어서 땔감으로 쓰면서 건물의 손상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전쟁동안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현재는 이렇게 버려진 상태다.
복원을 위해서는 4천만 유로(현재환율로 한화 537억원)가 든다고 한다.
이게 어느정도 돈이냐면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운영했을 때 1년 입장수입의
반 정도 되는 금액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은 위험한 상태에 놓인 7대 세계유산에도 뽑혔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85년부터 관리인이 있는데 허가를 받은후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건물에서 5미터이상 떨어져있어야 한다.
1999년 이스탄불 지진으로 건물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바람으로부터 이 건물을 막아줄 지붕도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상태다...
100년전 이 섬의 고아들이 보호를 받아야했던 것처럼 이 건물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관리인의 말을 전하면 이 곳에서 자랐다는 그리스에서 온 노인이 와서 관리인과 내부를
둘러본뒤 "왜 우리집이 이렇게 됐나요?"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찍은 사진인데 9시 방향에 있는 건물이 바로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바다 건너편엔 이스탄불 아시아 지구가 보이는데 아마 저쪽엔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겠지만 여기 뷔위카다는 모든게 느리고 평화롭다.
섬을 떠나기 전에 발릭에크멕을 먹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게 너무 좋았다.
자난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은 다시 집으로 가고 나는 유럽지구로 돌아갔다.
시간은 한정돼있는데 가보지 못한 곳은 너무 많기에 나는 이 날 밤도 돌아다니기로 했다.
보드럼 사원으로 본래는 10세기에 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진 곳이다.
나에게 의미가 남다른 곳인데 나중에 이 곳에 다시 왔을때 사원의 젊은 이맘인 모하메드씨가
나를 환대해줬던 곳이다.
다만 이때는 아직 그를 몰랐을 때였다.
몰라 페나리 이사 사원으로 원래는 10세기에 지어진 정교회 수녀원과 성당이었다.
사원 명칭 중에 '이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정교회 성당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지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이 곳과 나는 인연이 없는지 이때 방문했을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두 번째 방문했을때는 복원작업 때문인지 아예 문이 닫혀있었다.
1550년에 만들어졌다는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을 발견했다.
사실 술탄아흐멧에 있는 하맘은 너무 비싼데 이 곳은 관광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저렴할 것 같다.
이 곳에 대한 소문이 몇가지가 있는데 바로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미마르 시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있다.
이땐 하맘을 체험하기 전이었는데 나중에 카파도키아에서 하맘을 즐길 수 있었다.
이 하맘이 만들어질 당시 서유럽에선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인 이유때문에
목욕을 기피했는데 동로마인들과 오스만인들은 계속해서 목욕을 했다.
터키의 국기를 보면 Red 보단 Crimson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것 같다.
마르마라 대학건물이다.
가끔 악몽을 꾸는데 대표적인 악몽이 대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그 악몽엔 18학점을 들어야한다 20학점을 들어야 한다 이런 말이 나와서
날 괴롭게 한다.
당시 집에서 먼 학교를 다녀서 지각을 했을때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수업을 포기하고
PC방으로 가거나 도서관으로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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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포스팅할 톱카프 궁전은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된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경복궁과 창덕궁을 합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경의의 문으로 제국시대엔 이 문부터 백성들의 출입이 제한됐다고 한다.
톱카프궁 앞에선 큰 개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대부분의 개들은 누워서 자고 있는데 일부는 관광객들 옆에 붙어서 어슬렁대기도 하는데
자신들이 관광객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라고 한다😂
입구에서 자난을 만났다.
왼쪽 건물이 '부엌궁전'이라는 곳으로 황실주방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곳엔 중국,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도자기가 전시되있다.
청조시대 중국도자기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중국인 단체관광객 중 어떤 아저씨가
도자기를 보고 큰소리로 "중궈다!"라고 외쳐서 깜짝 놀랐다.
무슨 큰일이라고 소리를 그렇게 질르나...
참고로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있다.
구중궁궐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옛 콘스탄티노플 구역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톱카프궁에서는 시내를 조망할 수 없었다.
아흐멧 3세 도서관이다.
도서관 내부에 있는 장식이다.
황제 알현실이다.
톱카프궁전 사원인데 규모가 아담했다.
보안요원 아저씨가 벽에 등을 기댄채로 너무 편안하게 풍경을 즐기고 있어서 평화를 깨기 싫어
조용히 구경하고 사원에서 나왔다.
궁궐의 반대편은 바다쪽이었는데 성벽으로 막혀있었다.
이즈닉에서 제작된 타일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타일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타일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칠기 기술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 파빌리온은 황제가 라마단 기간에 이프타르를 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또한 여름낮엔 그늘을 즐기는 용도로 여름밤엔 달빛을 즐겼다고 한다.
여러 개의 타일이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있다.
몇몇개는 색깔이 달라 나중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아랍어가 쓰여진 타일이다.
터키 문화재 건축물에서 아랍글자가 써있는걸 보면 마치 한국의 고궁에서 중국 한자가 연상된다.
과거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참고로 나는 한자를 잘 몰라 궁궐현판에 있는 간단한 한자도 엉뚱하게 이야기해서 친구한테
혼나곤 한다.
할례실의 입구 전체가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지속적으로 교류했기 때문에 톱카프 궁전도 서양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사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 경복궁처럼 19세기에 혁신없이 중세건축 그대로 지어진 건축물보단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편이 더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제국 의회 입구로 들어가는 문이다.
제국 회의실 내부인데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게 장식되 있다.
하렘에서 일하는 내관들이 담배를 피웠던 흡연실이라고 한다.
장대같이 긴게 바로 파이프다.
여기서부터 하렘이다.
하렘은 제국의회 건물과 바로 옆에 있는데 궁전 전체로 보면 중앙에 위치해있다.
궁전의 뒤쪽에 위치한 다른 궁전의 하렘과는 다르다.
하렘의 여인들은 하렘밖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지만 소리로 뜻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하렘의 여인들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법원건물에 있는
황제의 자리 바로 뒤가 하렘이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재판 내용을 들을 수 있었고
의사결정 과정에도 황제를 통해 참여할 수 있었다.
자난이 톱카프 궁전이 돌마바흐체 궁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관리상태가 좋지 않다고 얘기했다.
사실 그러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정말 지금 사용하고 있는 궁전을 방문한 느낌이라면 톱카프 궁전은
황제나 황실가족이 아주 오래전에 살았다가 떠나버린 느낌이 들어서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서깊은 궁전이니 난 너무 좋았다.
명나라, 청나라 궁녀들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의 하렘은
후궁들만 아니면 외부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황태후의 방에 있던 벽화인데 서양식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무라트 3세때 지어진 황제의 방이다.
1585년에 제국의 수석 건축가인 Davut Aga에 의해 지어졌다.
Davut Aga는 미마르 시난의 제자로 이스탄불에 있는 예니 사원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방은 톱카프 궁전의 다른 어떤 공간보다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황제의 방에 있는 이 돔이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큰 돔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이 아랍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비잔틴 양식에서
영향받은 돔구조이다.
돔이 금박으로 둘러쌓여있다.
황제의 개인실로 1579년 무라트 3세의 지시로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다.
왕자의 궁에 있던 스테인드 글라스인데 너무 아름다웠다.
스테인드 글라스하면 보통 유럽에 있는 성당을 떠올리는데 이곳도 너무 아름답다.
하렘에서 후궁들의 아파트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자주 거닐었던 마당이기도 하다.
아흐멧 3세 도서관 후면이다.
정의의 탑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이다.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래엔 위에서 설명한 제국회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곳에선 기독교와 이슬람과 관련된 성유물을 전시 중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을 깜빡해 인터넷에 있는 사진으로 대신한다.
내부 성유물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있다.
두 번째 일정인 하기아 이레네 성당으로 향했다. 톱카프 궁전 구역 내에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기인 337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보존된 성당은 740년에 지진에서 재건된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하기아 소피아랑 바로 옆에 있는데 이 두 성당은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만들면서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이었다.
325년에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978년부터 2014년까지 클래식 공연장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내부는 별다른게 없어서 자난은 밖에서 기다리고 나만 보고 나오기로 했다.
성당의 나르텍스 부분이다.
기록에 의하면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는데
앱스의 세미돔에 있는 십자가 빼고는 모든 모자이크가 사라져있다.
740년 재건때 성상파괴운동이 한창이었으니 그때 사라졌을수도 있고
오스만 제국때 없어졌을수도 있고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이 날 하기아 이레네를 방문한 이유가 바로 이 십자가를 보기위해서 였다.
하기아 이레네의 십자가는 성상파괴운동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쉽게 말해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거나 인간 동물 구분없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성화나 성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는 사상이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 재건된 740년엔 성상파괴운동이 한창 벌어졌던 시기였다.
이후 동서교회 모두에게 성상파괴운동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는데
보편교회(카톨릭)은 성상파괴운동 이전과 같이 성상과 성화를 모두 사용하게 했고
정통교회(정교회)는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배려하고자 성화만 사용하게 했으니
현재 두 교회의 풍습의 차이가 여기서 기인한다.
성당의 보존상태는 심각해 보였는데 천장에서 돌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져내려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늦기 전에 보수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기둥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런걸보면 이런 것들을 없애지않고 몇 백년동안 관리했던 오스만 제국 군인들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도 간혹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집에서 현재 살고 있는 주인들이 원래 있던
장식같은걸 없애지 않고 손님들에게 자랑하곤 했는데 그런 심리일까?
일부가 떨어져나간 이런 십자가를 봐도 궁금해진다.
내부장식이 전부 떨어져나간 것을 보면 앙상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성당의 아치형태를 보니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산타 코스탄자 영묘가 떠올랐다.
기독교 건축물은 석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파괴된 건물을 재건할때 완전히 새로 짓지 않고
기존에 멀쩡한 부분은 남겨놓는다거나 부재를 재활용한다거나 하는일이 많다.
창문 아래 배치된 신트로논(계단형 사제석)은 이스탄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로마시대
사제석이다.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힌 골고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왼편엔 그리스어로 성서 구절이 인용되 있다.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음직할 돔도 일체의 장식이 사라져있다.
지하철을 타고 탁심역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은 지하철이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탁심광장에 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동상이다.
대통령 시절이 묘사되었는데 조력자였던 이스메트 이노누, 페브지 차크마크 등의 인물도
표현되있다.
바로 다른면에 있는 동상으로 아타투르크의 터키 독립전쟁 사령관시절 모습을 표현했다.
탁심 이스티크랄 거리를 횡단하는 열차다.
치첵 파사주라는 곳인데 유럽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 정문이다.
흡사 궁전의 문에 쓰일 정도로 웅장하다.
아브루파 파사주라는 상점가이다.
Galata Konak Cafe 라는 곳에 들렀다.
갈라타 타워가 보이는 곳이다.
과거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으로 유명한 시르케지역이다.
한때는 이곳에서 유럽까지 철도로 이어져 있었다.
이때는 아쉽게도 보수공사 중이어서 일부가 가려져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니 이 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엄넘치는 외부와 달리 내부 인테리어는 정말 편안하다.
기차를 기다리지 않을때 플랫폼에 서면 그냥 운치있고 좋지만 막상 외국에서 기차를
타려고할때는 항상 조마조마하고 가슴을 졸인다.
자난과 시르케지역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셨다.
이 날도 정말 많은 곳을 걸어다녔다.
자난은 집에가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근처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이스탄불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인것 같다.
지형자체의 장점이 이 곳이 어떤 건축물로 채워져도 무한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게 만든다.
그래서 한때는 많은 세력들의 타겟이었고 지금도 관광객들을 매혹시키고 있는것이 아닐까?
석양과 예니사원 그리고 주야에 관계없이 드리워진 낚시대들이 인상깊다.
이 곳은 구 프랑스인 감옥으로 1850에서 190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당시 프랑스인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여기에 수감했다고 한다.
숙소에서 찍은 술탄아흐멧 사원이다.
어제 돌마바흐체 궁전 기념품점에서 산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프린트되있는 수첩이다.
숙소에서 에페스 맥주를 마셨다.
숙소내 룰이 음식은 방에서 먹어도 되지만 맥주는 베란다에서 먹어야 한다고해서
떨면서 마셨다. 그래도 여행 중에는 한번씩 맥주를 마셔줘야 마무리가 되는 것 같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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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7-2 터키 - 이스탄불: 텍풀 사라이, 발렌스 수도교, 갈라타 타워
사실 한달간의 여행이었는데 1년 넘게 연재를 해오고 있다.
요즘 뉴스를 보니 아마도 1년은 팬데믹 상황이 지속될 것 같아 보이는데 내년에도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인것 같다.
여행 이야기나 풀어내야겠다...
차이 가게를 나와서 자난이랑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걸었다.
한때는 수많은 침략자들에게 참교육을 시켜줬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규모는 옛 콘스탄티노플 구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해 군데군데 끊어진 구간이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풍화로 인한 훼손이 심각했다.
중세 요새도 그렇고 일본 전국시대 성도 그렇고 규모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멋있는 요새들이
화약무기의 발전에 의해 두껍고 단순한 모습의 성채로 대체되는 모습을 보면 아쉽다.
콘스탄티노플을 1000년간 버티게 해줬던 테오도시우스 3중성벽이다.
역사에서의 퇴장까지도 위대했던 명요새이다.
성벽의 일부가 누군가의 작업실로 쓰이고 있었다.
오래된 집들을 보면서 터키인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 작품인 이스탄불이 떠올랐다.
파묵은 한땐 세계의 보석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을 자신들의 조상인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것이
정복인지 몰락인지 고민했다.
포파이로제니투스 궁전으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궁전이었던 블라헤르네 궁전 단지의 일부였다.
이 구역에 있는 성당에서 로마누스 성인이 성모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수많은 성가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아니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라고 불러야 마땅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날에 하기아 소피아에서 예배를 마치고 가족들과 마지막 만찬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술탄의 동물원으로 쓰이다가 17세기엔 매음굴로 개조되었고
18세기엔 타일을 제작하는 공방으로 쓰여졌으며 19세기엔 유태인들을 위한 구빈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내가 갔을땐 복원작업이 막바지였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터키에서 쓰는 명칭인 Tekfur Sarayi라는 명칭의 Tekfur은 동로마 제국 황제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뜻하는 말로 로마 황제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한적하지만 한때는 서양세계를 대표하는 도시의 궁궐이었다.
전체적으로 수수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동로마 제국 후기의 경향이었다고 한다.
사진과 같이 지붕이 재건되어 있었다.
과거엔 지붕도 무너져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워낙 잘 지은 건축물이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성벽을 보수하는 작업중이었나보다.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읽어보면 어딜가나 외국인이 있었던 오스만 제국 시절에 비해
터키 공화국 초기의 이스탄불엔 외국인을 찾기도 힘들었고 길거리에도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적인 문화도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내가 파묵이 살았던 적막과 슬픔의 도시 이스탄불을
상상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정말 순간순간마다 과거의 정취가 되살아 나는듯 했다.
미리마 술탄 사원으로 쉴레이만 대제의 딸인 미리마 술탄을 위해 지어진 사원이다.
미마르 시난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같은 이름의 사원이 우스크다르에도 있는데 그 곳에 있는 사원이 더 유명하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발렌스 수도교로 378년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회색 매의 아치'라는 뜻의 보즈도간 케메리라는 터키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은 원래 규모에 비해 80%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도 충분히 길다.
제이렉 이슬람사원으로 원랜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으로 쓰이던 건축물이다.
현존하는 동로마 시대 건축물 중에선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사실 이스탄불에서 동로마시대 성당들 중에 하기아 소피아와 카리예 박물관(코라 수도원)이
유명하지만 동로마시대 성당이었던 모스크들이 15개가 넘는다.
이들 성당들은 모스크로 개조되어 실내에 성화들은 모두 없어졌지만 그래도 희미한
흔적이나마 감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카라쿄이 팰리스로 1910년 이스탄불 태생의 이탈리아인 건축가인 지울리오 몽게리의 작품으로
비잔틴 건축요소였던 반원형의 아치가 표현되었다.
지울리오 몽게리는 오스만 제국 말기와 터키 공화국 초기 많은 건축물을 디자인했고
터키 1세대 건축가들의 육성에 기여했다고 한다.
갈라타 타워앞에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다들 알았을 것이다 하하!!
주 터키 한국문화원이 문화교류를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들었다.
동로마 제국이 아닌 제노바 공화국에서 세운 건축물로 1348년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메갈로 피르고스라는 타워가 있었으나 4차 십자군에 의해 무너졌다고 한다.
1892년에 건축된 옛 터키 중앙은행 본사 건물이다. 원랜 오스만 중앙은행 본사였다.
은행건물들이 늘어선 이 거리는 Bankalar Caddesi라고 불리는데 초기 터키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곳들중 하나이다.
이 곳의 서양식 건물들은 유럽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터키도 한국도 왕정에 의한 서구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행을 시작했을때는 살이 좀 쪄서 허리띠없이 다녔는데 10키로 넘게 빠지면서 허리띠가 필요하게 되서
지하상가 상점에 들러 허리띠를 구입했는데 자난이 흥정을 해줘서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수명이 다 할때까지 썼다.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1년동안 이스탄불에서 느낀 좋은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갈라타 다리에서 쉴레이마니예 모스크가 보였다.
저녁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밝았다.
터키 디저트인 바클라바이다.
아주 풍부한 맛이 난다.
터키를 대표하는 디저트라 유럽국가들에가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터키에서 먹는게 가장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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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6-1 터키 - 이스탄불: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하기아 소피아
고난의 버스이동 끝에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이스탄불 사비하 궥첸공항으로 향하는
페가수스 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천에서 태국이 6시간정도 걸리는걸 감안하면 진짜 가까운 거리다.
짐찾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이 공항이 지하철로 도시와 연결되 있지 않아서 친절하게도 나의 터키인 친구인 자난이 공항으로 나와주었다ㅠ
사비하 궥첸 공항에서 버스로 시내로 들어가는데는 시간이 40분정도 걸렸던것 같다.
이스칸데르 케밥을 먹었다.
이날 밥을 먹지 못한터라 자난이 다 못먹겠다고해서 그거까지 다먹었다. 꺼억~ ㅋㅋㅋ
아무튼 지하철역에서 내리고 근처 환전소로 가서 고국에서 가져온 달러를 점원에게 주었더니
'노 유로?'라고 대답하더니 없다고하자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리라화로 환전을 해줬다.
유럽이랑 경제가 가까워서 그런지 유로화를 선호하다보다.
환전을 하고 나오는데 귀신같이 잘생긴 청년이 나한테 담배있냐고해서 없다고 하니까 곧바로
자기도 여행자라고 말을 건다. 2초만에 탐지 완료.. 난 너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그냥 여행 잘하라고하고 트램을 타러갔다.
트램을 타고 술탄아흐멧 광장근처 예약된 호스텔로 갔는데 간판이 없어서 같은 블록을 다섯번 뺑뺑이를 돌았다
제길슨....
자난에게 부탁해서 호스텔 스탭이 앞으로 나와주어서 들어갈수 있었다.
특이한게 이 사람도 내 이름 마지막글자와 같았다. 재밌었다.
여기 호스텔은 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도미토리 객실에 한국분이 한분 있었는데 그분도 이스탄불에 오기전에 스페인을 여행했다고 해서 즐겁게 이야길했다.
너무 피곤해서 이날은 야경촬영을 안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짐을 빼서 4일간 예약한 호스텔로 짐을 옮겼다. 위치는 큐축아야소피아 사원 근처로 잡았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추후 뷰를 올리겠음)
짐만 맡기고 술탄아흐멧 광장으로 가서 자난을 만났다.
이스탄불 박물관 카드를 샀는데 사실 가격은 해마다 달라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여기 올려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스핑크스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너무 귀여웠다;;;
기원전 9세기에 히타이트 문명에서 만든 스핑크스이다.
몇 년전 국내모방송에서 바빌론문명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위대한 바빌론'을 방영한 적이 있다.
3D로 되살린 찬란했던 바빌론 문명의 모습과 아름다운 배경음악때문에 감명깊게 본 기억이 있다.
아직까지도 화려한 색상과 완성도는 감동적이었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빌론 문명은 그 흔적조차 희미하고
바빌론 문명의 후예인 민족이 당면한 혼란으로 인해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여 소개할 상황이 못되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는 돈을 쓰는 만큼 연구가 되는 것인데 예산은 커녕 전쟁도 수습하지 못한 이라크로선 먼나라 일일 것이다.
과거 이집트 처럼 현대 이라크인들도 자신들이 바빌로니아 왕국의 후예라는 인식은 있지만 너무 오래전일이고
제대로 연구도 안됐기 때문에 내가 보기엔 그들은 아랍인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리스 인들도 오스만 제국때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생각했고 굳이 고대 그리스와 자신들을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한민족도 조선시대에 삼국시대 고구려의 요동정벌에 대한 계승의식은 있었지만 현대 한국인들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 어딜 가장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다 발굴작업을 하고 옛 유산을 보존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지금과 같은 정체성이 만들어 진 것이다.
멋있기는 사자가 멋있지만 오른쪽 상단에 있는 용(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용맞다)은
바빌로니아 유적 발굴 현장에서 몇점 나오지 않은 것이니 더 진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가는 중에 오른쪽에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잔했다.
사진은 보시는 바와 같이 비잔틴 제국시대 석관들이 놓여있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는 십자군의 약탈,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방대한 유물이
남아있어 나를 감탄하게 했다.
왼쪽부터 토르소, 니케 여신상, 아르테미스 여신상 등이다.
이 청동 뱀 머리는 원래 히포드롬에 있던 뱀기둥의 일부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폴란드 대사가 술에 취해 머리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청동뱀의 아랫턱은 분실된 뒤로 발견되지 않았다.
카렌데르하네 이슬람 사원이 '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성당'일 당시에 남아있던 모자이크를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안쪽에 깃털모양 부조가 너무 디테일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가족 묘지에서 출토된 부조들이다.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때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학자인 동시에 건축가였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에 의해 건축되었다.
수차례의 화재, 지진, 파괴 등에 시달렸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3번째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이다. 이때 돔은 반구형 돔으로 새로 지어지게 된다.
13세기 초에 4자 십자군에게 3일간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는 약탈당하게 된다. 무차별 학살은 수천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수녀들을 포함한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대주교가 서는 연단에는 매춘부를 세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했다. 귀중한 성유물들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한 예술품들이 약탈당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직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한 가운데 제국의 부활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메흐메트 2세의 항복권유를 거절하며 이야기한다.
"이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으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의지로 죽을 것"이라고....
그 해 5월 23일 지원을 요청한 베네치아의 함대가 출발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함에 휩싸인 비잔틴 제국의 의원들은 황제에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갈 것을 간청하지만 황제는 자신 스스로도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제국의 신민들과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고 거절한다.
5월 28일 포위당한 콘스탄티노플 성안 곳곳에서는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성인들의 이콘을 든 신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의 맨 앞에는 바로 유일무이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가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로마제국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기적이 다시 이뤄지길 기도했다. 신앙의 힘은 그렇게 대단했다.
황제는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무례하게 대했던 적이 있었다면 미안하다며 자신은 도시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죽을 생각이며 "그대들은 그리스와 로마영웅들의 후손들이며 조상들과 같은 용기를 보여줄것"이라며 "오늘부터 라틴인
과 로마인(그리스인)은 같은 민족이며 신에 의해 연합되었으며 그가 도시를 지켜 줄것" 이라고 이야기한다. 불과 200년
전에 콘스탄티노플을 망가뜨린 라틴인들을 황제는 끌어안았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정교회 미사가 거행되었다. 도시에 남은 정교회 사제들과 가톨릭 사제들이 함께
미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했다. 최소한 하기아 소피아에서 동서교회통합은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주 예수에게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도시를 상대로 총공격을 감행한다.
7000명의 동로마와 서유럽의 병사들은 결국 15만명의 오스만 군대의 숫자를 이겨낼 수 없었다.
황제는 몇 남지 않은 친위대와 함께 이교도 군대의 인파속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53일만에 로마제국은 황제의 죽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도시를 정복한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하기아 소피아로 들어갔다.
1000년동안 하느님의 집이었던 이 곳에서 이슬람 예배가 거행되게 된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두려움에 떨던 비잔틴제국의 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엔 이야기가 엇갈리는데 그리스에선 모두 오스만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하고,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터키에선
황제가 이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두 나라가 주장하는 바가 너무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하기아 소피아와 도시에 남아있던 비잔틴인들이 모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제국의 황실 모스크가 되었고 메흐메트 2세의 개인재산으로 소유가 변경된다.
터키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메흐메트 2세가 정교회에게서 하기아 소피아를 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이슬람군대가 도시를 점령했을때 교회건물을 모스크로 개조하는건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었다.
확실히 함락 당시엔 대부분의 정교회 성당이 동로마 유민들에게 남겨졌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성당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모스크로 개조해 나갔다.
이스탄불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을 로마황제라는 뜻의 'Kayser-i Rum'이란 호칭으로 자신을 칭했다.
물론 이 칭호는 신성로마제국,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주장하는 제3의 로마와 함께 서유럽에서 외면당했다.
하기아 소피아도 서유럽에서 점차 잊혀졌다.
오스만 제국하에서 이슬람 사원이 된 하기아 소피아엔 이슬람 미나렛(첨탑) 4개가 추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하기아 소피아가 이슬람 사람으로 개조되고 처음부터 모든 모자이크가 석고
회칠로 덮인게 아니었다. 슐레이만 대제가 몇몇개의 모자이크를 석고로 덮었을 뿐이다.
나머지 모자이크는 이슬람 사원의 노동자들에 의해 몰래 하나둘씩 뽑혀서 부적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남은 모자이크들 마저 1894년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지금 현존하는 모자이크들은 하프돔이나 높은 곳에 위치해서 노동자들의 손이 닿지않았고 동시에 술탄들도 굳이 없애고
싶지 않아서 남겨뒀거나 위에서 이야기한 석고 회칠때문에 노동자들이 잡아뜯어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중앙 하프돔의 테오토코스 모자이크나 3층에 있는 대주교들의 모자이크가 제거되지 않은 이유는 오스만 제국 술탄
자신들만이 알겠지만 이슬람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정화라는 명목하에 모두 없앤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외는 두고 싶어했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독교를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류로 보고 있었고 장기적으로 조금씩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기독교를 섬멸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조된 몇몇의 이슬람 사원에서만 이런 보존이 이뤄졌고 대부분의 개조된 비잔틴 성당에선 기존의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가 깔끔하게 모두 사라졌다.
모스크로 개조된 몇몇 비잔틴 성당에만 일종의 승리의 증표로 몇뼘 크기의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가 남아있을 뿐이다.
동시에 16세기에 건축가 미마르 시난을 통해 버트레스를 추가해 건물의 수명을 늘린 것도 오스만 제국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하기아 소피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지했겠지만 어쨌든 오스만 제국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방치했다면 에페소스 유적지에 있는 성요한 성당같은 폐허 건축물이 하나 추가됐을 것이다.
1847년 하기아 소피아는 이탈리아-스위스 출신인 포사티 형제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게 된다.
이때 손상된 정교회 모자이크들은 스케치로 기록되었고 아쉽게도 대부분이 이슬람 장식으로 교체되었다.
석고로 덮혀있던 모자이크의 존재도 확인되었지만 보수작업후 다시 석고로 덮히게 되었다.
1935년 터키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더 이상 교회나 모스크가 아닌 평화의 상징으로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도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종교적 상징에서 기억의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박물관으로 거듭나면서 회칠안에 잠들어있던 전설의 모자이크 벽화들이 부활했다.
그렇게 하기아 소피아는 종교적 상징에서 기억의 장소로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때 존재하던 정교회 성당 중에서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고 여전히 성당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몇개인지 아는지 터키인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정확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1곳만이 그것도 무슬림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만한 작은 크기인 '몽골의 성모마리아 성당'만이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고 정교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하기아 소피아는 정교회 신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 가든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성전 혹은 대성당이 존재한다.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아니면 라테라노 대성당일 것이고,
프랑스는 노트르담 대성당, 우리 한국은 명동성당이 있다.
현대 그리스 내에도 역사적인 정교회 건축물들이 많지만 가장 으뜸가는 지위를 하기아 소피아를 위해 비워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용은 정교회인들의 민감한 감정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더구나 모스크 전용에 대해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제 2의 정복'이라고 떠들어댔으니 갈등이 더 커질만하다.
오스만 제국 술탄 압둘 하미트 2세도 이스탄불 정복 기념행사를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리스인들로부터 이스탄불을
점령했기 때문에 기념식 자체가 그리스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며 반대한 것에 비교하면 개방성 면에선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어떤 무슬림들은 스페인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한 것을 예를 들며 너희부터
돌아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가 이슬람에서 정교회의 하기아 소피아와 같은 지위를
가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보다 이슬람의 카바, 가톨릭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비교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중세에 서유럽 왕국이 카바를 점령하고 가톨릭 대성당으로 개조한다면?
이슬람 교도들은 자신들 신앙의 고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와닿지 않는다면 바티칸을 힌두교 세력(그냥 가정이다)이 정복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의 장식을 힌두교 식으로 대거
바꾸고 교황은 로마 성밖 작은 교회 하나 주고 교황청으로 쓰라고 한다면?
아나톨리아를 정복한지 600년이나 되었지만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보면 아직도 문화적인 침략자 속성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 같다. 자난처럼 터키 고유의 문화와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문화적 유산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터키인들에겐 정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 앞뜰엔 십자가 부조가 조각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예수 그리스도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 좌우에 있는 메달리온은 왼쪽이 성모님이고 오른쪽이 대천사이다.
이 모자이크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일 당시 석고로 덮여있었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을 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성당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면 돔 부분은 그리스도의 눈을 상징한다.
한때는 이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모자이크가 돔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성당 건축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건축 형태에서 중앙 집중식 크로스돔 형태로 발전했다.
19세기 복원과정에서 예수의 모자이크가 사라지고 이슬람 서예로 대체되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얼마나 웅장했을지 상상이 안간다.
이보다 작은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에서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프레스코화를 본적이 있는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은 감동에 놀란 기억이 있다.
위 사진은 복원 상상도라서 실제 모자이크는 이보다 훨씬 웅장했을 것이다.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에서 성당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느님 나라를 현세에서 구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 최신기술과 자원들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종교건물뿐만 아니라 황제의 대관식등 국가행사 용도도 겸했다.
동로마 제국이 강성했을때는 황제가 매주 하기아 소피아에 방문할때마다 사제들에게 45kg나 되는 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제국의 열악한 사정으로 인해 사제들에게 줄 기부금이 없었기 때문에 1년에 6번만
방문했다고 한다.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에 쓰이던 민바르로 이슬람 이맘이 설교를 하는 단상이다.
16세기 무라드 3세때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앱스 아래 하프돔에 테오토코스 모자이크가 장식되어있다.
말은 하프돔이지만 왠만한 교회 앱스 규모 수준이었다.
성상파괴운동 이후 성화의 제작이 다시 허용되면서 867년에 바실리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메흐메트 2세의 정복후에도 이 모자이크는 회칠로 덮혀지지 않았다.
성모님이 아기 예수와 함께 옥좌에 앉아있는 성화이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남아있는 모자이크 중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이다.
이 조명은 모스크로 사용될때 추가된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채광이 다소 부족한 곳이 많은데 이슬람사원은 항상 환하게 조명이 배치되어 있다.
술탄 마흐무드 1세의 도서관이 금색 청동 그릴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 때는 이 곳에 지금은 술레이마니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5000개의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가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인데 바닥의 돌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알 수 있다.
2층에서 본 앱스 부분이 다른 성당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웅대했다.
오른쪽에 있는 세라핌 부분은 복원때 새로 그려넣은 것이다.
다만 원래 있던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때 살아남은 유일한 모자이크이다.
2층에 있는 대리석문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만져댔는지 가운데 부분이 까맣게 때가 탔다.
시노드 때 사제들이 이 문을 통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제 이 문을 넘어가면 남쪽 갤러리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2층 남쪽 갤러리의 90%는 1850년 이후에 전부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2층에서 3개의 모자이크가 살아남았다.
13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성상 파괴운동 이후에 다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왼쪽에 있는 창문때문에 수세기동안 빛이 들어와 왼쪽 성모님의 모자이크는 손상되었다고 한다.
왼쪽 성모님과 오른쪽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간을 구원할 것을 청하고 있다.
17세기에 석고로 덮혀졌다.
이 모자이크가 훼손이 심한 이유는 19세기 복원작업때 복원사들이 도착하기전에 작업자들이
벽의 크랙을 조사하려고 석고로 덮힌 패널의 일부를 벗겼을때 세례 요한 모자이크의 절반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디시스 모자이크가 장식되기 전에는 황제나 대주교의 모자이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 좌우로 요한네스 2세, 이레네 황후가 표현되어 있다.
왼쪽의 요한네스 2세의 얼굴부분, 특히 오른쪽 눈 부분은 의도적으로 손상되었다.
오른쪽의 이레네 황후의 눈부분이 손상되었고 가운데 아기예수의 오른쪽 눈 일부와 입 부분이 손상되었다.
술탄 압둘 메지드가 포사티 형제가 발견한 금색 모자이크를 보자 이들이 거액을 들여 모자이크를 새로 만든줄 알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모자이크가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이런 아름다운 모자이크들을
숨긴 그의 조상들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포사티 형제가 발견한 모자이크들은 다시 석고로 덮혀졌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와 예수 그리스도, 조에 황후이다.
황제는 금화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있고 조에 황후는 황실의 기부금 목록이 적힌 두루마기를 바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모자이크는 조에 황후의 전 남편의 모자이크를 지우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메달리온은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보수작업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서예가 카자스케르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의 작품이다. 직경 7.5미터로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와같은 메달리온이 총 8개가 하기아 소피아에 설치되 있으며 각각 알라, 선지자 모하메드, 4명의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그리고 모하메드의 손자인 하산, 후세인의 이름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위 사진의 글자는 후세인이다.
선지자 모하메드의 이름이 아랍어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몰랐는데 자난이 아랍어 글자를 조금 안다고해서 알려주었다.
십자가 모양 장식이 있었던 자리가 뽑혀있었다.
예전에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화를 찬성하는 터키인이 나에게 말하길 하기아 소피아에게 박물관이란
명칭이 맞지 않다고 하면서 그냥 건축물일 뿐이고 안엔 전시물도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작은 흔적 하나하나가 이곳이 박물관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면서 그것도 옛날 말이 됐지만.....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자세히 살펴보시길 추천한다.
여기 있는 대리석과 기둥, 모자이크 하나 하나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모스크로 사용됐던 시기에 채색된 천장이다.
정교회 성당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장식과 이슬람 사원일때 만들어진 장식은 때론 구분이 확실하지만 어떨땐 서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자난이 정교회 장식도 좋지만 이슬람 장식도 나쁘지 않다고 했던게 기억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겸손함이 느껴져서 지금도 오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된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기준으로 하는 자치제도인 딤미 제도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기존의 로마제국에서 정교회 조직으로 통치주체가 이관되었다.
이는 스페인이 과거 지배세력이었던 무슬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던 것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에 비하면 인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따져들어가면 그리스인들은 말을 탈 수 없었으며, 정교회 건물은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지을수가 없었고
정교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이슬람교도가 정교회로 개종하는건 금지되었다.
제국 말기에 딤미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그리스인이 오스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무슬림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터키인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당장의 혼란을 피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제도였지만 결국 전쟁으로 끝났다.
분할통치 제도아래서 결국 터키인들과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제국 신민으로 융화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유스티아누스 1세, 성모님, 아기 예수, 콘스탄티누스 1세이다.
유스티아누스 1세는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님에게 봉헌하고 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성모님에게 봉헌하고 있다.
자난이 나오면서 나에게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 기도를 했냐고 물어보았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고 그게 맞는것 같다고 했다. 그게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의 취지를 존중하는 길이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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