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유랑

고난의 버스이동 끝에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이스탄불 사비하 궥첸공항으로 향하는

페가수스 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천에서 태국이 6시간정도 걸리는걸 감안하면 진짜 가까운 거리다.

짐찾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이 공항이 지하철로 도시와 연결되 있지 않아서 친절하게도 나의 터키인 친구인 자난이 공항으로 나와주었다ㅠ

사비하 궥첸 공항에서 버스로 시내로 들어가는데는 시간이 40분정도 걸렸던것 같다.

 

 

 

이스칸데르 케밥을 먹었다.

이날 밥을 먹지 못한터라 자난이 다 못먹겠다고해서 그거까지 다먹었다. 꺼억~ ㅋㅋㅋ

 

아무튼 지하철역에서 내리고 근처 환전소로 가서 고국에서 가져온 달러를 점원에게 주었더니

'노 유로?'라고 대답하더니 없다고하자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리라화로 환전을 해줬다.

유럽이랑 경제가 가까워서 그런지 유로화를 선호하다보다.

 

환전을 하고 나오는데 귀신같이 잘생긴 청년이 나한테 담배있냐고해서 없다고 하니까 곧바로

자기도 여행자라고 말을 건다. 2초만에 탐지 완료.. 난 너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그냥 여행 잘하라고하고 트램을 타러갔다.

 

트램을 타고 술탄아흐멧 광장근처 예약된 호스텔로 갔는데 간판이 없어서 같은 블록을 다섯번 뺑뺑이를 돌았다

제길슨....

자난에게 부탁해서 호스텔 스탭이 앞으로 나와주어서 들어갈수 있었다.

특이한게 이 사람도 내 이름 마지막글자와 같았다. 재밌었다.

여기 호스텔은 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도미토리 객실에 한국분이 한분 있었는데 그분도 이스탄불에 오기전에 스페인을 여행했다고 해서 즐겁게 이야길했다.

너무 피곤해서 이날은 야경촬영을 안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짐을 빼서 4일간 예약한 호스텔로 짐을 옮겼다. 위치는 큐축아야소피아 사원 근처로 잡았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추후 뷰를 올리겠음)

짐만 맡기고 술탄아흐멧 광장으로 가서 자난을 만났다.

이스탄불 박물관 카드를 샀는데 사실 가격은 해마다 달라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여기 올려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Museum of the Ancient Orient

 

스핑크스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너무 귀여웠다;;;

기원전 9세기에 히타이트 문명에서 만든 스핑크스이다.

 

 

 

Museum of the Ancient Orient

 

몇 년전 국내모방송에서 바빌론문명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위대한 바빌론'을 방영한 적이 있다.

3D로 되살린 찬란했던 바빌론 문명의 모습과 아름다운 배경음악때문에 감명깊게 본 기억이 있다.

아직까지도 화려한 색상과 완성도는 감동적이었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빌론 문명은 그 흔적조차 희미하고

바빌론 문명의 후예인 민족이 당면한 혼란으로 인해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여 소개할 상황이 못되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는 돈을 쓰는 만큼 연구가 되는 것인데 예산은 커녕 전쟁도 수습하지 못한 이라크로선 먼나라 일일 것이다.

과거 이집트 처럼 현대 이라크인들도 자신들이 바빌로니아 왕국의 후예라는 인식은 있지만 너무 오래전일이고

제대로 연구도 안됐기 때문에 내가 보기엔 그들은 아랍인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리스 인들도 오스만 제국때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생각했고 굳이 고대 그리스와 자신들을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한민족도 조선시대에 삼국시대 고구려의 요동정벌에 대한 계승의식은 있었지만 현대 한국인들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 어딜 가장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다 발굴작업을 하고 옛 유산을 보존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지금과 같은 정체성이 만들어 진 것이다.

 

 

Museum of the Ancient Orient

 

멋있기는 사자가 멋있지만 오른쪽 상단에 있는 용(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용맞다)은

바빌로니아 유적 발굴 현장에서 몇점 나오지 않은 것이니 더 진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가는 중에 오른쪽에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잔했다.

사진은 보시는 바와 같이 비잔틴 제국시대 석관들이 놓여있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는 십자군의 약탈,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방대한 유물이

남아있어 나를 감탄하게 했다.

 

 

 

 

 

 

왼쪽부터 토르소, 니케 여신상, 아르테미스 여신상 등이다.

 

 

 

이 청동 뱀 머리는 원래 히포드롬에 있던 뱀기둥의 일부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폴란드 대사가 술에 취해 머리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청동뱀의 아랫턱은 분실된 뒤로 발견되지 않았다.

 

 

 

카렌데르하네 이슬람 사원이 '테오토코스 키리오티사 성당'일 당시에 남아있던 모자이크를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안쪽에 깃털모양 부조가 너무 디테일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가족 묘지에서 출토된 부조들이다.

 

 

 

 

 

 

 

 

 

 

 

 

 

 

 

 

 

 

 

 

 

 

 

Hagia Sophia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때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학자인 동시에 건축가였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에 의해 건축되었다.

수차례의 화재, 지진, 파괴 등에 시달렸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3번째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이다. 이때 돔은 반구형 돔으로 새로 지어지게 된다.

 

13세기 초에 4자 십자군에게 3일간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는 약탈당하게 된다. 무차별 학살은 수천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수녀들을 포함한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대주교가 서는 연단에는 매춘부를 세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했다. 귀중한 성유물들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한 예술품들이 약탈당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직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한 가운데 제국의 부활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메흐메트 2세의 항복권유를 거절하며 이야기한다.

"이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으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의지로 죽을 것"이라고....

그 해 5월 23일 지원을 요청한 베네치아의 함대가 출발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함에 휩싸인 비잔틴 제국의 의원들은 황제에게 안전한 곳으로 도망갈 것을 간청하지만 황제는 자신 스스로도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제국의 신민들과 함께 죽기로 결정했다고 거절한다.

 

5월 28일 포위당한 콘스탄티노플 성안 곳곳에서는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성인들의 이콘을 든 신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의 맨 앞에는 바로 유일무이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가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로마제국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기적이 다시 이뤄지길 기도했다. 신앙의 힘은 그렇게 대단했다.

황제는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무례하게 대했던 적이 있었다면 미안하다며 자신은 도시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죽을 생각이며 "그대들은 그리스와 로마영웅들의 후손들이며 조상들과 같은 용기를 보여줄것"이라며 "오늘부터 라틴인

과 로마인(그리스인)은 같은 민족이며 신에 의해 연합되었으며 그가 도시를 지켜 줄것" 이라고 이야기한다. 불과 200년

전에 콘스탄티노플을 망가뜨린 라틴인들을 황제는 끌어안았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정교회 미사가 거행되었다. 도시에 남은 정교회 사제들과 가톨릭 사제들이 함께

미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했다. 최소한 하기아 소피아에서 동서교회통합은 이뤄진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주 예수에게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도시를 상대로 총공격을 감행한다.

7000명의 동로마와 서유럽의 병사들은 결국 15만명의 오스만 군대의 숫자를 이겨낼 수 없었다.

황제는 몇 남지 않은 친위대와 함께 이교도 군대의 인파속으로 돌격을 감행했다.

53일만에 로마제국은 황제의 죽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도시를 정복한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하기아 소피아로 들어갔다.

1000년동안 하느님의 집이었던 이 곳에서 이슬람 예배가 거행되게 된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두려움에 떨던 비잔틴제국의 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엔 이야기가 엇갈리는데 그리스에선 모두 오스만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하고,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터키에선

황제가 이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두 나라가 주장하는 바가 너무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하기아 소피아와 도시에 남아있던 비잔틴인들이 모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제국의 황실 모스크가 되었고 메흐메트 2세의 개인재산으로 소유가 변경된다.

터키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메흐메트 2세가 정교회에게서 하기아 소피아를 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이슬람군대가 도시를 점령했을때 교회건물을 모스크로 개조하는건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었다.

확실히 함락 당시엔 대부분의 정교회 성당이 동로마 유민들에게 남겨졌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성당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모스크로 개조해 나갔다.

 

이스탄불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을 로마황제라는 뜻의 'Kayser-i Rum'이란 호칭으로 자신을 칭했다.

물론 이 칭호는 신성로마제국,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주장하는 제3의 로마와 함께 서유럽에서 외면당했다.

 

하기아 소피아도 서유럽에서 점차 잊혀졌다.

 

 

Hagia Sophia Camii

 

오스만 제국하에서 이슬람 사원이 된 하기아 소피아엔 이슬람 미나렛(첨탑) 4개가 추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하기아 소피아가 이슬람 사람으로 개조되고 처음부터 모든 모자이크가 석고

회칠로 덮인게 아니었다. 슐레이만 대제가 몇몇개의 모자이크를 석고로 덮었을 뿐이다.

나머지 모자이크는 이슬람 사원의 노동자들에 의해 몰래 하나둘씩 뽑혀서 부적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남은 모자이크들 마저 1894년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지금 현존하는 모자이크들은 하프돔이나 높은 곳에 위치해서 노동자들의 손이 닿지않았고 동시에 술탄들도 굳이 없애고

싶지 않아서 남겨뒀거나 위에서 이야기한 석고 회칠때문에 노동자들이 잡아뜯어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중앙 하프돔의 테오토코스 모자이크나 3층에 있는 대주교들의 모자이크가 제거되지 않은 이유는 오스만 제국 술탄

자신들만이 알겠지만 이슬람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정화라는 명목하에 모두 없앤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외는 두고 싶어했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독교를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류로 보고 있었고 장기적으로 조금씩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기독교를 섬멸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조된 몇몇의 이슬람 사원에서만 이런 보존이 이뤄졌고 대부분의 개조된 비잔틴 성당에선 기존의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가 깔끔하게 모두 사라졌다.

모스크로 개조된 몇몇 비잔틴 성당에만 일종의 승리의 증표로 몇뼘 크기의 프레스코화나 모자이크가 남아있을 뿐이다.

 

동시에 16세기에 건축가 미마르 시난을 통해 버트레스를 추가해 건물의 수명을 늘린 것도 오스만 제국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하기아 소피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지했겠지만 어쨌든 오스만 제국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방치했다면 에페소스 유적지에 있는 성요한 성당같은 폐허 건축물이 하나 추가됐을 것이다.

 

1847년 하기아 소피아는 이탈리아-스위스 출신인 포사티 형제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게 된다.

이때 손상된 정교회 모자이크들은 스케치로 기록되었고 아쉽게도 대부분이 이슬람 장식으로 교체되었다.

석고로 덮혀있던 모자이크의 존재도 확인되었지만 보수작업후 다시 석고로 덮히게 되었다.

 

 

 

1935년 터키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면서 더 이상 교회나 모스크가 아닌 평화의 상징으로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도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종교적 상징에서 기억의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박물관으로 거듭나면서 회칠안에 잠들어있던 전설의 모자이크 벽화들이 부활했다.

그렇게 하기아 소피아는 종교적 상징에서 기억의 장소로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때 존재하던 정교회 성당 중에서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고 여전히 성당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몇개인지 아는지 터키인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정확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1곳만이 그것도 무슬림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만한 작은 크기인 '몽골의 성모마리아 성당'만이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고 정교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하기아 소피아는 정교회 신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 가든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성전 혹은 대성당이 존재한다.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아니면 라테라노 대성당일 것이고,

프랑스는 노트르담 대성당, 우리 한국은 명동성당이 있다.

현대 그리스 내에도 역사적인 정교회 건축물들이 많지만 가장 으뜸가는 지위를 하기아 소피아를 위해 비워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용은 정교회인들의 민감한 감정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더구나 모스크 전용에 대해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제 2의 정복'이라고 떠들어댔으니 갈등이 더 커질만하다.

오스만 제국 술탄 압둘 하미트 2세도 이스탄불 정복 기념행사를 자신들의 조상들이 그리스인들로부터 이스탄불을

점령했기 때문에 기념식 자체가 그리스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며 반대한 것에 비교하면 개방성 면에선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어떤 무슬림들은 스페인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한 것을 예를 들며 너희부터

돌아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메스키타가 이슬람에서 정교회의 하기아 소피아와 같은 지위를

가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보다 이슬람의 카바, 가톨릭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비교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중세에 서유럽 왕국이 카바를 점령하고 가톨릭 대성당으로 개조한다면?

이슬람 교도들은 자신들 신앙의 고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와닿지 않는다면 바티칸을 힌두교 세력(그냥 가정이다)이 정복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의 장식을 힌두교 식으로 대거

바꾸고 교황은 로마 성밖 작은 교회 하나 주고 교황청으로 쓰라고 한다면?

 

아나톨리아를 정복한지 600년이나 되었지만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보면 아직도 문화적인 침략자 속성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 같다. 자난처럼 터키 고유의 문화와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문화적 유산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터키인들에겐 정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 앞뜰엔 십자가 부조가 조각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예수 그리스도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 좌우에 있는 메달리온은 왼쪽이 성모님이고 오른쪽이 대천사이다.

이 모자이크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일 당시 석고로 덮여있었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을 보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성당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면 돔 부분은 그리스도의 눈을 상징한다.

 

 

 

한때는 이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모자이크가 돔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성당 건축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건축 형태에서 중앙 집중식 크로스돔 형태로 발전했다. 

19세기 복원과정에서 예수의 모자이크가 사라지고 이슬람 서예로 대체되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얼마나 웅장했을지 상상이 안간다.

 

이보다 작은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에서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프레스코화를 본적이 있는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은 감동에 놀란 기억이 있다.

 

위 사진은 복원 상상도라서 실제 모자이크는 이보다 훨씬 웅장했을 것이다.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에서 성당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느님 나라를 현세에서 구현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 최신기술과 자원들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종교건물뿐만 아니라 황제의 대관식등 국가행사 용도도 겸했다.

동로마 제국이 강성했을때는 황제가 매주 하기아 소피아에 방문할때마다 사제들에게 45kg나 되는 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제국의 열악한 사정으로 인해 사제들에게 줄 기부금이 없었기 때문에 1년에 6번만

방문했다고 한다.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에 쓰이던 민바르로 이슬람 이맘이 설교를 하는 단상이다.

16세기 무라드 3세때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Theotokos

 

앱스 아래 하프돔에 테오토코스 모자이크가 장식되어있다.

말은 하프돔이지만 왠만한 교회 앱스 규모 수준이었다.

성상파괴운동 이후 성화의 제작이 다시 허용되면서 867년에 바실리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메흐메트 2세의 정복후에도 이 모자이크는 회칠로 덮혀지지 않았다.

성모님이 아기 예수와 함께 옥좌에 앉아있는 성화이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남아있는 모자이크 중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이다.

 

 

 

이 조명은 모스크로 사용될때 추가된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채광이 다소 부족한 곳이 많은데 이슬람사원은 항상 환하게 조명이 배치되어 있다.

 

 

Library of Sultan Mahmud

 

술탄 마흐무드 1세의 도서관이 금색 청동 그릴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 때는 이 곳에 지금은 술레이마니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5000개의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가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인데 바닥의 돌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알 수 있다.

 

 

 

2층에서 본 앱스 부분이 다른 성당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웅대했다.

오른쪽에 있는 세라핌 부분은 복원때 새로 그려넣은 것이다.

 

다만 원래 있던 모자이크는 성상파괴운동때 살아남은 유일한 모자이크이다.

 

 

 

2층에 있는 대리석문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만져댔는지 가운데 부분이 까맣게 때가 탔다.

시노드 때 사제들이 이 문을 통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제 이 문을 넘어가면 남쪽 갤러리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2층 남쪽 갤러리의 90%는 1850년 이후에 전부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2층에서 3개의 모자이크가 살아남았다.

 

 

Deesis

 

13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성상 파괴운동 이후에 다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왼쪽에 있는 창문때문에 수세기동안 빛이 들어와 왼쪽 성모님의 모자이크는 손상되었다고 한다.

왼쪽 성모님과 오른쪽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간을 구원할 것을 청하고 있다.

17세기에 석고로 덮혀졌다.

이 모자이크가 훼손이 심한 이유는 19세기 복원작업때 복원사들이 도착하기전에 작업자들이

벽의 크랙을 조사하려고 석고로 덮힌 패널의 일부를 벗겼을때 세례 요한 모자이크의 절반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디시스 모자이크가 장식되기 전에는 황제나 대주교의 모자이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 좌우로 요한네스 2세, 이레네 황후가 표현되어 있다.

왼쪽의 요한네스 2세의 얼굴부분, 특히 오른쪽 눈 부분은 의도적으로 손상되었다.

오른쪽의 이레네 황후의 눈부분이 손상되었고 가운데 아기예수의 오른쪽 눈 일부와 입 부분이 손상되었다.

 

술탄 압둘 메지드가 포사티 형제가 발견한 금색 모자이크를 보자 이들이 거액을 들여 모자이크를 새로 만든줄 알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모자이크가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이런 아름다운 모자이크들을

숨긴 그의 조상들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포사티 형제가 발견한 모자이크들은 다시 석고로 덮혀졌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와 예수 그리스도, 조에 황후이다.

황제는 금화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있고 조에 황후는 황실의 기부금 목록이 적힌 두루마기를 바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모자이크는 조에 황후의 전 남편의 모자이크를 지우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메달리온은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보수작업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서예가 카자스케르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의 작품이다. 직경 7.5미터로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와같은 메달리온이 총 8개가 하기아 소피아에 설치되 있으며 각각 알라, 선지자 모하메드, 4명의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그리고 모하메드의 손자인 하산, 후세인의 이름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위 사진의 글자는 후세인이다. 

 

 

 

선지자 모하메드의 이름이 아랍어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몰랐는데 자난이 아랍어 글자를 조금 안다고해서 알려주었다.

 

 

 

십자가 모양 장식이 있었던 자리가 뽑혀있었다.

예전에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화를 찬성하는 터키인이 나에게 말하길 하기아 소피아에게 박물관이란

명칭이 맞지 않다고 하면서 그냥 건축물일 뿐이고 안엔 전시물도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작은 흔적 하나하나가 이곳이 박물관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면서 그것도 옛날 말이 됐지만.....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자세히 살펴보시길 추천한다.

여기 있는 대리석과 기둥, 모자이크 하나 하나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모스크로 사용됐던 시기에 채색된 천장이다.

정교회 성당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장식과 이슬람 사원일때 만들어진 장식은 때론 구분이 확실하지만 어떨땐 서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자난이 정교회 장식도 좋지만 이슬람 장식도 나쁘지 않다고 했던게 기억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겸손함이 느껴져서 지금도 오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된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기준으로 하는 자치제도인 딤미 제도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기존의 로마제국에서 정교회 조직으로 통치주체가 이관되었다.

이는 스페인이 과거 지배세력이었던 무슬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던 것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에 비하면 인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따져들어가면 그리스인들은 말을 탈 수 없었으며, 정교회 건물은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지을수가 없었고

정교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이슬람교도가 정교회로 개종하는건 금지되었다.

 

제국 말기에 딤미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그리스인이 오스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무슬림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터키인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당장의 혼란을 피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제도였지만 결국 전쟁으로 끝났다.

분할통치 제도아래서 결국 터키인들과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제국 신민으로 융화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유스티아누스 1세, 성모님, 아기 예수, 콘스탄티누스 1세이다.

유스티아누스 1세는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님에게 봉헌하고 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성모님에게 봉헌하고 있다.

자난이 나오면서 나에게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 기도를 했냐고 물어보았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고 그게 맞는것 같다고 했다. 그게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의 취지를 존중하는 길이었기를 바란다.

 

2020년 7월 10일 터키의 타이이프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변경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하기아 소피아 모스크이며 박물관 당시 받았던 입장료는 더 이상 없다.

 

2년 전이었다.

나의 첫 유럽여행때 터키인 친구의 인도로 하기아 소피아를 구경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역사적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터키인들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유산을 공존시키는 것에 대해

세속주의 터키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중의 하나인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면서 모스크로 사용되다가

1935년 터키공화국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에 의해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왜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터키 공화국의 정교분리 세속화 정책과 더불어 1923년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에서 제외된

50여만명의 그리스인이 터키에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는데

바로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키면서 그들을 달래고

더 나아가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존을 추구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서방세계로 편입을 의도한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오스만제국 시대에 회칠로 덮여있던 모자이크들이

복원되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왜 오스만제국이 성화 모자이크들을 없애지 않고 회칠을 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엔 모자이크를 다 제거하는 것보다 회칠하고 그 위에 이슬람 장식으로 덮는게

더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 결과 동로마 시대의 모자이크들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회칠을 하지 않은 모자이크들은 모스크의 인부들이 하나둘씩 떼내서 부적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성당의 모자이크 조각들은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이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화 한 것은 내부 결속용으로 보인다.

최근 몇년간 에르도안과 이슬람주의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이 경제와 외교 둘 다

실패하면서 점차 등을 돌리고 있는 지지층을 선동하려면 이것만큼 좋은 아이템이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나 영국인들은 더 이상 제국을 꿈꾸지 않지만 집권여당을 지지하는 터키인들에게

오스만제국의 부활은 영원한 지상과제이다.

반면에 터키의 세속주의자들은 이미 이스탄불에만 3000개의 모스크가 있는데 에르도안의 인기를 위해

저런 무리수를 감행해야 하냐고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약 에르도안이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화로 유럽인들의 분노를 의도했다면

기획단계서부터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서유럽에선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감을 표명한것외엔 별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그마저도 교황으로서 동서교회일치의 의무를 한 것이라고 보면 그저 할일을 한것 이상의

워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12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정교회는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에게 정서적으로 상당히 먼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동서교회의 결합도 시도했지만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고 모스크화 되면서

하기아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 잊혀지게 되었고 말이다. 

십자군들이 만든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 예루살렘을 다시 무슬림들에게 뺏겼을때

손바닥 뒤집듯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금지하고 로마 성지순례로 대체한 것이 서유럽이다.

사실 가톨릭 역사 전체로 보면 상당히 나중에 지어진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탔을때

받았던 세계적인 관심에 비하면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은 서유럽지역에는 별 반향이 없다.

단지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와 러시아만 화나게 했을 뿐이다.

특히 그리스에선 테살로니키에 있는 터키의 국부 아타투르크의 생가를 그리스인 학살 기념관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하지만 반서방 정서를 가지고 있는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이 그것까지 신경쓸리 없을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로 전환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3가지로 요약해볼까 한다.

 

 

첫 번째로 문화재 훼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모스크로 전환된 하기아 소피아에서 이슬람 예배를 드릴땐

후진의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모자이크는 커튼으로 가리거나 레이저를 투사해서

안보이게 할 예정이라고 한다.

레이저가 어떤 방식으로 모자이크를 가릴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즉 어떻게 할지 준비가 안됐단 소리다.

모자이크라는건 굉장히 민감해서 조명의 세기도 조절해야하고 강한 빛을 반사하면

색이 탁해지는데 당장 24일에 열릴 첫 이슬람 예배에서 어떻게 할려고 그럴까?

카리예 박물관에서도 모자이크를 향해 직접 조명을 투사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하기아 소피아 모자이크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까?

 

후진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모자이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기아 소피아는 지금도 손봐야할곳이 한두군데가 아닌 문화재이다.

1년에 330만명이나 되는 관광객들이 내는 비싼 입장료(100리라: 현재 환율 17560원)로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무료화 할 경우 관리측면에서 소홀해지지 않을까?

지지층 단결을 위해 한 해 입장수입 500억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이슬람 장식만해도 보수할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당장 모스크로 전환하는게 그렇게 시급한 일일까?

 

두 번째로 모스크로 전환된 분위기에선 복원작업이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의 복원작업은 1930년대 모자이크 복원을 기본틀로 해서

2009년에 천사의 모자이크를 복원하는등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박물관이던 당시에도 기독교와 이슬람 장식 양쪽을 고려해서 아주 신중하게 복원작업을

해왔는데 이제 완전히 모스크가 된 이상 이슬람 유산만이 보수되거나

복원작업 전체가 지지부진해질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


몇년전에 하기아 소피아 모스크 전환 이슈가 다시 등장했을때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터키인과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화에 찬성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야기하는 바가 가관이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전시품도 없는데 무슨 박물관이냐면서 모스크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약에 모스크로 개조되면 이슬람은 성화를 우상으로 보는데 복원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 제거하거나 다시 오스만 제국 시대처럼 회칠로 덮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정이 떨어져서 다시 이야기하는일은 없었다.

 

 

세 번째로 하기아 소피아가 지니고 있는 종교간의 화해, 관용의 정신이 훼손된다는 것이다.

 

터키는 98%가 이슬람 교도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오늘 주제인 하기아 소피아, 모스크로 전용된 동로마시대 구 정교회 성당들, 성모마리아의 집,

성 요한교회 유적들이 보존되어있고 세속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외국의 기독교도들도 성지순례로 자주 찾는 관광지이다.

 

하기아 소피아가 아니라도 각기 다른 종교가 하나의 건축물에 녹아들어간 케이스는 많다.

하지만 하기아 소피아처럼 다른 종교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문명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은 보기 힘들다.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을 찬양하지만 레콩키스타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수복한 스페인 왕조가

무슬림 왕조의 흔적을 지우기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가했고

지금 우리가 보는 알함브라 궁전은 현대에 많은 부분이 새로 만들어져 추가된 것이 사실이다.

두 곳을 다가본 나로서는 하기아 소피아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하기아 소피아처럼 건물 기둥에 있는 작은 흠집에도 그 속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나

궁금해지는 건물이 또 있을까?

 

하기아 소피아의 작은 흔적도 관람객을 멈춰서게 만든다.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은 과거 하기아 소피아의 박물관 전환이 아주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한다.

모스크 전환 이후에도 모자이크가 보존되는 것은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환영할 일이나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원하는대로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개조되지 않았다면

동로마 시대 모자이크들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긴 힘들 것 같다.

 

한가지 분명히 해야할게 하기아 소피아를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터키의 고유권한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아 소피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건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혹자는 하기아 소피아가 인류의 유산이기 때문에 터키 마음대로 해선 안된다고 하지만

영국이 파르테논 대리석군을 돌려주지 않을 때도 같은 논리가 아니었나.

단지 잘 관리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쉽게도 그 고유권한을 슬기롭게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많다.

500억원을 포기하면서까지 21세기에 종교적 단결을 공고히 하려는 터키도 그렇지만

좀 다른 케이스지만 우리도 구 서울시청을 기습철거하려고 한지 10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지금도 일제강점기 건물들에 대해 흉물과 문화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2020년엔 더 이상 문화유산을 국가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