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유랑

 

해적선 모양을 한 배가 바로 운영되고 있는데 칵테일을 마시면서 바다를 한바퀴 운항한다고 한다.

이런 배들이 테살로니키에 3척이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장기여행이라 금전적으로 이런데서 돈이 조금씩 소진되는게 부담도 되고 시간도 부족해서 과감히 패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상이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내 블로그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건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존재했던 그리스계 도시국가나 섬에 존재했던 문명의 역사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가장 사랑받는건 이 동상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활약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역사다. 여기저기 모래알처럼 분열돼있던 그리스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리스 지역과 동방 지역의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비록 돈과 시간이 한정돼있어서 가지 못했지만 다음 번 여행 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 도시인 그리스의 페라 지역을 꼭 가보고 싶다. 그리스가 많은 섬들, 영토가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영토 크기보다 실제 여행을 하는건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스 사람들은 죽기 전에 그리스 지역을 모두 여행하는게 꿈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관광객들에겐 '산토리니국'이라고 불려야 할 정도로 산토리니와 아테네에 편중돼 있지만 알아보면 알아볼 수록 저평가된 도시가 참 많다.

물론 모든 그리스 도시가 유적지가 채일정도로 많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대도시들도 경제성장기에 난개발이 심각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만으로도 한번쯤은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들이다. 비록 역사에서의 존재감보다 초라해서 실망할지라도 그것도 여행의 한 부분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배워가는게 있을지도 모른다.

 

 

Λευκός Πύργος

 

흔히 화이트 타워라고 불리는 건축물로 그리스어로 레프코스 피르고스라고 불린다. 1535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축된 탑으로 같은 위치에 동로마제국시대인 12세기에 건축됐던 탑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 역사학자 프란츠 바빙거는 이 곳이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설계했다고 추측했다.

 

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부탁했더니 "No"라고 해서 "뭐지? 이 싸가지는..."하고

그 여성과 같이 온 일행인 다른 여자한테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고맙다고 하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니까 아르메니아에서 왔다고 했다.

얘기 끝내고 내 갈길을 가려고 하는데 아까 사진찍어주는걸 거부한 여자가 오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영어를 잘 못해서 내가 자기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뜻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경쓰지 말라고하고 자리를 떴다.

역사적인 사건으로나 접하던 아르메니아 인들과의 첫 조우라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닥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솔직하게 사과하는 모습에 근본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래 나는 전망대에 큰 흥미는 없어서 일본여행갈때 천수각 빼면 잘 안가는 편인데 화이트 타워는 꼭 한번 들러보고 싶었기에 티켓을 사서 들어갔다. 혹시 내가 잘 모를 거라고 염려했는지 입구에 있던 직원분이 이 곳은 도시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기념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럴땐 그냥 들어야지 예를 들어 서울에 온 미국 관광객이 가이드가 설명을 하는데 "네... 저 4대궁 다 알아요... 경희궁은 복원이 되면 좋을텐데 아쉬워요" 이러면 좀 웃기잖아? ㅎㅎㅎ

 

 

Λευκός Πύργος

 

계단이 완만하게 지어져있어서 올라가는게 그리 힘들지 않다.

 

 

Λευκός Πύργος

 

Λευκός Πύργος

 

Λευκός Πύργος

테살로니키에서 출토된 도자기가 전시돼있었다.

 

Λευκός Πύργος

 

바닥재로 쓰이던 모자이크가 전시돼 있었다.

 

 

 

도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품들이 설치돼 있었는데 주로 오스만 제국 시대가 많았다.

 

 

 

 

 

그리스에서 오스만제국 시대의 역사에 대해선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는 이즈미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스미르나가 그리스인들에게 아직도 크나큰 향수로 남아있는 것처럼 셀라닉(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시대 이름) 이라는 이름만으로 많은 터키인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리스에 오기전 이스탄불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셀라닉으로 간다고할때 좋은 도시라고 하면서 그가 보였던 반응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약간의 상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서 일본식 가옥을 찾고 터키에서 비잔틴 제국의 흔적을 찾고 반대로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잔재를 찾는다.

 

이런 과거의 잔재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막상 방문을 했을땐 그 아우라가 어슴푸레하게 남아있을 뿐이어서 상상력과 주의력을 동원해야 겨우 알아차릴 만한 유적들이 많았다. 심지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고해도 말이다.

이 곳도 오스만 제국이 만든 건축물이지만 투르크인들이 떠났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대 피의탑이라고 불리던 서슬퍼런 분위기는 남아있지 않다. 

 

 

Λευκός Πύργος

 

탑의 최상층인데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어서 기념엽서를 2장 샀다.

이 중에 한 장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평소 잘가는 카페 사장님께 드렸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사실 제 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이 없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그건 내가 다른 나라의 교통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서 일 것이다. 나는 도시에 지하철이 없으면 비록 우리나라라도 왠만하면 걸어다니려고 한다. 이유는 실수로 버스를 탈때 방향을 반대로 타면 안타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ㅎㅎ 

 

 

 

저 앞엔 망망대해로 펼쳐지는 것같이 보이지만 저기도 드넓은 에게해의 한쪽 귀퉁이일 뿐이다.

 

 

 

마케도니아 조선소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테살로니키는 고대 때부터 배를 만들던 도시라고 한다.

이 곳의 조선회사들은 큰 대기업보다 중소규모의 가족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국립 북부그리스 극장이다.

건물외관을 대리석으로 장식한게 인상깊다.

코모티니에서 테살로니키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렸다.

3시간이면 꽤 먼거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유럽여행에서 했던 장거리 이동에 비하면 가까운 것이었다.

 

비잔틴 문화 애호가인 필자에게 가장 가볼만한 도시 3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스탄불, 라벤나, 테살로니키를 꼽고 싶다.

 

오늘 포스팅할 테살로니키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내내 쇠락한 적이 없는 역사적인 도시로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살로니키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15곳의 초기 기독교 성당과 비잔티움 유적이 위치해있다.

이 곳이 동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의 제 2 도시로서 번영했던 이유는 바로 구 로마(로마)와 신 로마(콘스탄티노플) 중간에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과 마찬가지로 이 곳 테살로니키도 황제를 위한 궁전과 요새, 공회당, 성당, 도서관, 각종 편의시설 등 당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만들어졌다.

 

 

Γιαχουντί Χαμάμ

 

이 곳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목욕탕인 야후디 하맘이다.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 시대 제2의 도시로 '셀라닉(Selanik)'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큰 번영을 누렸다.

 

현재는 전시회 공간으로 비정기적으로 사용 중인데 도시에 남은 오스만 제국 시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홍보도 안하고 이런식으로 비정기적으로 운영할 경우 더더욱 알길이 없게된다.

나야 소수의 특이한 관광객이니까 인터넷을 찾아서도 가겠지만...

단편적인 인상으론 그리스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이런 곳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홍보까진 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규물지네(코모티니의 터키어 명칭), 데데아치(알렉산드로폴리스의 터키어 명칭)는 트라키아지역 역사에 딱히 관심이 없으면 터키 젊은 세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터키인들이 셀라닉이라는 도시에 갖는 향수는 어마어마하다.

가령 여행에서 만난 터키인들에게 테살로니키 이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셀라닉이라는 이름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Γιαχουντί Χαμάμ
Γιαχουντί Χαμάμ

 

Αλκαζάρ Θεσσαλονίκης(Hamza Bey Camii)

 

본래 '함자 베이 자미'라는 이름이었던 옛 이슬람사원 이었던 곳이다.

그리스 독립 이후 극장으로 개조되어 '알카자'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468년에 지어진 것으로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고 있는 옛 비잔티움 성당들을 표기할때 현재 사원 이름을 쓰고 그 다음 원래 이름을 표기했는데 그리스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해서 현재 쓰이는 이름인 '알카자 테살로니키(함자 베이 자미)'라고 표기했다.

 

아쉽게도 복원공사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숙소를 언덕위에 있는 호스텔로 잡았는데 도시 중앙에서 빨리걸어서 30분이고 버스타기도 애매하고 은근히 빡세다.

이럴거면 그냥 짐이 무겁더라도 백팩메고 하나라도 저녁에 체크인을 할 걸 그랬다.

그래도 이런 것도 경험이니까....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오스만식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테살로니키엔 이런 분수대가 자주 보였다.

그중엔 지금도 분수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이 도시에 터키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수대위엔 아랍어로 장식된 동판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언덕 왼편에 성 테오도레스 성당이 보인다.

1990년에 지어진 성당인데 이탈리아의 성당들이 바실리카→비잔티움→로마네스크→르네상스 양식(고딕, 바로크, 고딕 양식 혼용)으로 발전했다면 그리스는 바실리카에서 비잔티움 양식으로의 발전은 이탈리아와 동일하지만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시대로 발전할때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게 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샤리아 법에 따라 새로 짓는 성당의 규모는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지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동네 강당 정도로 퇴보하는 양상으로 이뤄졌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그리스의 종교건축은 다른 양식으로 변화하기보다 그 동안 금지됐던 동로마제국 시절의 비잔티움 양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다만 현대에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대체됐고 성화의 표현에 있어서 헬레니즘적인 감정표현이 강화됐다. 하지만 이런 비잔티움 회귀 성향과 러시아에서 유행한 네오 비잔티움 스타일 건축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비잔티움 양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기존 구조에서 변화를 꽤해 돔을 극대화시키거나 바로크 양식, 신고전주의 등을 도입하는 특징이 있지만 그리스의 네오 비잔티움 양식은 기존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Αίγλη γενί χαμάμ(Yeni Hamam)

 

돔에 빨간색이 칠해진 것도 이 곳이 오스만 제국이나 터키가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만약 그랬다면 하맘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음식점으로 개조해서 사용 중인데 겨울엔 클럽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건물 내부 사진을 보면 하맘의 기본 구조는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 끝에 이슬람식 오지 아치가 있었다.

 

 

 

이런 형태가 오지 아치로 기독교식 건축물과는 구분된다.

 

 

Atatürk Evi Müzesi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태어난 집으로 대부분의 터키인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태어났을땐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1933년에 터키 공화국의 10주년을 기념하여 그리스 정부가 아타투르크 대통령에게 이 집을

선물했고 나중에 터키 영사관으로 소유권이 이전되게 된다.

 

터키 메르신 지방에 있는 타슈주라는 도시와 수도인 앙카라에 이 생가의 복제품이 있다.

생가로 들어서니 그리스인 직원과 터키인 직원 2명이 나를 맞아주었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직원분들이 놀라기도 한것 같은데 아주 친절하게 환영해주었다.

 

 

 

앞뜰에서 삼각대로 사진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박물관 구역 모든 곳에서 삼각대 촬영을 금지하여 사진은 찍지 못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사진이 전시돼있었다.

 

 

 

내부는 이렇게 전시실처럼 꾸며져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살았던 때처럼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다.

10년 정도 전엔 이 곳이 전시실이 아니라 박물관 전체가 가정집처럼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부 터키인들은 지금은 너무 박물관같다고 예전 모습을 그리워 하는 것 같다.

 

 

 

침실이 있던 1층 모형이다.

 

 

 

2층의 모형이다.

 

 

 

10대 시절의 아타투르크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타투르크의 모친은 아타투르크가 어린시절 이슬람 교육을 받길 원해서 이슬람 학교로 보냈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세속주의 성향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아타투르크의 모친인 주베이데 하님의 모습이 밀랍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주베이데는 이름이고 하님은 투르크 계열 유목민족 사이에서 지체높은 여성들을 호칭할때 사용되던 단어로

남성의 '칸'과 비슷한 명칭이다.

아타투르크의 금발벽안은 모친에게서 유전된 것이다.

 

 

 

밀랍으로 만든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형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밀랍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마치 살아있는듯 했다.

이 당시의 모습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1920년대 말~ 1930년대 초반)의 아타투르크 대통령을 표현한 것 같다.

 

 

 

테살로니키는 동로마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 말기엔 유대인, 투르크인에 이어 3번째 인구 비율로 떨어지게 된다. 이는 다른 지방으로부터 투르크인들의 이주와 더불어 기존의 그리스인 정교회 교도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테살로니키가 현재 그리스령이기 때문에 아타투르크가 그리스어를 구사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그리스어를 구사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단지 그리스어로 된 노래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당시 다민족 사회였던 셀라닉(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제국시대 공식명칭)에서 간단한 그리스어 정돈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는 정도다.

 

그리스인들 중에선 자신들과 전쟁을 한 지도자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리스에 대해 그가 한말을 옮겨본다.

 

"내가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이 5세기 동안 함께 형제처럼 살아온 테살로니키의 아들이자 루멜리아의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이 피를 흘렸던 전쟁에 참전한 것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불행히도 그걸 운명, 필연 아니면 역사라고 부르든지간에 나는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그리스인들과 더 많이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양측이 (그리스와 터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는데 실패한 것은 나에게 평생 가슴아픈 일입니다."

 

 

 

박물관엔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은 옷을 잘 입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니 옷뿐만이 아닌 당대에 유행했던 모든 문화에 능했다.

전시된 구두를 보면 요즘 유행하는 구두보다도 선이 날렵하고 멋있다.

이 도시는 한글로는 크산티(Xanthi)로 표현하는것 같지만 실제 발음은 산씨(띠와 씨의 중간)라고 부르는데

크산티로 표현하면 마치 내가 가지않은 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영 어색하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근처에 있는 이 곳을 발견했다.

담배창고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트라키아 지방의 담배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이 지역에서

생산된 담배는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3번째로 큰 농구장이다.

 

 

 

성 라파엘, 니콜라스, 이레네 성당(그리스어로는 라파일, 니콜라우, 이리니)이라는 곳이다.

멀리서보니 미쳐 다 지어지지않은 성당이 아우라가 굉장해서 찾아갔다.

원래 들어오면 안되는 것 같았는데 어떤 중년의 그리스 여성분이 들어가길래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서 성당을 둘러보고 있는데 정교회 신부님께서 오더니 짧은 영어로 친절하게 환영해줬다.

내가 구경하고 있을땐 신부님이 불편한 눈치를 주거나 빨리 나가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나중에 나갈때 보니 신부님이 대문을 잠궜는데 원랜 공사중이라 개방을 안하는 것 같다.

이런 경험은 그리스에 있는 다른 곳에서도 경험했는데 혼자서 지키는 소규모 전시관 같은 경우

내가 마지막 입장시간을 약간 넘겨서 들어왔을때 굳이 불편하게 안하고 살짝살짝 지켜보다가

관람을 다 마치고 나가면 잘가라고하고 문을 닫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식 친절이라는건가...

(물론 이건 예외적인 경우니 독자분들은 그리스를 여행할때 꼭 입장시간을 지켜주시길 부탁드린다.)

사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신부님들이 대부분 너무 친절했다.

이탈리아에선 관광지를 주로 다녀서 그런지 신부님들과는 이야기할 일이 없었는데

그리스에선 신부님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그리스의 성당도 속전속결로 짓지않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짓는다고 한다.

 

정교회 성당 앞엔 이렇게 그리스 국기와 정교회 깃발(원랜 동로마 제국의 깃발이었다.)이

걸려져 있다.

이것은 그리스가 오스만령이었을때 정교회가 사라진 비잔틴 제국 대신 구심점으로서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인데 그리스에서 정교회의 위치는 민족종교로서의 성격도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 남부에서 한번씩 볼수 있었던 양식인 것 같다.

 

 

 

건축물은 세월을 머금을수록 아름답다.

 

 

 

테라스가 보기좋게 꾸며져 있었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성 12사도 성당이라는 곳이다.

특이하게도 펜던티브 돔양식이 아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정교회 성당이다.

190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1954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포스팅을 하면서 느끼지만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은 대부분이 국내 웹사이트는 물론이고

위키피디아나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혹시 몰라서 여행중에 성당 이름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찍은게 도움이 되었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파사드의 모자이크는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왼쪽과 오른쪽엔

각각 베드로 성인과 사도 바울이 표현되어 있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성당에 들어가니 봉사하시는 아주머니가 반겨주셨다.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가면 신부님이나 직원분들이 반겨주는 경우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유의미하게 아주 많았다.

그것은 정교회가 우월하다는 의식이 아닌 진심으로 정교회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친절함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개신교회를 내가 근처에도 가지 않는 이유가 너무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너무들 쉽게 개종권유를 하기 때문이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서울 아현동에 있는 정교회인 성니콜라스 대성당의 성화와

비슷했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 성당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

사실 내 블로그에선 성당장식중에선 모자이크 작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도 중요한 요소이다.

모자이크와 마찬가지로 스테인드 글라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성서'라고

불릴 정도로 문맹이었던 사람들에게 성서를 대신해서 신앙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도 단순히 아름답고 멋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모자이크처럼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돼있다.

사진처럼 성모님이 입고있는 옷의 색깔인 파란색은 하늘, 희망, 성실, 경건을 상징한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입고있는 옷색깔인 하얀색은 주로 신을 위해 표현하는 것으로 

순결, 순수함을 의미한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간구' 성화는 주로 모자이크에만 봤는데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건 처음이었다.

 

 

Ναός 12 Αποστόλων

 

왼쪽에 있는 깃발이 정교회를 상징하는 쌍독수리 깃발이고 오른쪽이 그리스 국기이다.

사실 국기가 성당에 걸려있는게 일반적인 모습은 아닌데 이런 예외적인 특징이

나타난 이유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 통치하에 있을때 정교회를 구심점으로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했고 그리스의 독립에도 정교회가 일익을 담당했다.

쌍독수리 깃발은 후기 동로마 제국을 상징했던 쌍독수리 문양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당시 쌍독수리 문양이 깃발로 사용된 적은 없고 옷에 자수 등으로

사용되었다.

 

 

Δημοτική Αγορά

 

이 곳은 '디모티키 아고라' 라는 곳으로 육류와 수산물, 과일 등을 파는 전통시장이다.

1935~4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았다고 하는데 도시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잃었다고 슬퍼하는듯 하다.

한국같은 경우는 보존을 위해서는 건물을 성격을 바꾸기도 하는데 여긴 건축물이

원래 용도로 사용되게끔 하려는 의식이 있는 것 같다.

건물 내부에도 흑백사진으로 시장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Δημοτική Αγορά

 

현대 건축물이지만 반복되는 아치의 모습이 인상깊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치 양식이 처음 도입된 곳은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된 로도스섬의 인도교라고 한다.

 

 

Δημοτική Αγορά

 

 

Καθεδρικός Ναός της του Θεού Σοφίας

 

크산티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다.

성당의 디자인이 코모티니에 있는 성모희보 대성당을 연상하게 했다.

전통성과 현대의 기술이 만난 완벽한 디자인이고 더 빼고 더할 것도 없다.

그냥 그대로 이 자리에 있으면 충분한 아름다움을 준다.

 

 

Καθεδρικός Ναός της του Θεού Σοφίας

 

돔양식은 기독교 건축에서 발견되는 최고의 성취가 아닐까?

 

 

Καθεδρικός Ναός της του Θεού Σοφίας

 

판토크라토르는 그리스어로 만물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세계의 왕들처럼 왕관을 쓰거나 왕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돔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눈은 인간의 영혼을 직접 들여다 본다.

사전지식없이도 판토크라토르와 마주했을때 신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Καθεδρικός Ναός της του Θεού Σοφίας

 

가톨릭의 성화는 본래 정교회랑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많은

발전이 있었다.

정교회 미술도 변화는 있었지만 급격한 변화보단 비잔틴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비잔틴 성화를 보다가 근세 서유럽 성화를 보면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곳은 크산티의 랜드마크인 시계탑으로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것이다.

1972년 크산티현청에 의해 철거될 뻔했다.

이유는 이 시계탑이 도시 한가운데에서 시민들에게 오스만제국 시대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 소수인종단체를 고려하여 시계탑은 보존하는 쪽으로 선회하되

시계탑에 붙어있던 대리석 초생달 장식과 아랍어 장식은 제거되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보다 더 험악하다.

지난 일들은 다 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기엔 과거의 끔찍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Εκκλησία Αγίου Βλασίου

 

성 블라시우스 성당으로 1838년에 지어진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Οικία Μάνου Χατζιδάκι

 

옛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진 저택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크산티도 다른 트라키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그리스 영토가 된 곳이다.

 

 

 

여기도 이렇게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다.

그리스도 한때 난개발이 심하게 이뤄졌지만 현재는 오래된 건물들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재개발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구의 2동, 객관적으로 봐서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푸근하고 정감이 갔던 그 동네가 지금은 구역 자체가 사라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

마치 전쟁에서 미사일을 투하해서 마을 하나가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진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Εκκλησία Αγίου Γεωργίου

 

에클레시아 아기오 게오르기우스 우리말론 성 게오르기우스 성당이다.

1842년에 지어졌으며 이 성당을 보자마자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것임을 확신했는데

오스만 시대 말기까진 돔형 성당을 짓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교회 종탑에 다소 소심한

인상을 줄 정도로 작게 표현된 돔의 모습이 그 것이다.

오스만 제국 때 지어진 정교회 건축물들을 보면 외관이 최대한 교회스럽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정도로 종탑이 없으면 교회인지 그냥 집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Εκκλησία Αγίου Γεωργίου

 

외관은 수수했지만 내부는 그래도 측랑도 있고 의자들도 세월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보통 돔이 있는 곳에 판토크라토르 성화가 있는데 이 곳은 돔은 없지만 천장에 판토크라토르 성화를

설치함으로서 돔의 부재를 보완하려 했다.

 

 

 

성당을 버티고 있는 코린토스 열주를 보면 정교회가 단순히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고

그리스 로마 문화의 타임캡슐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종교의 보수적인 면을 봤을때 돌을 던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보수성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과 그리스 로마 유산이 지켜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정교회를 온전히 지켜주던 모체가 사라졌을때 그리스 문화도 함께 잊혀져 갔다. 

 

 

Εκκλησία Αγίου Γεωργίου

 

신부님이 크리스챤이냐고 물어서 가톨릭이라고 하니까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한때 원수였던 점, 그리고 대부분의 원인이 가톨릭왕국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상기하면 내가 머나먼 동아시아에서 오긴 했지만 그렇게 따뜻하게

환영해주신 것에 대해 존경심이 일었다.

또한 이 곳엔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와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는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메흐메트 파샤 빌딩이라는 곳인데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때

지어진 건물이다.

 

 

 

크산티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크산티하면 이 실루엣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터키식 가옥이 눈에 띄었다. 보존상태도 좋고 잘지은 집이다.

이 가옥은 현재 시립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나 전시가 비정기적이기 때문에 닫혀있을때가

많다고 한다.

 

 

Λαογραφικό και Ιστορικό Μουσείο Ξάνθης

 

이 곳은 크산티 민속역사 박물관이다.

원래는 담배를 취급하던 거상이었던 Vassilis Kougioumtzoglou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말기는 크산티가 도시로서 가장 번영하던 시기였다.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가보자.

 

 

 

트라키아 지역 전통 복장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전형적인 그리스 복장과 많이 다르다.

그리스하면 연상되면 헬레니즘적인 복장이 아닌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Λαογραφικό και Ιστορικό Μουσείο Ξάνθης

 

그리스도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지역별로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전통복식도 다 다르다.

 

 

 

다이닝룸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시대 그리스 부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오스만 제국 말기에 등장한 그리스인 거상들은 향후 그리스 독립에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Λαογραφικό και Ιστορικό Μουσείο Ξάνθης

 

 

Λαογραφικό και Ιστορικό Μουσείο Ξάνθης

 

박물관 내부는 정성스럽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Λαογραφικό και Ιστορικό Μουσείο Ξάνθης

 

호화로운 저택이지만 당시 모든 그리스인들이 이런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스만 제국 말기 법적으로 이교도 신민들의 처우가 다소 나아졌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개종하지 않고도 외교관, 상인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았던건

사실이지만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인 파이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유한 그리스인들은 한정적으로 존재했다.

그런 부유한 그리스인들의 삶을 이 저택에서 느낄 수 있다.

 

 

Λαογραφικό και Ιστορικό Μουσείο Ξάνθης

 

관람을 거의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리스인 할아버지가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해서

남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젊은 시절에 1960년대때 한국에서 해외자원봉사단체를 통해

한국에 계신적이 있었다고 한국 도시들의 지명을 이야기해주셨다.

할아버지도 일행이 있으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다.

언어의 차이로 인해 서로 생각하는 바를 전부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한국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시려는걸 느낄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헤어질때도 못내 아쉬웠다.

한국엽서나 조그마한 기념품이라도 있으면 드렸을텐데 아쉽게도 가지고 있는게 없었다 ;;

이때 교훈으로 여행을 할땐 한국 관련 기념품들을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Ιερός Μητροπολιτικός Ναός Τιμίου Προδρόμου

 

1839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도시에서 오래된 성당 중 한 곳이다.

이 성당앞에 작은 광장이 있는데(사진에 일부가 보인다)

벤치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영어로 어디서 왔냐고 묻더니 한국이라고 하니까

북한 김정은 얘기를 하며 폭탄이 터지는 흉내를 입으로 내며 김정은을 조심하라고 했다ㅋㅋ

유쾌한 아저씨였다.

 

 

Ιερά Μητρόπολις Ξάνθης και Περιθεωρίου

 

 

Εκκλησία Παμμεγίστων Ταξιαρχών Καβακίου

 

 

Εκκλησία Παμμεγίστων Ταξιαρχών Καβακίου

 

1934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이곳에는 원래 작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크산티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물음표가 인상적이었다.

이걸보니 꼭 뭔가 질문을 해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는데 아무말 대잔치같이 질문을

해보자면 서트리키아와 동트라키아는 달라?라는 것이다.

아마 원랜 같았으나 지금은 다르다는 대답이 어울릴 것이다.

갈라진 두 지역에 사는 민족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지역이 나눠져도 괜찮아?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이 세상의 지도엔 너무 많은 모순이 있으니

지금 현실에 순응하고 최대한 더 나쁜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곳에선 히잡쓴 사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Ι.Ν. Αγίου Νικολάου (Church of Saint Nicholas)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는 곳이다.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코모티니로 다시 돌아왔다.

여긴 공원인데 숙소에서 이 곳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겨울만 아니었다면 앉아서 여유를 만끽했을텐데 아쉽다.

 

 

 

옷이 더러워져서 무인빨래방으로 왔는데 그리스어를 읽지못해서 세탁기 조작에 어려움을 겪다가

친절한 현지인 남성의 도움으로 세탁을 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또한 티비에 그리스팝 방송을 틀어놔서 몇곡을 스마트폰으로 인식해서 나중에 따로

찾아서 들어보았다.

 

 

 

숙소로 와서 스파르탄 맥주를 먹었는데 고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 부대의 공격처럼

시원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