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유랑

아침에 일어나서 나 혼자 파티흐구를 돌아보다가 우스크다르에서 자난과 만나기로 했다.

이 날 여행은 이른 아침부터 자정까지 엄청난 활동량을 보였던 날로 기억한다.

1분 1초도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가려고 했던 일정, 그 숨가쁜 일정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볼까 한다.

 

 

베야지트 트램역 근처에 있던 케밥가게에서 Döner 케밥을 사서 먹었다.

뭐가 한국어로 표준인진 모르겠다만 한국 매체에선 Döner를 '되네르'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발음인줄알고 터키에서 '되네르'라고 하니까 대부분 못알아 들었다.

'도나르'라고 해야된다.

아무튼 한국에도 도나르 케밥을 파는 곳이 많이 있지만 저 뻣뻣하고 질긴 특유의 빵은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터키에 다녀온 뒤로 저런 빵을 무척 좋아하게됐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11세기에 완성된 성당으로 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복되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붙여진 성당이다.

 

이후 13세기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에 의해 재수복 된후 프로토스트라토르였던

미카엘 두카스 글라바스 타르차나이오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수되게 된다.

그가 사망한뒤엔 미망인인 마리아가 수녀가 되면서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성당의 소예배당을 추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성 사도 성당에 이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성당으로 1456년부터 1587년까지

사용된 곳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성당의 역사는 성사도 성당→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 성당

→성 요르고스 성당 순이다)

 

1587년 성당은 오스만제국의 황제 무라드3세의 아제르바이잔 정복을 기념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게 되는데 이때 '페티예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꼈다.

즉 현재의 이름인 페티예 박물관이라는 명칭이 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이스탄불에서 하기아 소피아, 코라 수도원 다음으로 비잔틴 모자이크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기실 건물의 많은 부분이 개조되고 추가됐지만 후기 비잔틴 건축양식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본관은 이슬람사원으로 쓰이고 있고 부속 예배당만이 박물관으로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페티예 박물관 앞에는 버려진 동로마 시대 기둥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곳이 천년동안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그냥 동네 공원에

로마시대 돌기둥이 나뒹굴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인류가 고대 유적에 관심을 가진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에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나르텍스엔 아무것도 없는 벽만이 노출되어 있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으론 인류를 축복하고 있고 오른손으론 성서를 들고 있다.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스어 비문은 수녀 마르타가 그녀의 남편을 기리기 위해 이 예배당을

구원의 서약으로 바친다고 쓰여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계몽자 성 그레고리오다.

아르메니아가 세계에서 첫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한 성인이다.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관계가 극도로 안 좋아진 상황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성모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을 청하는 간구 모자이크.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대천사 미카엘의 모자이크이다.

이렇게 훼손된 모자이크를 보면 언제 저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천사 우리엘의 모자이크이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구원을 청하는 세례요한.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대천사 라파엘

얼굴이 너무 선하게 디자인 되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자난이 저 선모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축복을 뜻하는

표시라고 한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성 카리톤의 눈이 파여져 있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성 안토니우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루넷에 남아있는 이 모자이크는 페티예 박물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서 장면이다.

예수 그리스도 왼쪽은 세례 요한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둘기는 성령을 표현했다.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세례당에도 이와 비슷한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 아래 위치한 프리즈는 상감 기법으로 장식돼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페티예 박물관에도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인물들은 구약의 예언자로 12시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사야, 모세, 예레미야, 스바니야, 미카, 요엘, 즈카르야, 오바드야, 하바쿡, 요나, 말라키, 에제키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밑에 예언자들은 하늘과 땅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한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예수 그리스도가 오른손으로는 인류를 축복하고 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왼쪽은 성 사바, 오른쪽은 성 요한 클리마쿠스이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예전에 쓰여졌을 기둥들이 무심하게 늘어서 있었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 지어진 미나렛이다.

 

 

 

퍼온 사진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보다시피 많이 개조되었고

사원으로서도 미술적 측면에선 특별하지 않은 것 같다.

 

 

Fethiye Camii(Theotokos Pammakaristos)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들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테오토코스 팜마카리스토스 성당처럼 작은 돔으로 지어진 동로마 후기 건축물에선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페네르 지역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인들이 모여살았던 곳이다.
오스만 제국 말기 이스탄불 인구 중에서 20%가 그리스인이었다.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때도 이스탄불은 교환 지역에서 면제됐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그리스인들이 대거 이스탄불을 떠나게 된 사건이 1955년에 일어난 이스탄불 폭동이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아타투르크의 생가가 폭파되었다는 가짜뉴스때문에 촉발된 폭동은

그리스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으로 번지고 말았다.

(물론 부가적으로 키프로스의 터키인 학살사건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시에서 이교도들을 벌하자는 외침이 골목골목마다 울려퍼졌다.

그리스인들이 평생을 일궈온 집과 점포들, 교회들, 묘지들이 파괴됐다.
사실 당시 세속주의 터키에서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집단증오에 선동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나라도 만보산 사건같은 반 중국인 폭동을 겪었기 때문에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탄불 폭동과 만보산 사건의 기록사진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스탄불 폭동을 끝으로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멸종된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100년 뒤에 페네르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예전에 홋카이도를 여행했을때 하코다테에 있는 북방민족 자료관의 전시사진 속에 있던

아이누족의 사진처럼 저들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이 텅비어있는 목조주택을 보니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옛 이스탄불의 모습이 연상된다.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정겹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을 봤다.

골목 한복판에서 고양이가 누워있는데 그 곳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운전자가 이를 보고

다시 후진을 해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었다.

광경이 너무 재밌어서 자난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Çeşmesi라고 하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에 공공수도로 설치됐다고 한다.

현대에 와선 집집마다 수도가 공급되기 때문에 그냥 모뉴먼트로만 남아있는 곳이 많다.

관광지에 있는  Çeşmesi같은 경우 역사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나오게끔 해놓은 곳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터키와의 친선으로 서울 어린이대공원역 근처에 있는 공원에

터키식 수도가 있으니 구경해봐도 좋을 것 같다.

 

 

 

이스탄불엔 이런 동로마 시대 폐허들이 길가다가도 자주 보인다.

이런 유적 하나하나가 굉장히 유서깊은 역사의 흔적이지만 이런 유적을 완벽하게 보존 관리하는

프로젝트는 국가 하나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울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만 해도 포로 로마노를 둘러싼 고대 로마 유적들은 잘 보존했지만 콜로세움 건너편에

있는 목욕탕 유적은 발굴만 하고 일단은 펜스쳐놓고 보류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페네르 정교회 신학교이다.

페네르 정교회 신학교의 역사는 14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렇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듬해이다.

이 신학교를 졸업한 그리스인들중에선 오스만제국의 장관까지 역임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터키역사도 프로파간다 영향이 강해서 어느정도 걸러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인들이 나중에 오스만 제국에서 고위직에 임명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연봉의

실권없는 직책에 많이 등용됐다.

현존하는 학교건물은 1881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리스 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스탄불 폭동 이후로 많은 학생이 떠나고 현재는 학생이

50여명만 남아있다.

어쩌면 지금 이 포스팅을 할때는 더 줄어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에 6명의 신입생이 등록했다고 한다.

 

 

 

페네르 지역은 그리스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번화가보다 보수적이고 아랍인들에 가까운 옷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라거나 폭력적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니

불필요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벽에 One Way Islam이라는 낙서가 적혀있었다.
가슴 한켠이 답답해졌다.

 

 

Theotokes Panaghiotissa

 

1281년에 지어진 곳으로 '몽골의 성모마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정교회 성당이다.

동로마 황제 미카엘 8세의 서녀였던 마리아 팔레올로기나가 정략결혼한 일칸국의 아바카 칸이

사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설립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동로마 제국시대부터 한번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적이 없는 성당이다.

그마저도 메흐메트2세가 이 성당의 보호를 약속하는 칙서가 있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유일하게 개조되지 않은 정교회 성당이 동로마시대에 지어진 성당 중에 가장 작은

성당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교회 조직이 세월의 풍랑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곳도 이스탄불 폭동때 내부가 파괴되는 참화를 겪었다.

아쉽게도 시간상 방문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사실 내부는 옛 느낌이 별로 없다.)

 

 

Theotokes Panaghiotissa

 

성당의 정문이다.

성당 앞에 차가 세워져있었는데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강경에 꽤 크고 오래된 일본식 창고 건물이 있는데 두 번 갈때 전부 차들이 창고를 가로막고

있어서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오스만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터키 프로파간다에선 제국의 일원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았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고

2등 신민으로서 쉴레이만같은 성군치세엔 그럭저럭 잘 지내기도 했지만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킬때는 가혹한 처분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때 그리스인들의 반란이 100번정도 된다고 알려졌으니 이들에 대한

대응은 상당히 변덕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건축양식이 신고전주의 양식이라 나중에 찾아봤는데 그리스인 초등학교였다.

 

 

Πατριαρχικός Ναός Αγίου Γεωργίου(Aya Yorgi Patrikhane Kilisesi)

 

성 요르고스 대성당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 성당이다.

 

오래전에 자난과 했던 약속이 유적지 명칭을 표기할 때 비잔틴 시대 유적이라고 해도

현재 사용되는 터키식 이름을 먼저 붙이고 그리스식 명칭을 병기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터키인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이 건축물들을 잘 보존했으면 하는 바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가를 쓰고 내 여행을 도와주었던 자난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이 곳만큼은 현존하는 건물이니 만큼 예외적으로 그리스식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항상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하기아 소피아에서의 퇴거로부터 3번째 쫓겨간 곳이 이 곳이다.

이 곳은 1600년에 지어졌지만 몇번의 화재를 거듭해 지금 남아있는 성당은 19세기 중반에

재건된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신 고전주의로 지어져 비잔틴 양식과 연속성을 찾아볼 수 없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하기아 소피아에 비하면 작은 성당인데 이는 당시 이슬람의

딤미법에 근거해서 기독교 건물이 이슬람 사원보다 크게 짓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도 안드레아가 만든 정교회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고

세계 정교회 신자 3억인의 영적 고향이다.

나는 가톨릭이지만 오래 전 동서교회 분열의 역사를 알고 나선 정교회가 가톨릭보다

조금도 못할것이 없고 상호동등한 정통교회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성당에 입장할때 입구에서 보안검사를 받아야하는데 이 곳은 90년대까지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됐던 곳이고 지금도 테러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카톨릭에서 바티칸과 같은 곳. 하지만 그 규모는 너무나도 작고 수수하다.

 

 

Πατριαρχικός Ναός Αγίου Γεωργίου(Aya Yorgi Patrikhane Kilisesi)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경건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멀리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신 바오톨로메오스 1세를 볼 수 있었다.

 

 

Πατριαρχικός Ναός Αγίου Γεωργίου(Aya Yorgi Patrikhane Kilisesi)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런건 아니지만 일부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바로 그리스 독립전쟁 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반란으로 정의하고 규탄했기

때문인데 당연히 총대주교는 도시에 남아있는 그리스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Πατριαρχικός Ναός Αγίου Γεωργίου(Aya Yorgi Patrikhane Kilisesi)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사제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벽 중간에 있는 페디먼트는 예전 성당에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불가리아 성당으로 강철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겨우겨우 버스를 타서 에미노누로 돌아왔다.

이제 페리를 타고 우스크다르로 갈 것이다.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려면 꽤 비싼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이 곳은 운송수단으로 쓰이고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뱃놀이를 할 수 있다.

안에서 터키쉬 커피를 파니 커피 한잔을 하면서 마르마라해를 즐겨보자.

 

 

 

건너편에 어제 방문한 돌마바흐체 궁전이 보였다.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시대의 전설을 지닌 크즈 쿨레시(처녀의 탑)다.

현존하는 탑은 오스만 제국 시대인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

탑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Mihrimah Sultan Camii

 

우스크다르에 도착해서 자난을 만났다.

자난이 루트를 다 알려주긴했지만 그래도 실수없이 도착했다는 것에 스스로 너무 대견했다.

 

위의 사진은 미리마 술탄 사원으로 슐레이만 1세의 딸인 미리마 술탄이 후원해서 지어진 곳이다.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작품으로 그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건축물만 300여개가 된다고 한다.

 

속설에는 미마르 시난이 미리마 술탄에 대한 사랑을 이 모스크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게 흔한 야사인지 정말 사실이었는진 알 수 없지만 이 모스크는 미리마 술탄을 고려한듯

유려한 디자인으로 표현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원의 차양막과 본 건물의 조화가 마치 치마를 입은 여성이 연상된다고들 한다.

 

 

 

배를 타고 우스크다르에 도착했다.

우스크다르는 6.25 전쟁 당시 터키군이 불러서 유명해진 [Üsküdar'a Gider İken]라는

노래제목에 나오는 지명이다.

 

 

Mihrimah Sultan Camii

 

사원에 들어가려는데 히잡을 쓰고 있는 한 여성이 누가 신발을 훔쳐갈 수 있으니

잘 챙기라고 이야기했다.(자난이 통역해줌)

히잡을 쓴 여성들을 외국에서 봤을 때 보수적이고 대화라도 하면 큰일날 것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 친절하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터키가 아닌 다른 무슬림이 주류 인구인 나라에서 모스크에 들어갈 때 나에대한 불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터키에서는 가장 편안한 곳이 모스크였다.

걸어가다 힘들면 넓은 모스크에서 앉아서 쉬어도 나같은 이교도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오스만 제국 전역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다.

시난도, 미리마 술탄의 어머니인 휴렘 술탄도, 미리마 술탄의 남편이었던 뤼스템 파샤도

원래는 투르크인이 아니었다. 전부 비 투르크 기독교인 이었다.

역사에 기억되는 오스만 제국의 재상들 중에 순혈 투르크인은 많지 않다.

이 점은 투르크인이 잘나거나 못나서가 아니고 능력있는 비주류를 등용 했을 때 그들의

고군분투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Mihrimah Sultan Camii

 

한 때 오스만 제국 전역에 지어졌던 이슬람 사원들은 민족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터키 밖의 나라들에선 대부분이 사라졌다.

 

 

Mihrimah Sultan Camii

 

 

Mihrimah Sultan Camii

 

 

Mihrimah Sultan Mosque

 

 

 

 

 

배가 정박하기 직전에 베일러베이 궁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정박하면 이 출구를 통해 나오게 된다.

 

 

Beylerbeyi Sarayı

 

바다의 문이라고 불린 문이다.

돌마바흐체의 황제의 문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문장이 아직도 제국이 건재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Beylerbeyi Sarayı

 

이 파빌리온엔 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Beylerbeyi Sarayı

 

궁전 외벽의 일부는 복원공사 중이었다.

베일러베이 궁전은 1860년대에 황제의 여름별장으로 지어진 궁전이다.

원랜 동로마 제국 시절 이 곳에 큰 십자가가 설치된 정원이 있어서 십자가 정원이라 불렸다고 한다.

궁전을 지은 건축가는 아르메니아인인 사르키스 발얀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은 건축가인

가라베트 아미라 발얀의 아들이다.

규모는 돌마바흐체 궁전보단 작지만 내부 공간은 돌마바흐체 궁전 뺨칠정도로

화려하고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역시 돌마바흐체 궁전처럼 내부는 촬영불가다.

 

 

Beylerbeyi Sarayı

 

퍼온 사진인데 내부 모습은 이러하다.

앞에 배치된 일본 아리타 도자기가 인상깊었다.

이 곳은 압둘라지즈 황제 때 건설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공존한다.

압둘하미트 2세가 폐위되고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한데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발칸 민속축제가 이 곳에서 열려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베일러베이 궁전 관람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라마춘을 먹었는데 역시 맛은 최고였다.

 

 

 

 

 

 

 

카디쿄이 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탔는데 로템 제작년도가 프린팅된 플레이트가 있어서 신기해서 찍어봤다.

사진을 찍는데 승객들이 '저걸 왜 찍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ㅋㅋ

서울에서 다니는 전동차가 이스탄불에서도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들뜨게 한다.

 

 

 

대구가 여기서 왜 나와? ㅋㅋ 예상치못한 광고판이 너무 반가웠다.

 

 

 

폐차된 전동차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보인다.

 

 

 

 

하기아 에페미아 성당으로 1694년에 지어진 곳이다.

에페미아 성당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던 동명의 성당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원래 있던 하기아 에페미아 성당은 일부 유적이 전해진다.

지금 있는 성당에도 동로마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워서 내부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자난이 안들어가려고해서 난 모스크에 갔는데 왜 넌

성당에 안들어가냐고 하니까 같이 들어갔다 ㅋㅋㅋ

 

 

 

카디쿄이 지구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한 곳이다.

당시 여행을 위해 구입했던 작은 백팩 가방끈 한쪽이 다 뜯겨져서 가방가게에 가서

새로운 백팩을 구입했다.

가격은 역시 저렴하고 품질도 괜찮았다.

가게 사장님이 아주 친절했고 한국을 여행하고 싶다고해서 기분이 좋았다.

여기서 샀던 백팩은 이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1년동안 출퇴근때 매고 다녔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스탄불에서 느꼈던 행복한 기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가방을 멜때 나는 이스탄불에 대해 한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었고 자유로웠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었다.

 

 

 

자난과 펍에가서 나는 맥주 한잔을 주문하고 자난은 커피를 주문했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자난은 집으로 가고 나는 일단 에미노누로 가기위해 배를 탔다.

 

 

Haydarpaşa Garı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 기차역인 하이다르파샤 역으로 1908년에 완성된 기차역이다.

독일인 건축가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2010년 지붕의 화재로 아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작년에 이 곳에서 플랫폼 리뉴얼 공사 중에 고대 칼케돈 유적과 동로마제국 시대 유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발견된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세기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관광지로 조성된다면 정말 굉장할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스카이 라인이다.

 

 

Ahi Çelebi Camii

 

1480년에서 1500년 사이에 건축된 사원으로 미마르 시난의 작품이다.

다른 오스만 제국의 사원들처럼 하기아 소피아의 중앙식 돔에서 영향받은 디자인이다.

관광객들은 거의 지나쳐가는 것 같다. 나도 그랬고....

이탈리아 로마도 메이져 바실리카 말고도 더 오래되고 좋은 성당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런건 재방문을 할때라야 더 감명 깊은 것 같다.

 

 

 

차이집이 보였는데 사이버펑크스러워서 찍어봤다.

 

 

Süleymaniye Mosque

 

쉴레이마니예 사원을 가기위해 언덕을 올라가는데 손자로 보이는 어린 소년의 손을 잡은

히잡은 쓴 장년여성이 나에게 "제팬??" 이라고 물어봐서 웃으면서 "코렐리임"이라고

대답했다🙂

이들도 쉴레이마니예 사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두운 언덕을 올라가고 있으니

어렸을때 시골에서 밤에 찬송가를 부르며 개신교회를 갈때가 생각났다.

 

 

Süleymaniye Mosque

 

이미 관광객 입장시간은 지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사원 앞을 둘러보기로 했다.

 

 

Süleymaniye Mosque

 

서양에선 장엄제라고 불렸던 쉴레이만 대제의 이름이 붙은 사원답게 높은 위치에서

다른 사원들을 굽어보고 있다. 지존의 위치인 것이다.

 

 

Süleymaniye Mosque

 

터키 드라마 '위대한 세기'로 유명해진 쉴레이만 대제의 황비였던 휴렘술탄의 영묘이다.

 

 

 

슐레이마니예 사원 앞에있는 루프탑 카페인 미마르시난 카페에 왔다.

사실 더 좋은 루프탑 카페도 있다고 하는데 난 관광객이니까 일단 FM대로 간다...

 

 

 

명소라서 그런지 겨울인데도 옥상에 사람이 꽤 많았다.

터키쉬 커피를 시켰는데 일반 카페보단 가격이 비싸다.

경치를 즐길 수 있으니 당연한 거지만...

 

 

 

테라스 카페답게 쉴레이마니예 사원 뷰가 너무 멋있었다.

쉴레이만 1세 시대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였는데 상대적으로 이교도 신민들에게

너그러웠던 시기도 이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문제는 군대만을 제국의 기반으로 했다는데 있는데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의 인프라를 개발하기보다 자치권을 줘서 세금이나 바치게하고
이어서 다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반복했는데 비엔나 포위가 실패한뒤 그러한 방식에
제동이 걸리면서 제국은 점차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야경 사진을 찍는데 가죽 라이더 자켓을 입은 젊은 남성이 삼각대를 잠시 빌릴 수 있냐고 물어왔다.

괜찮다고 하고 어디서 왔냐고 하니까 시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터키에서 시리아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경계는 했지만

무리한 요구를 하지않고 깔끔하게 삼각대를 돌려주는 모습에 이 시리아 청년은 좋은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물론 술탄아흐멧 광장에서 사기를 치려한 시리아 사람들도 있지만 안 좋은 것은 잊어버려야지😂)

헤어지면서 시리아가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건너편에 있던 루프탑 카페이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고 있었는데 모스크 앞에서 이런 음악을 트는게 아이러니했다.

그게 터키고 이런 특이함을 터키를 여행하면서 많이 느낄 수 있다.

 

 

 

전 포스팅에서 올렸던 보즈도간 케메리(발렌스 수도교)이다.

같은 건축물이라도 낮과 밤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Zeyrek Camii(Monastery of the Pantocrator)

 

이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이었던 곳이다.

복원을 거친 것인데 측면 외벽의 복원 수준은 나를 실망시켰다.

테라코타의 아름다운 무늬가 안보이고 그냥 미장공사만 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붕괴위험까지 갔던 건물이기 때문에 복원자체에 의의를 두고 싶다.

위키피디아에는 이 곳이 밤에 위험하다고 했는데 죽기나 하겠냐라는 생각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사람만 없었지 조용했다.

 

 

Zeyrek Camii(Monastery of the Pantocrator)

 

다행히 전면부는 크게 손을 대지않아 비잔틴 예술의 품격이 살아있었다.

 

 

Zeyrek Camii(Monastery of the Pantocrator)

 

사원 앞에는 큰 카페가 있는데 내가 갔을땐 카페앞을 천막으로 다 가려놓은 상태라서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다. 물론 다 문을 닫은 시간이었겠지만...

카페에서 보는 제이렉 사원은 정말 멋있다. 하기아 소피아 바로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Zeyrek Camii(Monastery of the Pantocrator)

 

 

 

같은 성벽이라도 유럽과 터키의 분위기는 사뭇다르다.

로마의 성벽이 낭만과 생동감을 준다면 터키나 그리스에 남아있는 동로마제국 시대 성벽은

쓸쓸함과 허무의 정서가 강한 것 같다.

어쩌다보니 나도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갈라타 다리로 위에는 많은 낚시꾼 아재들이 고기를 낚고 아래엔 맛있는 Balik Ekmek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Balik Ekmek은 한국에선 '고등어 케밥'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난에게 발릭 에크멕이

고등어 케밥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정말 이상하다고 하면서

Balik Ekmek은 케밥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했다.

 

 

 

꽤 큰 체스메시가 있었다.

 

 

 

터키인들이 그리스 사람들을 놀리려고 만든 노래라고 한다.

 

 

Çemberlitaş(Column of Constantine)

 

동로마제국 시대 기념물인 쳄벨리타쉬가 보였다.

330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반암으로 만들어졌다.

 

 

Çemberlitaş(Column of Constantine)

 

원랜 위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이 있었으나 12세기 초에 태풍으로

동상과 상층부가 무너졌다고 한다.

그 후 십자가로 대체했지만 오스만 제국 정복후에 제거되었다.

18세기에 하층부 기단이 화재로 불에타버려 보수한게 지금의 모습이다.

미친 스케줄의 하루가 또 이렇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