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유랑

일찌 일어나서 우선 부콜레온 궁전 유적, 예레바탄 사르니지 등을 둘러보고 탁심으로 가서

자난을 만나기로 했다.

 

Küçük Ayasofya Camii(Church of Saints Sergius and Bacchus)

 

큐축 아야소피아 사원이다. 영어로 리틀 하기아 소피아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한때 정교회 성당이었던 이 곳은 하기아 소피아를 지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에 의해 536년에 건축된 곳이다.

비잔틴 초기 팔각형의 돔은 아직 원형돔으로 발전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Küçük Ayasofya Camii(Church of Saints Sergius and Bacchus)

 

모자이크나 성화는 남아있지 않지만 기둥이나 석조부조는 남아있다.

 

 

Küçük Ayasofya Camii(Church of Saints Sergius and Bacchus)

 

2014년에 큐축 아야소피아 사원을 방문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 성하이다.

 

 

Küçük Ayasofya Camii(Church of Saints Sergius and Bacchus)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께선 개조된 사원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 많은 종교가 화합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바르톨로메오 1세의 말씀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는데 내 종교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는데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Küçük Ayasofya Camii(Church of Saints Sergius and Bacchus)

 

이슬람 사원이지만 그리스어로 장식된 부조는 지금도 남아있다.

처음 이스탄불에 가면 대체로 하기아 소피아와 술탄아흐멧 자미를 둘러보고 좀더 시간이 있으면

예레바탄 사르니지,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등을 둘러본다.

 

좀더 시간이 있으면 이처럼 비잔틴 시대 성당에서 개조된 사원을 둘러보면서 원래 구조에서 무엇이

남았는지 찾아보는 과정이 역사의 보물찾기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시간이 있다면 오스만 제국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덜 알려진 자미들을 둘러보면

이스탄불을 좀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나도 아직 이스탄불을 잘 모른다.

자난은 나보단 이스탄불을 훨씬 잘 알지만 역시 아직 가보지 못한 유적지가 많다고 한다.

 

 

Boukoleon Palace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콜레온 궁전이다.

 

부콜레온 궁전은 오스만 제국 말기까지도 꽤 보존이 잘 되있었는데 특히 중앙 파사드부분은

150년 전까지도 건재했다.

 

그러나 1850년~1870년 사이에 기차 선로를 만들면서 궁전의 일부가 파괴됐고

도굴꾼들에 의해 석조 장식들이 도난당해 지금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자신들의 문화인 모스크(모스크로 개조된 구 비잔틴 교회포함), 궁전, 기타 기념물과 달리

선주민들이 세운 유적(고대 그리스, 비잔틴)들이 가치가 있다는 인식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발굴단이 유적을 뜯어가든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고대 이집트 유산에 대해 자신들의 문화라는 인식도 없었기 때문에 쿨하게 외국에 마음껏 팔아넘겼고

어떤때는 타국에 고대 이집트 사원 하나를 통째로 선물로 주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고대 유적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거나 훼손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알짜배기는 독일에 빼앗겨서 반쪽짜리 유적이 된 베르가마(페르가몬) 유적이고

파르테논 대리석군이 없는 아테네의 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다.

서유럽은 이미 고대 유적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터키 공화국은 예전보다 고대 문화유산 보존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터키정부는 이 곳을 야외 박물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리석 표면이 청소되고 풍화 및 마모된 부분은 보수작업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Boukoleon Palace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Boukoleon Palace

 

철로건설로 나머지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은 훼손된 파사드만 겨우 남아있다.

 

 

Boukoleon Palace

 

부콜레온 궁전의 원래 모습을 표현한 다른 일러스트다.

 

 

Boukoleon Palace

 

1850년에 촬영된 부콜레온 궁전 파사드의 모습인데 의외로 중앙 파사드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양쪽에 있는 사자상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이관되어 보존중이다.

 

 

Boukoleon Palace

 

궁전에서 떨어져나온 석조부조들이 모여있었다.

 

 

Boukoleon Palace

 

몇년전부터 철제펜스가 설치됐지만 예전엔 그냥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Boukoleon Palace

 

후기 동로마 제국이 블라헤르네 궁전을 사용하면서 부콜레온 궁전은 그대로 방치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메흐메트 2세가 이 곳에 왔을때 궁전은 거미줄로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같은 폐허상태는 아니었고 그냥 버려진 상태정도로 추정된다.

 

 

Boukoleon Palace

 

황제의 문 측면에 있는 아치가 위태롭게 남아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제1 건축물 하면 하기아 소피아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만 그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궁전 유적이 남아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치상태를 약간 벗어난 수준이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제국의 두 번째 수도에

남아있는 유의미한 궁전 유적이라는 것이 지금도 역사적 가치는 충분한 곳이다.

 

팍스 로마나라는 명칭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제국의 신민들은 로마인이라는 보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제국도 정복과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이 약해지면서 서양은 더한 정복과 폭력의 시대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유럽역사에서 이민족에 대한 대량학살과 잔인한 통치는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오스만 제국도 결국 신민들을 하나로 묶는데 실패하고

몰락하면서 로마라는 보편제국은 결국 역사에 후계를 남기지 못했다.

 

 

Boukoleon Palace

 

바로 위에 올린 황제의 문의 원래 모습이다.

원래 궁전 앞에는 바다가 있었는데 매립되서 지금은 도로가 나있다.

 

 

Boukoleon Palace

 

창문의 대리석 프레임이 건재하게 서있다.

 

 

Boukoleon Palace

 

기둥이 위태롭게 상층부를 떠받치고 있다.

 

 

Boukoleon Palace

 

이 곳은 궁전의 망루였던 곳이다.

궁전의 석벽은 모르타르로 채워진 내부를 석회암 벽돌이 감싸고 있는 구조다.

 

 

Boukoleon Palace

 

 

Boukoleon Palace

 

예전에는 테라스 였을 곳들이 지금은 저렇게 구멍만 남아있다.

 

 

Boukoleon Palace

 

구글링으로 가져온 사진으로 원래는 궁전의 작은 예배당이 있었던 곳이다.

원랜 버려진 상태였고 쓰레기 더미에 방치된 곳이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관리는 되는 듯 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오래된 가옥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도 위치는 그닥 좋지않기 때문에 출퇴근시간에 공항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숙박을 말리고 싶다 ;;

 

 

 

Duvares 카페 레스토랑 왼편에 있는 건물이 동로마 제국 대궁전의 일부이다.

궁전의 내부분은 남아있지 않고 아주 극히 일부만 저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원랜 위에 부콜레온 궁전처럼 심하게 풍화가 된 상태였지만 보수작업을 거쳐 말끔한 상태이다.

현존하는 부분은 본래 대궁전의 램프타워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원래 모습으로 지금의 술탄아흐멧 사원과 그 일대가

대궁전 권역이었다.

때문에 술탄아흐멧 사원 아래에 유구가 묻혀있을텐데 모스크이기 때문에 발굴작업이

불가하다고 한다.

먼 미래엔 사원을 훼손하지 않고도 유구를 조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İshak Paşa Hamamı

 

아주 오래된 하맘(터키식 목욕탕)이 남아있었다.

1482년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그랜드 비지어였던 이샥 파샤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지금은 폐허상태로 남아있는데 소유주가 600만 달러에 건물을 내놨는데 팔리지 않아

원래 가격의 절반인 300만 달러에 내놨다고 한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건축된 예레바탄 사르니지에 도착했다.

연대기로 치면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영어로는 바실리카 시스턴이라고 불리지만 가급적 현지 명칭을 부르는게 내 원칙이라

예레바탄 사르니지(지하 저수조라는 뜻)로 표기했다.

이 곳은 예레바탄 사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지하궁전'이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단순히 저수시설을 넘어 로마시대 궁전이 지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도 그럴것이 옛 신전에서 쓰이던 기둥과 건축부재들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탑은 한 때 저수조의 일부로 기능했다고 한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화질이 좋지 않은 이유는 삼각대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장할때 직원이 삼각대를 검사해서 퇴장할때까지 보관한다.

 

이 곳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여러번 배경으로 등장한 곳인데 최근엔 영화 인페르노로

유명해진 곳이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에서도 등장한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일부 기둥은 휘어져있었는데 좀 불안해 보였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기둥의 부조를 보면 저수조로 쓰이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지하궁전이라는 이 곳의 또 하나의 별명이 과장이 아니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현재의 예레바탄 사르니지는 관람을 위해 물의 수위를 낮게 조절한 상태인데

예전엔 인간의 머리높이넘게 물이 차올랐을 것이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건 역시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점이다.

워낙 잘만든 인프라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계속 보수공사를 해서 사용했다.

 

아쉽게도 이 곳도 위기에 놓인 건축물인데 오스만 제국 때부터 터키 공화국까지

4번의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석조기둥들의 균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더 이상 기둥만으로 저수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위에 사진처럼 금속막대로

기둥과 기둥사이에서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속막대가 작년 말 조사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서 현재 복원작업이 시급하다고 한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기둥끝에 메두사 머리가 있었다.

머리가 거꾸로 되어있는 이유는 정면으로 메두사를 보면 돌로 굳어버린다는 이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Yerebatan Sarnıcı(Basilica Cistern)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장 독특한 분위기의 여행지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만 역술인들이 기가 강하다고 이야기하는 장소에 부합할 만한 곳이다.

특유의 마술적인 분위기에 상당히 압도될만하다.

 

 

 

베식타쉬 경기장인 보다폰 파크인데 바다앞에 있어서 스타디움으로 쓰기에 최고의 입지였다.

 

 

Istanbul Askerî Müze

 

자난을 만나서 터키 군사박물관에 왔다.

터키의 역사는 전쟁없이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터키 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제 1군 사령부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한 돌마바흐체 궁전을 디자인한 가라벳 발얀에 의해 설계된 건물이다.

1841년에 지어졌으니 이 건물 자체도 역사인 셈이다.

 

 

Istanbul Askerî Müze

 

다르다넬레스 전투에서 주포가 고장나자 Seyit Çabuk이라는 군인이 275kg의 포탄을 직접 옮겼다는

일화를 재현한 것이다.

재미있는건 전투가 끝나고 같은 상황을 재현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들어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Seyit Çabuk 상병은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들어올리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Istanbul Askerî Müze

 

많은 추락사고로 인해 과부제조기로 알려진 F-104이다.

 

 

Istanbul Askerî Müze

 

1071년에 셀주크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있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전으로 동로마 제국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는 것이 터키측의 평가이고

생각보다 사상자 피해가 적었다는게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다.

반대로 레판토 해전이 오스만 제국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게 서유럽의 평가였지만

실제론 오스만 제국은 별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역사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니....

나 개인적으론 아나톨리아 중부를 상실한게 단순한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선 그리스+아나톨리아(전통적인 아나톨리아 영역)+크레타섬 3곳은 무조건 사수해야하는데

일단 그리스는 경제력과 수확하기에 최적의 조건이고(단점은 이리저리 흩어져있어서 각개격파 당하기 좋음)

아나톨리아는 그야말로 본진이고 크레타는 에게해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나톨리아 중부를 털린건 나중에 수복을 했다하더라도 해프닝으로 치부할 일은 아닌 것이다.

 

 

Istanbul Askerî Müze

 

가운데 있는 생도가 무스타파 케말이다.

이땐 아타투르크라는 이름을 쓰기 전인데 이땐 무스타파(아랍식) 케말(터키식 아랍이름)이라는

이름을 썼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나선 자신의 이름을 K.Ataturk라고 표기하는데 세속주의자로서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Istanbul Askerî Müze

 

거북선 모형이 있었는데 터키의 26대 참모총장이었던 일케르 바쉬부그가 기증했다고 한다.

 

 

Istanbul Askerî Müze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참전용사가 기증한 훈장이라고 한다.

 

 

Istanbul Askerî Müze

 

제일 아래 가운데 있는 메달은 한국전쟁 터키군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때

감사의 선물로 받은 기념메달이라고 한다.

 

나머지 전시품은 한국전쟁때 터키군에서 군법무관을 했던 세이피 에르크멘씨가 기증한

군번줄, 팔찌, 태극기 등이다.

 

 

Istanbul Askerî Müze

 

한국전쟁때 터키군의 군복이다.

 

터키병사들은 총알이 떨어지면 총검술로 싸웠다는데 차낙칼레(갈리폴리) 전투에 기록된

오스만 제국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다.

 

이분들이 목숨걸고 싸웠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은 사실 상투적이지만

사실임에 틀림없다.

 

이 여행에서 에미노누 근처에 있던 마트에서 계산을 할때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고 좋아하던

점원이 생각난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6.25 전쟁이 당시 참전국가들의 현 세대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터키사람들은 한국전쟁에 파병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파병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Istanbul Askerî Müze

 

당시 한반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Istanbul Askerî Müze

 

한국전쟁에 대한 발발과정과 터키군이 참전한 주요 전투를 다루고 있었다.

군우리 전투, 금양장리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의 설명이 전시되고 있었다.

 

 

Istanbul Askerî Müze

 

한국전쟁때 사용됐던 터키군의 깃발이다.

 

 

Istanbul Askerî Müze

 

한국에 파병된 터키 군인들을 위해 학생들이 피로 지장을 찍어만든 깃발이라고 한다.

 

 

Istanbul Askerî Müze

 

'아일라'로 알려진 한국전쟁때 전쟁고아였던 김은자씨와 터키 병사들이 찍은 사진이다.

 

한가지 오해를 바로잡을까 하는데 한국전쟁때 터키군이 대부분 쿠르드족으로 구성됐었다는

루머가 정설인것 같이 여겨지고 있는데 당시 터키군의 대부분은 앙카라와 서부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희박한 이야기이다.

당시 터키의 쿠르드족 인구비율로 따져보면 15%정도가 될 것이다.

루머의 소스도 쿠르드인 참전용사에게서만 나온 것이라서 근거가 부족하다.

 

 

 

키프로스 전쟁 중에 그리스계 민병대에게서 노획된 군기라고 한다.

 

현대 키프로스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1960년에 키프로스는 대략 그리스계 인구 78% 터키계 인구 18%로 영국에게서 독립했지만

그리스계 인구가 터키계 인구를 일방적으로 배제, 차별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민족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운동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리스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그리스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Enosis 운동을 지지했고

터키의 지원을 받는 터키계 키프로스 인들이 키프로스의 분단을 주장하는 Taksim 운동을 지지했다.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터키군이 직접 키프로스에 상륙해서 영토의 37%를 장악하고 9년뒤 분리독립을 선언했고 40여년이 흘러 지금에 이른다.

 

현재 상황은 그리스계가 이끄는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3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통일에 소극적인 상태이다.

터키계가 이끄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은 터키 이외에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경제금수조치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탈피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대체로 여론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24%가 통일에 찬성하고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65%가

통일에 찬성한다.

 

통일 논의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에서는 2국가체제를 원하고 있는데

이는 섬의 영구적인 분할을 의미한다.

남키프로스 입장에서는 1/4밖에 안되는 북키프로스 인구가 영토의 37%를 차지하는것에

불만이 많고 분리독립 이후에 북키프로스 지역으로 이주한 아나톨리아 터키인과

팔레스타인 등에서 이주한 아랍인들에 대해 키프로스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양쪽이 납득할만한 재조정이 없는한 2국가 체제는 힘들어 보인다.

(남키프로스에선 분단 이전의 터키계 키프로스인과 그 자손들에 대해서만 키프로스인으로 인정한다.)

북키프로스 입장에선 40%에 가까운 땅이 비록 무력침공이지만 아버지 세대의 피값으로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포기할리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키프로스를 국가로 인정할 경우 탄압받는 소수민족은 얼마든지 무장투쟁을 통하여

분리독립을 해도 좋다는 안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을 얘기해보면 그리스계의 쿠데타 시도는 잘못되었고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물론 터키계도 나중에 그리스계를 살해한게 사실이지만 처음엔 그리스계가 가해자의 위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터키군의 쿠데타 진압은 진압으로 끝냈어야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이유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섬의 미래를 위해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

 

 

Istanbul Askerî Müze

 

이 깃발은 그리스 독립전쟁때도 쓰였던 깃발인데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병대도 사용했다고 한다.

 

 

Istanbul Askerî Müze

 

이 전시실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유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이끌던 터키 공화국은 세계에서 손꼽힐정도로 법과 제도가 앞서간 국가였다.
지금의 터키는 중우정치로 전락한듯하다.

 

 

Istanbul Askerî Müze

 

경기도 용인에 있는 터키군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모형이 있었다.

한국 전쟁기념관이 기증한 것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냥 모형일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터키인들이 한국에 이런 기념비가 있는지 모를텐데

우리의 존중을 잘 알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100년의 터키와 한국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최근 터키가 반미노선으로 갈아타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터키 경제제재가 있었다.

현재 터키에선 반미정서가 상당한데 미국이 세속주의 터키를 '온건 이슬람' 국가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즉 종교의 영향력이 약했던 터키에 대해 굳이 종교를 강화해서 온건 이슬람 국가로 가공하고 싶어했다.

우선 세속주의자들 입장에선 미국이 온건 이슬람 국가로 터키를 변화시키려고 하는게 세속주의에 대한

파괴로 받아들였는데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절대 온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슬람주의자들 입장에선 미국의 계획이 이슬람주의자들을 길들이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저 이슬람이 있을뿐 온건 이슬람이란 것은 없다고 언급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미국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온건 이슬람'을 표방하는 페툴라흐 귤렌(이하 FETO) 세력을

지원하는 실책으로 이어졌다.(실제론 귤렌 세력은 전혀 온건 이슬람이 아니라는게 세속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FETO 세력은 터키의 군, 경찰조직내에서 세속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터키와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언젠가는 한국도 몇년전 이란의 경우처럼 선택을 강요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런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난이 예전에 자주갔다는 Tıkıntı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다.

포르투갈식 치킨이라는 뜻인 Portekiz Usulü Piliç을 먹었는데 역시 너무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이랑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잔했는데 일이 있어 자난은 먼저 가고

나는 좀 더 시간을 때우다가 밖으로 나왔다.

몇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터키라는 나라와 정이 들은것 같다.

내가 이 곳 베식타쉬를 좋아하는게 도시가 젊은 느낌이 들고 이름도 베식타쉬할때

공기가 새는 느낌이 세련되게 느껴지고 좋았다.

그리고 몇일전 자난과 베식타쉬의 골목을 지날때 카페 웨이터가 한국사람맞냐고 하면서

한국사람들이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떠나기전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부조를 보기위해 술탄아흐멧 광장에 들렀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궁정을 묘사한 부조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서 그런지 부조에 새겨진 로마인들의 모습이 서글퍼보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승전을 기념한 부조이다.

 

 

 

아래쪽 쐐기자국은 오벨리스크를 옮길때 생긴 흔적이다.

부조를 보면 신기한 것이 한쪽은 라틴어로 돼있고 한쪽은 이렇게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제국의 공식언어로서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둘 다 사용됐던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돌로만 쌓은 성들을 보면 몇십년 관리안하면 우수수 무너져버리는데 몰타르로 만든 로마의 건축물은

천재지변과 변덕스러운 기후 앞에서도 천년이 넘게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술탄아흐멧 광장은 여기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숙소로 가서 매니저인 라마잔씨랑 작별의 인사를 했는데

한국과 터키는 매우 특별한 관계라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지 아니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고 물어보길래

Selanik(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오스만 제국 시대 이름)으로 간다고 했더니 좋은 곳에 간다고 나를 부러워했다.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시대 제2의 도시로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터키인들에게는 많은 향수가 어린 곳이다.

터키 그리스간 인구교환때 돌아온 사람들이 거의 테살로니키나 크레타 출신이 많다.

사실 어떤 터키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면 아직도 영토수복을 꿈꾸는줄 알고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어떤 그리스인들은 터키사람들이 테살로니키를 셀라닉이라고 부르면

아직도 오스만제국인줄 아냐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Bayezid Camii

 

베야지트 사원으로 아쉽게도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화질이 좋지 않다.

1년뒤 베야지트 사원에 방문했을땐 복원중이라 입장이 불가하고 작은 기도실에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 곳도 나와 인연이 없나보다 ㅠ

이때 트램을 타고 악사라이 역으로 가려고했는데 퇴근시간이라 전동차가 만차라 배낭을 메고

도저히 탈수가 없었다.

시간이 그래도 넉넉해서 포기하고 베야지트 사원에서 악사라이 역까지 걸어갔는데

출퇴근 시간에 술탄아흐멧에서 공항이나 터미널로 가는 분들은 일찍 나오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Laleli Camii

 

1783년에 건축된 라렐리 사원이다.

이 모스크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서유럽의 문화가 오스만 제국으로 조금씩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보다 훨씬 서양의 기술을 먼저 받아들인 오스만 제국도 결국 무너졌는데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는게 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 사원의 유지를 위해 상인들을 위한 캐러밴도 같이 건설했다고 한다.

버스터미널로 가야할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매순간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ㅋㅋ

 

 

Pertevniyal Valide Sultan Camii

 

이 곳은 후기 오스만제국때 지어진 사원으로 이슬람사원으로서는 드물게

고딕양식을 도입한 곳이다.

 

 

Murat Paşa Camii

 

무라트 파샤 자미로 1471년에 완성된 이슬람 사원이다.

이 사원의 건축을 의뢰한 하스 무라드 파샤는 본래 동로마 제국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의 아들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 함락후에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가 황위를

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이 곳을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자난은 일주일동안 일도 못하고 나를 가이드 해주려고 연차를 내서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서 참 좋지만 한가지 아쉬운게 자난이랑 닭갈비를 못먹은 것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한국인 레스토랑을 가봤지만 닭갈비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꼭 닭갈비를 같이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버스터미널인 오토가르로 가서 그리스 코모티니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이스탄불에서 코모티니까진 7시간 정도가 걸렸고 가격은 280리라였다.

혹시 몰라서 미리 예매했다.

위의 사진은 중간에 들렀던 휴게소인데 작고 아담했다.

육로로 유럽에 입국했던 것은 처음인데 우선 터키에서 출국할때 탑승객의 여권을

버스 승무원이 전부 걷었다가 나중에 돌려준다.

터키에서 출국할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리스에 입국심사할때 분위기가 정말 가관이었다.

웃긴게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모든 탑승객이 바깥에서 일렬로 늘어서서 출입국 심사를 받았는데

부스를 통과해서 심사를 받는것이 아니고 심사관이 한명한명 취조하듯이 여러가질 물어봤다.

나에게는 호텔바우처를 보여달라고하는데 하필 후불로 내는 곳이라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몰아세우면서 주소가 어디냐고 쏘아붙여서 다운받아둔 예약 확인번호를 보여주고 필요하면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했다.

그외에 제일 태클이 많이 걸린 사람들이 동유럽에서 온 걸로 보이는 젊은 여자 3명이었는데

입국심사관은 그 여성들을 거의 성매매취업하러 온 윤락녀 취급을 했다.

그만큼 불법이민자 문제가 심각하다는건 알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렇게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하고 다시 터키에 재방문해서 그리스에 갈때는 일부러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로 왔다갔다하니 시비도 안걸더만....

아무튼 그리스 코모티니에 도착하니 시간이 5시정도가 됐다.

호텔에 체크인 시간이 되려면 멀어서 일단 짐부터 맡겼다.

사실 잠도 제대로 못자서 그냥 로비 쇼파에서 잠을 청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새벽에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력이 최악인게 이때 무리를 해서 그 다음날 몸살에 걸리게 된다😓

 

 

 

그리스 코모니티에 있던 무슨 공원에 왔는데 겨울이라 분수대는 당연히 작동하지 않았다.

번화가로 갔더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편안했다.

추워서 카페에 갔더니 다 영업이 끝났다고 해서 이번엔 근처에 있던 성당으로 갔는데

체력이 고갈된 상태라 잠깐이라도 앉아있었으면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처럼 성당에서

죽을뻔했다.

2시간정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이번엔 기차역으로 가봤다.

 

 

 

기차역을 서성거리는데 역무원인지 어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그리스어로 이야길하는데

당연히 나는 하나도 못알아들었다.

그랬더니 더 열심히 그리스어로 이야길 하는 것이었다 ;;;;;;;

아마 내가 예매를 하려는줄 잘못 알고 도와주려고 하시는것 같았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역에서 찍은 사진인데 시간도 다 바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올려본다.

코모티니에서 테살로니키까지 대략 5시간 좀 넘게 걸리는듯한데 버스가 나은것 같다.

 

기진맥진해서 9시정도에 호텔로 돌아갔는데 프론트 직원이 친절하게도 체크인을 시켜주겠다고했다.

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