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2018 유럽

20180208 그리스 - 파나기아 찰케온 성당, 로만 아고라,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

Frias 2021. 12. 20. 00:01

 

4세기에 지어진 분수대의 유구로 고대 로마제국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지어진 것이다.

오스만 제국때도 그대로 사용되었고 그리스 독립 후에도 196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Paşa Hamam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그리스 독립후엔 'Phoenix bath'라는 이름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지나가는데 하맘 정문 앞에서 롬인(집시) 소년이 오줌을 싸고 있었다.

한때는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들이 이 곳을 만들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스프레이를 뿌리고 노상방뇨를 하는 곳이 되버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관리소홀일수도 있고 그냥 방치해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문화재를 조리돌림하면서 욕을 보이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이러한 방치상태가 그리스라는 나라의 문화적인 격에 맞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그 정돈 아니겠지만 우리 한국사람들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철거할때 일본에게 한방 먹였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사실 그리스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이, 그리스의 오스만 제국 건축물들이, 그리고 터키의 비잔틴 시대 건축물들이 각 나라의 정부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억의 장소로서 활용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Παναγία των Χαλκέων

 

'파나기아 찰케온' 성당으로 1028년에 지어진 성당이다.

서쪽 입구의 비문에 새겨져 있는대로 이 곳은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 본래 이교도(로마 다신교)들의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었다.

성당이 동로마 시대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진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스만 제국 시대엔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되어 카잔질라 자미(Kazancilar Camii)로 불렸는데 구리 대장장이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현재 이름인 파나기아 찰케온(구리 대장장이의 성모교회)도 이슬람사원일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3개의 돔이 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지어진 성당들과 동일한 구조를 보여준다.

 

 

Παναγία των Χαλκέων(출처:https://thessalonikilocal.com/)

 

나르텍스 팀파눔에 동로마 제국 시대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지금은 비어있었는데 과거의 공구용품점 같았다.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아크릴 간판의 모습이 향수를 불러왔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아고라 유적이다.

원래 있었던 아고라 구역보다 축소된 부분만이 남아있다.

동쪽엔 조폐국과 도서관, 극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로마제국이 자랑했던 선진문명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겠고 말이다.

솔직히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그리스가 역사의 전면에서 활약했던 황금기와 비교해서 몰락했다는 느낌보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모습에서 왜 그리스의 문화가 서양과 중근동까지 퍼져 나갔는지 잘 느낄 수 있었다.

 

 

 

남쪽엔 상점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으로 고대 로마시대 목욕탕이 자리했던 곳으로 디미트리오스 성인이 순교한 곳이다.

이후 5세기에 성당이 지어졌고 전소되었지만 원형을 살려 7세기에 재건된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뒤로 1493년에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는데 이때 바뀐 이름이 '카시미예 자미(Kasimiye Camii)'다. 카시미예는 디미트리오스 성인의 이슬람식 이름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게 존경받았던 성인이라고 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고나서도 기독교도들이 디미트리오스의 무덤에서 참배하는 것이 허용됐다고 한다.

 

1912년 도시가 그리스령이 된후 카시미예 자미는 다시 성당으로 복원된다.

1917년 대화재로 인해 성당의 상층부가 대부분 전소되게 된다.

대화재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원래 불이 기독교인 마을인 동쪽으로 옮겨붙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으로 불이 옮겨붙어 몇시간동안 타게 된다.

그런데 성당이 전소되면서 불은 기독교인 마을 방향이 아닌 바다 쪽인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사람들은 디미트리오스 성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희생해 기독교인들을 구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 후 복원작업에서 1층과 2층의 일부, 그리고 남아있는 건축부재들을 최대한 보존해서 복원해서 현재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재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회반죽으로 덮여있었던 모자이크가 드러나게 됐다고 한다.

현재 모습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7세기에 지어진 성당을 기본으로 한다.

구 동로마 제국령, 그리고 현대 그리스의 정교회 성당들은 몇몇 경우를 빼면 그 원형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교회 자체가 성당을 개조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신중하고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성당들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할 때에도 미나렛을 새로 추가하는 것을 제외하면 건물의 구조 자체를 없애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개조될때 내부에 있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예외적인 몇몇 곳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해지지 않는 편이다.)

 

성당 지하에는 고대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과 카타콤베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땐 운영시간이 끝나서 들어갈 수 없었다.

 

 

 

대화재로 전소된 성당의 모습이다.

로마의 산파올로 푸오리 데 무라 대성전도 화마를 입었을때 이렇게 열주와 앱스만 남고 전소됐었다...

 

 

 

성당 앞 광장의 바닥은 본래 유대인 묘지의 석재로 지은 것이다.

한때는 유대인 인구가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동안 95%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때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묘지를 파괴하고 그 곳에 있던 비석들을 반출해서 망자들의 이름을 지우고 사용한 것이다.

현재의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가 위치한 자리에 유대인 묘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인 묘지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때문에 유대인들도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조상들의 묘비 위를 걸으면서 말이다.

 

 

 

성당의 서쪽 측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성당의 후면부로 여기도 다른 고대 성당들처럼 플라잉 버트레스 역할을 하는 버팀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정말 교과서적인 정통 바실리카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17년 대화재의 흔적을 알 수 있는데 1층의 아치가 군데 군데 빠져있고 2층 기둥은 새로 교체된 것이다.

일부러 새로 지은 부분은 누구나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증축을 치적삼아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고 하기보다 초기 성당의 원형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사제들에 의해 오늘날 사람들은 1500년전에 지어진 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당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테살로니키의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있던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에 있던 아치와 열주이다.

비잔틴 문화 박물관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겠지만 꼭 방문해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앱스에서 테오토코스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었다.

 

 

 

천사들이 성모님과 아기 예수를 축복하고 있다.

 

 

 

하얀색으로 회칠한 부분이 전소되고 새로 지은 부분이다.

그 아랫부분에 정교하게 원형의 아치가 결합돼있는데 복원작업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복원작업이 1917년에서 1949년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는데 얼마나 신중하게 복원이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출처: https://www.thebyzantinelegacy.com/)

 

성 디미트리오스의 유해라고 한다.

 

 

(출처: https://www.thebyzantinelegacy.com/)
(출처: https://www.thebyzantinelegacy.com/)

 

많진 않지만 성화가 곳곳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