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2018 유럽

20180131 터키 - 이스탄불: 뷔위카다

Frias 2021. 2. 3. 23:52

 

이렇게 아침에 하기아 소피아를 볼 수 있다는게 지금 생각하면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이 건축물의 규모가 이 곳이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현대 터키의 이스탄불 서쪽과 동트라키아 지방은 지역적으론 유럽에 속해있지만

터키민족이 아시아에서 왔다는 점과 종교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유럽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다.

 

 

 

이스탄불에는 이렇게 동로마 시대 지어진 유적들이 수도없이 많다.

특별한 보존작업이 없음에도 이런 잔해가 남아있다는 것이 대단할 뿐이다.

 

 

 

 

 

에미노누에서 배를 타기 전에 시미트를 샀다.

아침에 막 만든 시미트가 더 맛있는 것 같다.

 

 

 

이스탄불이 바다로 나뉘어져있다보니 있다보니 그로인해 도시가 어느 도시보다도

입체적으로 다가오는것 같다.

 

 

 

 

 

페리는 헤이벨리아다 섬을 지나쳐갔다.

헤이벨리아다섬은 정교회 계열인 할키 신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할키 신학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신학교였지만 1971년에 터키 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회의장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할키 신학교를 다시 열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미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터키에게 미국의 요구가 오히려 역효과가 되는건 아닌가 싶다.

미국이 역으로 할키 신학교를 영원히 폐쇄할 것을 에르도안에게 강력하게 요청하면 어떨까?ㅋㅋ

 

 

 

헤이벨리아다섬을 지나서 뷔위카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은 고대 그리스 시대엔 왕자를 뜻하는 Prinkipos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엔 권력에서 밀려난 황족들의 유배지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자동차가 없는 섬으로도 유명한데 마차랑 자전거만이 교통수단으로 이용가능하다.

뷔위카다섬을 일정에 포함한건 자난의 결정이었는데 처음엔 생소했는데 여행하고나선

자난의 선택이 옳았다는걸 깨달았다🙂

 

 

 

1908년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이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1858년에 지어진 아르메니아 가톨릭 성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은 무기한 폐쇄상태인 상황이다.

자난이 이야기하길 지금도 섬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빈 건물들은 매물로 올라와서 나중에 리모델링해서 개발할

사업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보건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런 저택들은 프랑스에서 본 양식과 비슷한 점이 보인다.

오스만제국의 근대화때 프랑스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독일식 저택도 있었다.

 

 

HACOPULO KÖŞKÜ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곳은 그리스인 부자였던 키르바코 하코풀로스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1층부터 3층까지 23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키르바코 하코풀로스가 터키를 떠난뒤 호텔로 사용되다가 1927년부터 관공서로 사용중이다.

 

 

HACOPULO KÖŞKÜ

 

 

Con Paşa Köşkü

 

Con Paşa Köşkü(John Pasha Pavilion)이라고 불리는 이 목조저택은 1880년에 지어졌으며

베네치아 출신인 이탈리아인 존 파샤(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가 소유했던 건물이다.

존 파샤의 사망 후엔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살았지만 1차대전때 소식이 끊긴뒤

 

그리스인 건축가인 Achilles Politsis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뷔윅카다섬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저택 중 하나다.

오스만 제국 시대말기 부자들의 삶은 당시 유럽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로인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시기였다.

 

이 근처에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해와서 살던 집의 폐허가 남아있는데 아쉽게도

당시엔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이 곳이 트로츠키가 살던 저택으로 지금은 잔해만 남아있다.

 

스탈린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트로츠키는 이 곳에서 1929년부터 4년간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터키 공화국이 트로츠키의 망명을 받아주는 조건은 소련이 암살시도를 하지않을것을 요구했고

트로츠키에게는 터키 국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이 뷔위카다섬으로 갈수있는 교통수단은 페리뿐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웹서핑을 통해 레온 트로츠키가 뷔위카다 섬에서의 망명생활 당시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트로츠키는 망명지로 터키를 원하지 않았고 터키 문화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었고

아타투르크의 반공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 알려진 바로는 트로츠키는 뷔위카다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했고 항상 보안을 유지하고

저택내의 가구배치를 정기적으로 바꾸는등 꽤나 긴장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안 좋은 생활만은 아니었는지 가끔 그리스인 어부랑 낚시를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것 같았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중병에 걸린 트로츠키를 치료하려 의사가 왕진을 와서 청진기를

꺼내려는데 이를 의심한 트로츠키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 생각은 트로츠키에게 경호인력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한때 제 2인자였던 사람이

저런 무례한 행동까지 했을 것 같진 않다.

 

어쨌든 뷔윅카다에서 체류하던 당시의 트로츠키는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 이 뷔윅카다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념적 공백상태인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연속혁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너무 어렵다.

 

 

Agasi Efendi Köşkü

 

뷔위카다 섬에서 가장 큰 저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장식때문에 목조저택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인다.

오르한 파묵이 왜 그리 옛 이스탄불의 목조저택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간다.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낀건데 자동차가 없으니까 공기가 너무 맑았다.

 

 

 

지나가는데 젖소가 들판에 누워있길래 가까이 가봤다.

별로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는듯 했다 하하!

 

 

Aya Yorgi

 

963년 동로마제국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는데 악명높은 4차 십자군에 소속된

라틴 해적들에 의해 파괴됐고 오스만 제국 시대인 1751년에 재건됐는데

현재 남아있는 종탑이 그때 지어진 것이다.

종탑옆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은 1884년에 지어졌고 예배당 건물은 1905년에 지어졌다.

 

성당에 터키 국기가 걸려있는게 인상깊었다.

마치 이 성당이 외세에 의해 지어진 성당이 아니며 터키의 일부로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여기도 내부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고 노출이 심한 복장은 금지되어 있다.

자난이 성당직원한테 정교회냐고 물어봤다.

 

 

성당 앞에 있는 나무에 끈을 묶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끈을 묶진 않았다.

이미 유럽온거 자체로 나는 소원을 이뤘다구 ㅎㅎㅎ

 

 

 

성당내부는 촬영금지여서 대신 사진을 퍼왔다.

사실 터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이 사진촬영을 금지하는건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역사적으로 증오의 타겟이 된 적이 있다보니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나게 된 것 같다.

왜냐면 그리스에 있는 정교회 성당들도 오래된 성화가 많은데 플래쉬만 터뜨리지

않으면 딱히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4월 23일 성 조지의 날에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성당에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이 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해서 무슬림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렇지만 터키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당들이 많이 있다.

다만 터키의 경우는 무슬림이 주류인 국가이기 때문에 잊혀진 성당들이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이 있던 건물이다.

 

 

 

성당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자난과 터키쉬 커피를 한잔했다.

이 커피는 터키에선 터키쉬 커피라고 불리고 그리스에선 그릭커피,

키프로스에선 씨프리옷 커피라고 불린다.

주의해야 할게 터키 커피숍에서 그릭커피를 달라고 하거나 그리스에 있는 커피숍에서

터키쉬커피를 달라고하는건 금기시된다.

예전에 국내 여행 블로그 글을 읽는데 남키프로스에 있는 카페에서 터키쉬 커피를 달라고하자

카페주인이 '우리에게 터키쉬커피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나 씨프리옷 커피라고 할때까지

주문을 안받아줬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기억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세데프 섬을 볼 수 있었다.

 

 

 

여기도 비어있었는데 참 잘 지은 건물이다.

 

 

Sabuncakis Köşkü

 

저택의 파사드 부분이 그리스 신전처럼 생겨서 발걸음을 멈췄던 건물이다.

무려 저택의 입구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저택의 첫번째 소유주는 알레포에서 온 Yorgi Sabuncakis라고 한다.

설계도 아테네 대학 건축 교수인 Fotiadis가 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엔 아주 화려했을 것같은 집이다.

 

 

 

뷔위카다섬에선 마차와 자전거가 주요이동수단이다.

 

 

 

오래된 집들이 아름답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있었다.

군산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래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칠을 하지 못한 외벽의 모습도 그런대로 좋아보인다.

 

 

 

방문은 하지 않았지만 소개하고 싶은 건물이 있어 올려본다.

바로 뷔윅카다에 있는 버려진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프랑스인 건축가 Alexandre Vallaury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날씬한 실루엣의 오스만-터키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1898년에 지어졌을땐 호텔과 카지노로 사용할 계획이었는데 오스만 제국 압뒬 하미트 2세가 

도덕성 타락을 이유로 이를 무산시켰고 건물은 부유한 그리스인에게 팔렸고 이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기부했다고 한다.

1903년에 고아원 개관식에는 황제 압뒬 하미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요아힘 3세가 참석했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의 쉼터가 된 이 건물은 난방을 위해 러시아인들이 건물의 목재 외벽을

떼어서 땔감으로 쓰면서 건물의 손상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전쟁동안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현재는 이렇게 버려진 상태다.

복원을 위해서는 4천만 유로(현재환율로 한화 537억원)가 든다고 한다.

이게 어느정도 돈이냐면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으로 운영했을 때 1년 입장수입의

반 정도 되는 금액이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은 위험한 상태에 놓인 7대 세계유산에도 뽑혔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85년부터 관리인이 있는데 허가를 받은후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건물에서 5미터이상 떨어져있어야 한다.

 

 

 

1999년 이스탄불 지진으로 건물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바람으로부터 이 건물을 막아줄 지붕도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상태다...

100년전 이 섬의 고아들이 보호를 받아야했던 것처럼 이 건물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관리인의 말을 전하면 이 곳에서 자랐다는 그리스에서 온 노인이 와서 관리인과 내부를

둘러본뒤 "왜 우리집이 이렇게 됐나요?"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아야 요르기 성당에서 찍은 사진인데 9시 방향에 있는 건물이 바로 이 그리스 고아원 건물이다.

 

 

 

바다 건너편엔 이스탄불 아시아 지구가 보이는데 아마 저쪽엔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겠지만 여기 뷔위카다는 모든게 느리고 평화롭다.

 

 

 

 

 

섬을 떠나기 전에 발릭에크멕을 먹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게 너무 좋았다.

자난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자난은 다시 집으로 가고 나는 유럽지구로 돌아갔다.

시간은 한정돼있는데 가보지 못한 곳은 너무 많기에 나는 이 날 밤도 돌아다니기로 했다.

 

 

Bodrum Camii(Myrelaion)

 

보드럼 사원으로 본래는 10세기에 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진 곳이다.

나에게 의미가 남다른 곳인데 나중에 이 곳에 다시 왔을때 사원의 젊은 이맘인 모하메드씨가

나를 환대해줬던 곳이다.

다만 이때는 아직 그를 몰랐을 때였다.

 

 

Molla Fenâri Îsâ Câmîi(Lips Monastery)

 

몰라 페나리 이사 사원으로 원래는 10세기에 지어진 정교회 수녀원과 성당이었다.

사원 명칭 중에 '이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정교회 성당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지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이 곳과 나는 인연이 없는지 이때 방문했을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두 번째 방문했을때는 복원작업 때문인지 아예 문이 닫혀있었다.

 

 

 

1550년에 만들어졌다는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을 발견했다.

사실 술탄아흐멧에 있는 하맘은 너무 비싼데 이 곳은 관광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저렴할 것 같다.

 

이 곳에 대한 소문이 몇가지가 있는데 바로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미마르 시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있다.

 

이땐 하맘을 체험하기 전이었는데 나중에 카파도키아에서 하맘을 즐길 수 있었다.

 

이 하맘이 만들어질 당시 서유럽에선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인 이유때문에

목욕을 기피했는데 동로마인들과 오스만인들은 계속해서 목욕을 했다.

 

 

 

터키의 국기를 보면 Red 보단 Crimson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것 같다.

 

 

 

마르마라 대학건물이다.

가끔 악몽을 꾸는데 대표적인 악몽이 대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그 악몽엔 18학점을 들어야한다 20학점을 들어야 한다 이런 말이 나와서

날 괴롭게 한다.

당시 집에서 먼 학교를 다녀서 지각을 했을때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수업을 포기하고

PC방으로 가거나 도서관으로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