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7-1 터키 - 이스탄불: 이슬람 예술박물관, 술탄 아흐멧 사원, 카리예 박물관
푹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러 갔다.
Seatanbul 호스텔에서는 아침식사가 무료로 제공됐는데 식당에서 보이는 마르마라해 뷰가 압권이다.
아득하니 생각에 잠기기 좋은 풍경이었다.
오래 전엔 이 동네도 원래 동로마 제국의 왕궁이 있던 곳이었다. 왕궁의 유구는 이 근처에 남아있다.
Seatanbul 호스텔도 있고 호텔도 있는듯한데 투숙객들을 위한 식당은 1개인듯했다.
보통 호스텔에서 아침식사가 제공된다고하면 평범한 토스트 정도만 제공되는데 여긴 퀄리티가 꽤 괜찮았다.
먼저 도착해서 자난을 기다렸다.
여긴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한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이브라힘 파샤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이브라힘 파샤는 오스만령 그리스 출신으로 원래 정교회 출신이었다.
2등 국민이자 비주류였던 셈인데 오스만 제국의 말직부터 재상까지 오른걸보면 오스만 제국은 종교만 이슬람을 믿으면 계층간 이동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황족이나 쓸법한 명칭을 자칭하는등 처신에 부족함을 보이다가 결국 쉴레이만 대제에게 처형당한 것을 보면 비주류로서의 좌절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슬람의 경전인 성 쿠란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성 쿠란을 아주 깨끗하게 관리하고 집에 가장 중요한 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중에 성서에 많이 읽은 흔적이 남는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시대 만들어진 쿠란이다.
색채가 빛이 바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터키식 모자이크이다.
그리스 로마식 모자이크와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15세기초 콘야에 있던 나무 문이다.
기하학적인 음각이 정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셀주크 제국 시대 부조이다.
그리스 로마 조각과 다르게 반복적인 식물 디자인이 돋보인다.
지금 기술처럼 기계로 뽑아낸 것도 아니고 전부 수작업으로 짜서 만든 것이다.
터키 & 이슬람 예술 박물관 지하에는 로마제국시대 히포드롬 경기장 유구가 남아있다.
진짜 로마는 지하에 있다는 이야기가 다시 한 번 확인이 되는 순간이다🙂
한땐 이렇게 거대한 전차경기장이 존재했지만 4차 십자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때 공격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보물들이 서유럽으로 약탈되었고 다시는 예전처럼 세계의 수도로 기능하지 못했다.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가 Sedefekar Mehmet Agha에 의해 지어진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오스만 제국하면 떠올리는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사원의 일부는 동로마 제국 대궁전 유구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이 동로마 제국에게서 모티브를 차용했기 때문에 돔이라는 테마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대형 돔 양식으로 인해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기아 소피아와 마주본 모습이 흥미롭다.
사원의 규모때문에 주입구에서도 일부만 보인다.
아쉽게도 술탄아흐멧 사원을 건축한 시기부터 제국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사실 비잔틴 제국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나 성 사도 성당등을 제외하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성당들인데
이런 대형 모스크를 하나도 아니라 여러 개를 지어댔으니 오스만 제국이 사원건설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사원에 들어갈땐 신발을 벗어야 하며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들어갈 수 없다.
또한 여성은 머리카락을 가려야 하는데 사원에서 히잡이나 천을 빌려주었다.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기독교 성지순례 목적으로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단체관광객 코스에도 포함되어 있는 곳이다.
그 정도로 종교를 초월해서 꼭 방문해야할 터키의 보석이다.
(물론 더 파고들어가면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도 있고 셀리미예 모스크도 있지만 접근성과 상징성을 고려하면 술탄 아흐멧 모스크가 방문 1순위라고 할 수 있다.)
기대 이상으로 모스크는 너무 아름다웠다.
블루모스크라는 별명답게 푸른빛깔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신기한 마음에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본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에 쿠알라룸푸르 국립모스크나 싱가포르에 있는 술탄 모스크도 밖에서만 사진을 찍고 들어가진 않았다.
왜냐면 둘 다 현대에 생긴 모스크이고 국립모스크에서 직원이 내 물음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불친절했기 때문에 굳이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반면 터키의 모스크에선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고 부담을 주지 않았다.
돔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오차를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듯 했다.
아랍에서 온 사람들같은데 민바르를 신기한 듯이 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민바르 자체도 아주 큰 규모이다.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임을 넘어 삶의 규범이 되어 국민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터키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않고 라마단 기간을 꼭 지키지만 그래도 아랍국가들보단 많이 자유로운 편이다.
아브라함 계열 종교는 경전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평화도 되고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종교이다. 가톨릭은 공의회로 개혁을 해왔지만 이슬람은 바티칸같은 중앙조직이 없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이런 퇴행성이 무슬림 이민자 집단과 원주민 집단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에서 샤를리 엡도의 모하메드 풍자를 소개한 교사가 참수당한 사건은 그러한 예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으로 가기위해 왼쪽 지하터널로 이동했는데 터널안에서 노신사가 인사를 했다.
사소하지만 좋은 기억이다.
술탄아흐멧 모스크와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 중간에 위치한 아라스타 바자르이다.
가격은 그랜드 바자르보다 비싸지만 규모 대비 고퀄리티 상품이 많다는 평가를 듣는다.
대궁전 모자이크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은 5세기~7세기 동안 건설되었다.
이 곳에 보존된 모자이크는 바닥에 장식된 모자이크들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와도 겹치니 한때 이 곳의 모자이크를 황제도 걸어다녔을 것이다.
1953년에 개관한 박물관이지만 그 당시 지어진 목조 박물관은 습도와 온도관리가 안되서 모자이크가 손상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에 현재의 박물관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흔히 동로마 제국에 대해 갖는 오해가 그리스도교때문에 그리스 로마 고전 문화가 약화되었다는 것인데
세속 분야에서는 여전히 헬레니즘 문화가 살아있었다.
대궁전 모자이크는 바닥 장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발굴 당시엔 훼손도 심하고
이스탄불이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공기에 있는 염분이 부식을 가속화 시켰다고 한다.
지금 전시된 모자이크들은 모두 염분과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보존작업을 거친 것이다.
위 사진의 모자이크는 원래 모자이크에 붙어있던 모르타르를 제거하고 새로운 모르타르를 붙여 전시되고 있다.
대궁전의 모자이크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모자이크가 없고 그리스 신화나 동로마 제국의 세속에서의 모습을 반영했다.
성당에서 보이는 성화와 달리 이 곳의 모자이크는 그리스-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자연주의 경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여기도 군데 군데 모자이크가 듬성듬성 사라진 부분이 있는데 복원작업때 새로운 모자이크로 대체해보려고 했지만 위화감이 너무 심해서 원래 있는 모자이크를 강조하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호랑이 사냥꾼들을 묘사한 모자이크로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색채의 유려한 묘사가 제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모자이크 장인들을 불러모아 제작했음을 상기시킨다.
프리즈 장식으로 사용되던 모자이크다.
멸실된 부분을 제외하면 상태가 아주 괜찮았다.
역시 프리즈 장식이다.
카리예 박물관 외관은 이렇게 공사중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명품건축물이지만 수 없는 지진을 견뎌내며 만신창이가 된 건물이기 때문에
보수작업이 필요하다.
평소엔 이런 외관이라고 한다.
코라 수도원으로 지어진 이 곳의 역사는 동로마 제국 초기인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구조는 11세기에 완성되었다. 이후 지진으로 일부가 붕괴된 수도원은 14세기에 이삭 콤네노스 왕자에 의해 수도원 성당으로 재건된다.
이 때 추가된 벽화들은 서유럽에 의해 벌어진 콘스탄티노플 침략 이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헬레니즘 색채가 더해지게 된다. 라틴 예술에서 멀어지고 동로마 제국 지역의 뿌리가 된 그리스의 고전에서 답을 찾은 것인데 '비잔틴 르네상스'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이 곳의 성화들은 이전의 전형적인 비잔틴 예술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 배치가 너무 조화롭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미쳐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친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1500년부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게 되는데 코라 수도원에서 카리예 사원으로 바뀌게 된다.
동시에 성당일 당시 제작된 모자이크들이 회칠로 덮여지게 되는데 5세기 동안 비잔틴 예술은 서유럽에 건너간 흔적으로서만 남아있게 된다.
그 후 1958년에 터키 공화국의 세속화 정책의 일환으로 하기아 소피아처럼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2020년 8월, 카리예 박물관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됐는데 지지층 결집을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여겨진다.
내가 방문했을때는 카리예 박물관이었기 때문에 이 명칭을 따르고자 한다.
2020년 8월 20일을 기해 카리예 박물관은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왼쪽 사진이 이전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이 성화를 커튼으로 가린 현재 모습이다.
이슬람 예배 중엔 위에 사진처럼 커튼으로 가려질 것이라고 한다.
카리예 박물관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을땐 Naos(본당)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본당은 훼손이 많이 진행됐기도 하고 돔 부분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진으로 쓰러진 것을 재건한거라 모자이크가 남아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 곳의 백미는 외부와 내부 나르텍스와 소성당 구역의 정교회 장식이다.
솔직히 이 곳은 구조때문에 이슬람 사원으로 쓰기엔 불편함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건축물 전체에 걸쳐 수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있는데 이걸 억지로 가리고
굳이 천장낮은 이슬람 사원으로 쓰는건 정말 어색하기 그지없다.
과거의 터키 세속주의 정권은 몇 개의 상징적인 정교회 성당이었던 곳은
비록 중간에 모스크로 개조되었을지라도 박물관으로 타협할 줄은 알았다.
코라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행적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잔틴 모자이크를 감상하기엔 하기아 소피아보다 더 좋은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나르텍스 입구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가 있고 왼편엔 로마시대의 순교자 게오르기우스 성인의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사도 바울 모자이크인데 금빛 모자이크를 실제로 봤을때 느낌에 최대한 근접하게 촬영된 것 같다.
자난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반짝인다'라고 표현한 그 금빛 모자이크...
현대에는 LED 등도 있고 별의 별 기상천외한 조명도 없던 11세기의 동로마인의 눈에 이런 모자이크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해봤다.
내부 나르텍스에 있는 모자이크로 성모님 아래엔 동로마 제국의 왕자였던 이삭 콤네노스가 표현되어 있다.
돔에 새겨진 판토크라토르 모자이크는 처음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조들이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육신은 100년도 가지 못하지만 이 곳의 모자이크는 1000년 가까이 늙지 않고 살아있다.
성모님과 12천사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최후의 심판이 프레스코화로 표현되있다.
소성당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Parekklesion 소성당은 장례식을 지내던 곳이다.
소성당의 앱스부분에 그려진 프로스코화를 마주했다.
'부활'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예수 왼편은 아담, 오른편은 하와이며 아담 왼쪽의 3인은 세례요한, 다윗, 솔로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엔 파괴된 죽음의 문과 열쇠들이 널부러져 있다.
그저 오래된 성화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성당예술의 레퍼런스가 된 작품이다.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도 Anastasis가 이콘으로 표현되어 북한교회 부활을 망자의 부활로 표현했다.
이 곳에서 Anastasis 성화 아래 장례식이 치뤄졌다고하는데 동로마인들의 종교적 열망이 느껴졌다.
아담과 하와를 일으켜 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동로마인들은 구원을 확신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부분이 이렇게 훼손되어 있었다.
13세기 모자이크면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기술적으로는 가장 발전했을 시대여서 온전하게 관리되었다면 어느 모자이크보다도 훌륭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유럽국가의 경우 훼손된 모자이크 부분을 교체해서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터키의 경우 훼손된 부분은 놔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터키도 2차대전 이후에 모자이크 복원 인력을 양성했지만 어디까지나 복원에 대한 것이고
비 기독교 국가로서 성화들을 새로 창조한다고 한다면 정교회 국가들의 심리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중풍환자를 치료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카리예 박물관의 백미는 성모님의 삶을 표현한 18개의 모자이크 패널이다.
위쪽 모자이크는 요아킴이 아기 성모님을 사제들에게 데려가서 축복을 받는 장면이다.
모자이크들이 높은데 있다보니 관람하다가 목이 아플 수 있다.
아래쪽 모자이크는 사가랴가 성모님의 남편감을 다윗왕가 후손 12명중에서 선발하는 장면인데 맨 앞에 서있는 요셉이 지팡이에서 꽃이 돋아나자 당황하는 장면이다.
기도하는 성모님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상태가 좋지 못했다.
사실 카리예 박물관의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여러 문제가 많다.
많은 관람객들이 내부에서 뿜어내는 이산화탄소와 습기때문에 액체화된 염분이 백화현상을 일으켜서 그림을 훼손시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위쪽에 아나스타시스 성화도 군데군데 백화현상이 발견되는데 처음엔 그림을 망가뜨리지만 그 다음은 그 아래 석고를 무너뜨린다고 한다.
카리예 박물관을 나와서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서 차이를 한잔했다.
따뜻한 차이를 한잔하니 뱃속이 따뜻해졌다.
사실 추운 야외를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도 아프지 않은건 터키에서 잘 먹고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